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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도적 사고 (KOTOBA 수록)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8. 24. 12:36

    KOTOBA*라는 잡지에 무도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기고했다. 그 글을 다시금 써둔다.

    (* 왕년에 이라는 잡지가 있었지요? , 경마 잡지는 아닙니다. – 옮긴이)

     

     

    수행은 경쟁이 아니다

     

     

    무도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천하무적이라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로 도달 못하는 무한 소실점과도 같은 목표를 향하여, 선달(先達)을 따라서, 그저 담담히 수련을 쌓아가는 삶의 태도를 이릅니다. ‘천하무적이라는 무한히 먼 목표를 향한 여정에서 수행자는 누구든지 오십보백보입니다. 이렇듯 무한한 여정에 임하면서는, 자신이 다른 수행자보다 몇 킬로미터 앞섰는지, 단위시간 내에 얼마나 주파했는지, 그런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는 일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도 수련을 할 때는 같은 수행자끼리 승패와 강약, 늦음과 빠름, 잘남과 못남을 비기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올림픽 종목 같은 경기 무도에서는 승패를 겨룹니다. 그러므로 ‘스포츠’입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무도‘와는 애초에 다릅니다. 물론 스포츠’는 심신의 가능성을 폭발시킨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우열을 다툰다는 점을 주안으로 삼는 한, ‘수행‘이라 볼 수 없습니다.

     

     

    무도 수련을 처음 시작하려 우리 도장을 처음 찾아온 사람이 가장 놀라는 점은 이렇듯 상대적 우열을 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현대인은 나자마자 쭉 학교나 직장에서 능력과 성과를 심사받고 평점이 붙으며 등수가 매겨지고 그 등수에 따라 자원을 나눠갖는 걸 사회적 공정성(fairness)’이라고 학습해 왔습니다. 어떤 규칙과 틀 안에서 높은 점수(score)를 따게 되면 경쟁 상대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학교교육에서 고량할 수 있는 신체능력은 달리기가 얼마나 빠르냐, 얼마나 높이뛸 수 있느냐, 착지점(goal)에 얼마나 정확히 들어올 수 있느냐 하는 따위의 종류인데, 이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매장하고 있는 심신의 능력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며, 개중에는 학교 체육 시간 때 계측할 수 없는 게 태반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작은 기척[]이 바뀌는 걸 감지하는 감수성, ‘사악한 것‘이 접근해 올 때 강한 위화감을 느끼는 능력 등을 무도에서는 굉장히 중히 여기는데도, 학교 체육 시간에는 아예 평가 자체를 안합니다.* 심지어 그런 능력은 학교에 안나가’ 라든가 체육 시간에 쉴거야‘ 하는 식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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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옮긴이: “수건 돌리기“ 놀이 같은 걸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사악한 것”에 관해선 우치다 선생님의 ‘하루끼‘론을 참고해주세요.)

     

    그 결과, 체육시간에 낮은 평점을 받은 아이들 가운데는 ‘아무래도 나는 신체능력이 낮은가 봐’ 하고서, 심지어 자기 몸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사람마저 나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체육에서 배워야 할 게 딱 하나 있다면, 자기 몸에 묻혀 있는 엄청난 자원을 믿고, 이를 꾸준히 파내는 일입니다. 자기 신체에 대해 경의와 호기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인간의 신체가 얼마나 깊고 복잡한 것인가 깨닫고 놀라며, 자신의 신체에 대해 외포의 염을 품는 일입니다.

     

     

    수련을 하면서 생기는 신체의 변화는 이를테면 신경망이 정밀화한다든가, 호흡이 깊어진다든가, 장기와 관절의 기동이 최적화되는 그런 층위(level)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고속 카메라같은 최신 계측 기술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잡아낼 수 없습니다. 단전, 체간, 정중선과 같은 용어를 우리는 수련 중에 빈용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해부학적 실체가 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계측 기기로 고량할 수도 없거니와, AI로도 분석할 수 없습니다. 수행이란 것은 기계적으로 계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소한 변화를 감지해낼 수 있는 신체를 만드는 일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이나 특성을 획정하여 그것을 수치적으로 등수를 매기고, 이에 따라 자원을 차등 분배하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성장을 막는 짓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수행이란 연속적인 자기쇄신입니다.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에게 정체성(identity)’이라는 개념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될 법한 것을 찾아내어 꽉 쥐고 있는 것은 단적인 아집‘알박기’입니다. 수행에 지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에서나 무도에서나, 수행의 목적은 아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풍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수행은 서로 궁합이 안 좋은 겁니다.

    (옮긴이: “연속적인 자기쇄신“을, 우치다 선생님은 예전에 심신 OS 업데이트‘라고도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들 1년씩 아니 허구한 날 운영 체제가 업데이트되는 스마트폰 등을 쓰시니까, 이 개념은 이제 익숙하시겠지요?)

     

     

    무도가 변질되어 버린 내력

     

    무도에서는 승패강약 교졸지속을 다투지 않습니다. 본래 사람은 패배하면 패배에 알박기‘합니다. 굴욕감이나 패배감에 영영 갇혀버려 다음 단계(phase)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다음에는 이기겠다’는 한정적인 목표에 알박기를 해버립니다. 이기면 또 이기는 대로 승리에 알박기‘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승리에 알박기’하는 게 그 반대보다도 위험한지 모릅니다. 이겼다는 사실을 성공 체험으로 알박기 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람은 한 번 성공하면 그 성공 체험을 놓아버리는 데 강한 심리적 저항을 느낍니다. 똑같은 성공 체험을 되풀이하려 합니다. 그런데 수행은, ‘알박기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승리에 알박는’ 사람은 패배에 알박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연속적인 자기 쇄신 기회를 포기하는 것임으로 수행 과정에서 탈락하는 사람인 겁니다.

     

     

    무도는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최대화하기 위한 방도입니다. 다양한 위험(risk)을 회피하여 결국 살아남기 위한 지헤입니다.

     

    야규 무네노리는병법가 전서좌를 보라, 기를 보라‘ 하는 가르침을 썼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장소에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게 무도의 요체이다 하는 겁니다. 볼일 없는 곳에 오래 있거나, 말하면 안 되는데 말을 꺼내서 목숨을 잃었던 자가 예전부터 많았다고 무네노리는 썼습니다. 일부러 적을 만들어서 라이벌과 승패를 다투어, 지면 지는 대로 거기에 매달리고, 이기면 이기는 대로 거기에 매달리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게 오랜 가르침인 것입니다.

     

     

    일본의 전국시대까지 무도는 스포츠가 아니라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지혜와 기술‘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에도시대가 되자 점차 효율적인 살상 기술’이 되어갔습니다. 근데 무도의 질이 현격히 변화한 건 메이지 시대 이래입니다. 그때까지 무도는 지배 계급(* 무사 계급 역주)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전장에서 무훈을 세우면 그게 곧 지역을 다스릴 능력을 의미한다는 얘기입니다. 무도적인 능력이 높다는 건 치국평천하, 즉 통치의 지혜와 통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 말기부터 사무라이뿐만이 아니라, 상인(* 일본은 상업이 발달 역주)이나 농민도 무도를 일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이난 전쟁’ 이후(* 메이지 중앙집권의 확립 역주) 전 국민을 병사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부국강병‘ 정책을 채용하기에 이르러, 무도에서 수행적 요소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즉 이때부터 무도는 누구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체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살상 기술로 왜소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강도관 유도를 창시한 가노 지고로 선생은, 유도를 학교 체육 시간에 편입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근데 이게 처음 심사 때는 불가했다 합니다. ‘가타수련을 본 독일인 심사원이 보통 사람은 이런 기묘한 움직임을 취하지 않는다며 학교 체육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는 겁니다. 이듬해 심사에서 란도리를 보여주었더니 이번에는 합격했습니다. 레슬링이나 매한가지로 근육과 뼈를 발달시키고, 운동 능력을 끌어내는 데 주효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가타수련은 사제간의 대면 수련이 기본이나, ‘란도리의 경우에는 지도자 한 명만 있으면 반 전체에 일제히 수업을 할 수 있습니다. 학교 교과목의 경우에는 그게 훨씬 효율이 좋기는 합니다.

     

    가노 선생은 이러한 경향을 심히 염려하여 정력 선용 국민 체육가타를 중시하는 프로그램을 고안하여, ‘가타수련 중심의 유도로 돌아갈 것을 제언했습니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 나가 있는 유도가 가운데 가노 선생의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에 이어 무도가 두 번째로 시련을 겪게 된 건 1945년 패전 이래입니다. 미군정은 무도를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특히 검도를,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선포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엄금했습니다. 이에 관계 부처는 검도의 연명을 꾀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이것은 죽도 펜싱이라며 검도는 무도가 아닌 스포츠를 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발등의 불을 끄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게 옳은 판단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점령이 끝난 뒤(1952역주) 정부는 이름을 되돌리고서 검도는 스포츠가 아니다. 어엿한 무도이다하고 전언철회를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문부성은 꾸물거렸지요. 결국 이후 무도와 스포츠의 차이를 공론화하는 게 무도계에서는 금기시되었습니다.

     

    제가 수련하고 있는 아이키도는 다이쇼 시대 말기에 체계화된 근대적 무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의 무도적 전통을 본딴 바 경기란 것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키도의 개조(開祖; 창시가 아님. – 역주) 되시는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은 날아다니는 총알을 포착한다든가, 손을 안 대고도 상대를 쓰러트리는 초능력적인 와자[]’를 구사하셨다 합니다. 현재 아이키도는 아무래도 그런 초능력 비슷한 것을 개발하겠다는 뜻을 내놓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승패강약을 논하지 않고, 심신을 정밀하게 놀리는 걸 탐구하며 수행 중시 무도를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아이키도는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수행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도를 추구하는 장, 그것은 도장



    제가 가이후칸이라고, 손수 지은 도장을 갖게 된 지 십사 년이 흘렀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아래층 도장에 내려갑니다. 게서 미소기신토에 전하는 호흡법을 행하고, 세 가지 축사를 올리며, 반야심경과 부동명와의 진언을 읊고, 아홉자 신호를 긋고, 마지막으로 나카무라 덴푸 선생이 말씀하신 오늘의 서언 오늘 하루, 화내지 않고, 두려워 않고, 슬퍼하지 않고, 정직, 친절, 유쾌할 수 있기를…’를 읊는 등, 도장을 영적으로 맑게 하는 게 도장장인 제 임무입니다.

     

    저는 도장을 자연과학 연구실에 곧잘 빗대어 설명합니다. “자네들은 연구자 신분으로 제각기 연구과제를 떠안고서 여기 연구실에 모였다. 기자재나 시약은 지도교수인 내가 넉넉히 제공할 터이니 다들 마음껏 연구하게나.” 가이후칸은 그런 인상을 풍기는 도장입니다. 제가 할 일은 모든 이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정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극이 낮은 환경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합니다. 자극이 강한 환경에서는 감수성을 민감케 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현대 사회를 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 귀에 들리는 소리, 몸에 닿는 것, 냄새 등이 반드시 쾌적한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방어를 하려고 기를 쓰며 신체 감수성을 둔감케 하여 외계에서 들어오는 입력을 줄이려 듭니다. 하지만 그러면 수련을 못합니다.

     

    될 수 있으면 높은 신체 감도를 유지하였으면 합니다. 따라서, 도장에서는 눈에 들어오는 것, 살갗에 닿는 것, 향기 등을 느끼고 기분 좋아지게끔 해야 합니다. 아무리 민감해져도 불쾌한 입력이 없다 하는 조건을 꾸미는 것, 그것이 도장장으로서의 제 책무입니다.

     

     

    적과 아군을 대립시키고 승패 우열을 다투는 출력은 뇌의 작용에서 오롯이 비롯됩니다. 세포 층위(level)에서는 자기와 타자라는 대립이 없거니와, ‘누가 더 센가하는 경쟁도 없습니다. 오히려 동종의 개체가 가까이 있으면 세포 층위에서 먼저 동기하려고 합니다. 동종의 것과는 싱크로나이즈하여, ‘뭉친 덩어리로 되는 게 생존 전략상 유리하다, 이것이 생물이 발생한 이래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아이키도는 생물이 가진 이러한 본성적인 싱크로나이즈지향을 이용하는 기법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싱크로나이즈 작용에는 유발자가 있고, 피유발자가 따로 있습니다. 싱크로나이즈를 유발하는 자가 장을 주재합니다.’ 생물로서 보다 강하고, 보다 빠르며, 보다 자유도가 높은 움직임을 하는 자가 싱크로나이즈를 유발하고, 장을 주재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생물이 발생한 이래 기본적인 원칙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을 대립적으로 받아들이는 뇌의 영향을 될 수 있는 한 멀리하고서, 세포 층위에서 가장 적당하다 여겨지는 움직임을 족족 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뇌의 간섭을 배제하겠다고 쉽게 말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해보는 건 어렵습니다.


    이를 테면 아이키도의 손놀림을 살펴보죠. 손은 뇌가 가장 제어(control)하기 쉬운 부위이기 때문에, 손을 잘 쓰려고 의식하면 거기에 신체 자원(resource)이 집중하여, 다른 부위에는 자원이 전달되지 않게 되며, 손 이외의 부위에는 상동적인 혹은 기계적인 움직임이 고착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온몸이 원활히 연동하여 모든 신체 부위가 고르게 높은 감수성을 향수하고, 높은 조작성을 발휘하려면, 뇌를 잠시 잠들게 할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키도에서는 움직일 때 가벼운 명현상태에 들어가도록 가르칩니다. 아이키도를 일러 움직이면서 하는 참선이라고들 하는 게 아마 그런 이유일 겁니다.

     

    수련 시간에는 신체를 뇌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서 자발적으로 움직이게끔 지도합니다. 가벼운 명현 상태가 이어지므로, 90분가량의 수련이 끝나면 마치 탕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처럼, 볼에 홍조를 띠고, 피부에 빛이 납니다. 회사나 학교 같은 곳에 으레 있는 트러블 때문에 정신건강이 악화된 사람마저 수련을 마치고 나서는 왜 자신이 그리도 괴로워했는지 그 이유조차 잊어버린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 개조는 “‘아이키미소기일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수행이란 심신을 정화하고, 투명하게 하는 일입니다. 얼룩이나 맺힌 데를 씻어버린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수련 지도를 하면서 가장 기쁠 때는, 기특하게도 문인들이 자신의 신체를 정중히 다루게 되었을 때입니다. 학교 체육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서는 내가 몸을 잘 못 놀리나 보다하고 딱 믿어버린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몸에 경의와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도장이 가지는 가장 교육적인 의의입니다.



    도장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다

     

    저는 칠십 세가 넘어가면서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었고, 작년에는 췌장을 절제했습니다. 항암제 치료를 받으면서도 수련은 쉬지 않았습니다. 수련은 결코 배신하지 않습니다. 수련을 하면 반드시 상달(上達)합니다. 우직하게 오십 년 수련을 쌓아온 인간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처음 입문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기술이나 이치를 이해할 턱이 없으므로, 꼬박 던지거나 던져지면서 땀 한번 거하게 흘렸다정도만 하면 됩니다. 우케미[受け身] 시도를 해보기만 해도 재미있으면 그래도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느닷없이 모든 걸 알게 되었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에 수행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제 알았다!’ 하고 무릎을 쳤던 걸 내일 가서는 이게 아냐하고 부정합니다. 매일이 발견의 연속입니다. 이게 몹시 재밌는 겁니다.

     

    스포츠에는 플래토(plateau; 고원) 상태라는 개념이 있지요? 기술이 정점에서 멈춘겁니다. 무도에는 그런 슬럼프라는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와자[]수수께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다는 언명이 전제가 됩니다. 주쓰리[術理]를 모르겠고, 와자를 못하는 상태가 기본적(default)이므로, 할 수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와자가 간직하고 있는 수수께끼의 깊이에 경탄할 따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승과 대별되는 제자의 위치에 서는 게 뭘 배우는 데에는 가장 효율적입니다. 스승이 하는 말씀을 초심자 시절에는 거의 알아먹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스승이, 제자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는걸 제자가 스트레스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학교 체육 얘기로 돌아가보면, ‘모두가 할 수 있는 일다른 사람보다 잘 하는걸 두고 경쟁합니다. 이와 반대로 무도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수련합니다. 따라서, 남보다 잘한다든가 남보다 세다 하는 심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능력은 심히 다종다양하다는 뜻임. – 역주)

     

     

    외포와 동조에 이를 길

     

     

    저는 학력이라는 말을, ‘배우는 힘으로 풀이합니다. 지식이나 정보의 양을 이르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가, 무엇을 못하는가를 아는 힘, 그것이 배움의 원점입니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자각하는 데서 배움이 기동합니다. 따라서, 무지 무능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배우는 힘 제2단계는 스승을 모시는 힘입니다. 제 경우 아이키도는 다다 히로시 선생님, 철학은 에마뉘엘 레비나스 선생님을 스승으로 우러르고 있습니다. 다다 선생님은 올해로 95세이신데, 지금도 건강히 도장에 서 계십니다. 스승 한 분을 저는 50년 동안 모시며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예외적인 행운입니다. 레비나스 선생님은 199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오늘날 젊은 연구자 신분으로 레비나스 선생님을 직접 만나본 분은 이제 안 계신 줄로 압니다. 저는 다행히도 직접 찾아 뵈어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하고 간원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좋을 대로 하시구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여태껏 레비나스 선생님에 대한 책을 세 권 썼습니다. 그런데 이건 레비나스 연구의 일환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레비나스 선생님의 책을 읽고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썼기 때문입니다. ‘연구자에게는 이런 일이 용납되지 않지요. 연구자는 이해한 것만을 논문에 써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레비나스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레비나스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항상 거의 대부분의 관심을 점하고 있답니다. 이에 대해 썼을 따름이에요. 저에게 중요한 건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 나에게는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하고 기꺼이 머리를 감싸 쥐곤 하는 모습은 철학 연구에서든 무도 수행에서든 마찬가지랍니다.

     

    물론 독학을 한다 해도 뛰어난 업적을 올리는 사람 역시 있습니다. 근데 이런 경우 독학자의 괴롬은 자신이 이해했던 것’, ‘알고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발판 삼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제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제자는 위대한 스승을 모시며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신원 보증이 되어있으니까요. 내가 뭘 할 수 있느냐? 하는 걸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는 뭘 할 줄 아니?’ 라는 물음에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희 선생님이 알고 계실 걸요하고 대답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제자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의 최대 장점(advantage)은 자기 자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너희는 배우고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너희는 배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축감(縮減)하지 않고서도 전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다 히로시 선생님은 학자에게는 학자 나름의 아이키도가 있다. 예술가에게는 예술가 나름의 아이키도가 있다고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도장에서 배운 것을 실생활에 전개할 수 없다면 그건 진정한 아이키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애초에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수련을 한다는 건 학자의 아이키도이기도 하고 작가의 아이키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책을 참 많이 쓰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제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학통의 창시자인 척하려면, 내가 알고 있는 것밖에 쓸 수가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저는 어엿한 제자입니다. 이 말인 즉, 스승에게 볼을 패스받았는데, 이 볼을 아무리 서투른 플레이라 하더라도 다음 세대에게 전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옛사람이 이른 바 술이부작 신이호고입니다. 따라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저로서는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만을 써서 남겨둘 뿐입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이어가십시오하고 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도수행을 통해 익힌 것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외포의 염과, 동종의 개체와 동기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아마 어떤 집단에 있더라도, 무슨 일을 하더라도, 유쾌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2025 6 18)

     

    (2025-06-18 08:0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합기도 개풍관 관장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용기론』 『목표는 천하무적』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