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려읽기) 사죄와 배상인용 2025. 8. 9. 16:51
철학이 없는 사람을 믿지 마라
후루타니 씨의 아버님께서 넥타이 맨 사람은 믿지 말라고 하셨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만, 저희 아버지는 이미 ‘넥타이 맨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반복해서 한 말은 ‘어떤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그 사람의 지위나 학력과는 무관하다, 철학이 없는 인간을 믿지 마라’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버지는 만주 사변이 있던 해 열아홉의 나이로 홋카이도에서 만주로 건너갔다가 패전 이듬해에 베이징에서 귀국했습니다. 15년간 대륙에 머물면서 만주국의 건국, 중일 전쟁, 그리고 패전을 경험한 셈입니다. 그 과정에서, 특히 패전 전후 대륙에서 그동안 군의 위세를 등에 업고 호의호식했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허둥지둥 도망쳤는지 가까이서 목격하셨죠. 아마 그때 아버지는 믿을 수 있는 인간과 믿을 수 없는 인간을 가늠하는 일이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듯싶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인간이 있고, 반대로 약속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죠. 그것은 그 사람들이 가진 지위나 학력과는 무관했습니다. 잘난 체하며 자신의 지위를 뻐기던 사람이 패전하자마자 부하와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고, 오히려 묵묵히 일만 하던 낮은 신분의 사람들 중에 성실하고 신의가 두터운 사람이 있어 궁지에 몰린 동료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일로부터 뼈저리게 터득한 바가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 상관하지 않고 이치를 따르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세상의 도리를 지키며, 이해타산과 사리사욕으로 언행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의지가 됩니다. 철학을 가진 사람인지 잘 살피라고 어린 저에게 거듭 가르친 이유는 아버지가 철학을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 궁지에서 벗어났던 개인적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나왔던 사람들이 죄다 믿을 수 없는 이기주의자들에, 배신자였다면 그런 식으로 말했을 리 없겠죠.
1950년대 말 이후로 아버지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철학이 없는 인간을 믿지 말라는 말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고도 성장기에 막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TV나 자가용이 생활을 근대화로 이끌게 되자,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생사에 위협이 되는 긴장감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져서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 몸에 아버지의 충고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의미를 알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의미 같은 건 몰라도 몸에 스며드는 말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 말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곱씹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피와 살이 됩니다.
저는 철학을 가진다는 것을 그때는 일단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고쳐 읽었습니다(아이일지라도 용기의 의미를 대충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그 시절 제가 생각한 철학을 가지는 것이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물러서지 않고, 상대가 많든 상대가 힘이 세든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 ‘불합리하다’고 말하고, 무엇보다 말 한마디를 중요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기적인 이유로 약속을 어기지 않고, 입 밖에 꺼낸 말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 말입니다. 용기가 있고 말 한마디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주위 사람들이 생각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저는 학생이었으므로 생사가 걸린 상황을 맞닥뜨릴 기회는 없었습니다만, 만일 그런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저 사람은 믿어도 좋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속는 것도 일종의 악이다
(…) 자기에게 접근해오는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인간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별하는 감정안이 있으면, 사이비 종교에 세뇌당할 위험이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아예 0에 수렴한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 살 정도부터 어른들은 ‘세상에는 결코 믿어선 안 되는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다. 그 특징은…’으로 시작하는 조언을 각자의 경험치에 근거해 아이들에게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패전 직후에 영화감독 이타미 만사쿠(이타미 주조의 아버지입니다)는 「전쟁 책임자의 문제」라는 매우 인상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그 글은 전쟁을 돌아보며 ‘나는 속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이타미는 ‘나는 무지했다, 나는 사람이 너무 좋았다, 나는 순수했다, 그래서 속았다’는 식으로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향해 글로써 혹독한 회초리질을 했습니다. 그 일부를 인용해두겠습니다. 다소 길지만 가능하면 음독해보세요.
많은 이들이 전쟁에 속아넘어갔다고 한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속고 있었단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자기가 속인 쪽에 있었다고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쯤 되니 점점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속인 것과 속은 것의 구별이 분명하다고 믿지만 실은 착각인 것 같다. 이를테면, 민간인은 군이나 관에 속았다고 하지만, 군이나 관 관계자들은 죄다 윗선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속았다고 할 것이다. 그 윗선으로 가면 더 윗선에게 속았다고 할 게 틀림없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한두 사람만 남는 셈이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겨우 한두 사람의 머리로 1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면 속이고 있던 인간의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속이는 전문가와 속는 전문가로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던 게 아니라,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속으면 다음 순간에는 그가 다른 누군가를 붙잡아 속이는 것과 같은 일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즉, 일본인 전체가 서로 속고 속이는 데 열중해 있었다. (…) 나는 시험 삼아 제군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제군은 전쟁 중 단 한 번도 자식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가?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전쟁 중에 단 한 번도 자식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있을까.
불쌍한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만 만약 그들이 비판의 눈을 가졌다면 그들이 본 세상의 어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쟁 책임자로 보였을 터다. 우리가 진정으로 양심 있고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전쟁에 대한 책임이란 그런 것이다. (…)
속았다는 것은 부정한 일을 저지른 이에 의해 피해를 입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그 어떤 사전에도 속는 게 옳다는 말은 쓰여 있지 않다. 속았다고 하면 일체의 책임에서 벗어나 무조건 정의파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나는 속는 것이 반드시 옳지 않음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속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악임을 주장하고 싶다. 속는다는 것은 지식이 부족한 데서 오지만 신념, 즉 의지 박약에서도 비롯된다. 불명(不明)을 사과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는 분명 지능의 부족을 죄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속는 것 또한 하나의 죄이며 예부터 결코 좋은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속는 것 자체가 이미 일종의 악이라는 이타미의 주장은 경청할 만한 식견이라고 생각합니다(다만, 이타미의 글을 사이비 종교 피해자에게 적용하면 매우 잔인하게 들릴 수는 있겠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 있으면 상대가 정치인이든 군인이든 교사든, 혹은 종교인이든 쉽게 속지 않습니다. 사람 보는 눈을 기르고 그 사람의 지위, 사회적 위신, 학식 등과 관계없이 믿을 수 없는 인간은 믿지 않는다는 식견을 단단히 가지고 있었다면, 모든 일본인이 서로 속고 속이는 데 열중하는 끔찍한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치다 타츠루 『용기론』
'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려읽기) 비평적이면서 예의 바른 어조 (0) 2025.09.08 (가려읽기) 교수의 속사정 (0) 2025.08.23 글쓰기와 무도 수련 (0) 2025.07.30 (가려읽기) 오즈 야스지로오 〈가을 햇살〉 (1960) (0) 2025.07.26 (가려읽기) 하품 학원 (0) 2025.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