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글쓰기와 무도 수련
    인용 2025. 7. 30. 06:07

    글쓰기와 무도 수련

     

    책을 몇 권이나 썼는지 이제는 일일이 세지 않는다. 책을 내기 시작한 지 10년이 조금 넘었는데, 아마 100권은 너끈히 넘겼을 것이다.

     

    가끔 “대필작가가 있나?”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런 건 없다.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출판업계에는 ‘누군가에게 초고를 부탁하고 거기에 조금 손을 대서 한 권 완성’ 식으로 책을 내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책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받아 봤다. 물론 거절했다. 나에게 ‘쓰기’란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것’을 말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가장 즐거운 그 과정을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애초에 내 속에서 아직 말이 안 돼 바둥바둥하는 ‘성운 상태’의 아이디어를 남들이 알 턱이 없다. 나 자신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쓰고 나서도 마음이 개운해지지 않는다. 무엇을 써도 말이 부족하거나 혹은 지나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덧붙이고 지나친 부분을 덜어낸다. 끝이 없다.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것도 전에 몇 번이나 쓴, 비슷한 내용을 달리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비슷한 이야기를 전에도 읽었는데”라며 짜증내는 독자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부디 참아 주시길. 나도 어쩔 수 없다. 한 번 쓰고 ‘하고 싶은 말을 다 썼다’는 성취감이 들면 그 주제에 대해 더는 쓸 일이 없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고쳐 말해도 ‘다 썼다’는 느낌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지금 쓰고자 하는 것은 원리적으로는 ‘내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내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내가 지닌 어휘로 붙잡으려 하고 있다. 이는 강물을 컵으로 퍼 올리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해도 다 퍼낼 수가 없다. 내 안에서 ‘말이 되기를 원하는 아이디어’는 나에게는 미지의 것이다. 그걸 아는 척해도 아무 의미 없다. 남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은 속일 수 없으니 말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꿀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번역 일을 통해 그 훈련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번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레비나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거의 알지 못했다. 아는 부분이 압도적으로 적었다. 그래도 내 이해를 초월한 철학자의 말을 나 자신의 말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비나스가 쓴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단지 나에게 철학사적 지식이나 프랑스어 독해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만이 아니라 (둘 다 꽤 모자라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내가 미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더 성장하지 않으면 레비나스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번역이라는 작업은 나에게는 어학 능력이라는 지적 문제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나의 인간적 성숙과 관련된 문제였다.

     

    온종일 레비나스의 텍스트와 마주하고 오로지 일본어로 바꿔 가는 작업을, 도쿄도립대학의 대학원생 때부터 조교 시기를 거쳐 고베여학원대학에 교수직을 얻어 옮길 때까지 10년 가까이 거의 날마다 이어갔다. 그 시기에 일주일에 4~5일은 지유가오카에 있는 합기도 도장에 다녔다. 낮에는 레비나스를 번역하고 저물녘에는 도장에 가서 수련하는, 판에 박은 듯한 생활이었다. 그러면서 레비나스가 책에 쓴 내용과 다다 선생님이 도장에서 하시는 말씀이 어딘가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라는 한 사람이 똑같은 열정을 담아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모두 살아가는 지혜와 힘에 관계되는 가르침이었다. 그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면 내가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 ‘언어의 생성’과 ‘무도의 수련’이 구조적으로는 같은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도 수련에는 눈에 보이는 목표, 수치적・외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목표가 없다.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1초 단축한다든가 상완 이두박근을 1센티미터 키운다든가 순위에 들어간다든가, 이렇게 수치화할 수 있는 목표는 무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도 같은 경기 무도라면 ‘〇〇대회 우승’ 같은 목표를 내거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 목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그런 목표를 내거는 편이 내걸지 않을 때보다 질 높은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경험지(經驗知)가 그런 ‘방편’을 선택하게끔 한다.

     

    한창 수련 중일 때는 지금 하고 있는 수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당사자는 잘 모른다. 모른 채로 그냥 한다. 지금 하는 수련의 의미는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다. 수련의 성과라는 것은 오로지 ‘그런 부위가 있는 줄도 몰랐던 부위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라든지 ‘그렇게 움직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던 움직임이 가능해진다’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체에서, 그때까지는 따로 분절된 적이 없던 부위나 움직임이 출현한다. 기호적으로 분절되지 않았던 것이 기호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 부위’나 ‘그런 기능’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부위를 조작해 기능을 제어할 수 있게 돼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런 것을 어떻게 수련에 앞서 목표로 내세울 수 있겠는가.

     

    이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자기 수양에 힘쓰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걸 모르기에 ‘아이’인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는 어른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어느샌가 어른이 되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과거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되돌아보며 너무 미숙했음을 깨닫고는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이가 살아가는 목표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이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어른이 무엇인지 몰라도 어른이 될 수는 있다. 이것이 성숙이라는 과정의 현묘한 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여정표를 만들어 일상에서 기울이는 노력의 성과를 수치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오늘은 어제보다 3포인트 어른이 되었어” 같은 표현으로는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묘사할 수 없다.

     

    무도 수련도 마찬가지다. 수련의 목표는 고수, 달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투시도법의 ‘무한소실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고수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알 턱이 없다. 하지만 무한소실점이 없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듯이, 이 영원히 달성될 수 없는 목표를 목표로 내세우지 않으면 지금, 여기에서 수련을 진행할 수 없다. 아이가 어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조금씩 성숙해 가듯, 우리 또한 고수, 달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도 그것을 목표로 긴 수련을 할 수는 있다.

     

    내가 지금 어떤 기술적 과제를 달성하고자 수련하고 있는지를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수련이 진행되어 그 기술적 과제에 손끝이 닿고 난 다음이다. 무엇인가를 하고 나서 내가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한 것일까 돌아보고는 “아마도 이런 일을 한 걸까” 하고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가르친다. 몇 년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어쩌다 보니 말할 기회가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무도에서도 몸이 먼저, 말은 나중이기 때문이다.

     

    다만, 말로 움직임을 지시할 때도 신체 부위를 구체적으로 가리키며 그곳을 몇 센티미터, 몇 도 각도로 움직이라는 식의 지시는 하지 않는다. 어떤 부위를 정밀하고 움직이려고 의식할수록 그 이외의 부위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으려 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분을 컨트롤하려다 보면 전체가 오버 컨트롤되고 만다.

     

    일상생활에서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의식적으로 몸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펜을 쥔다든가 젓가락을 든다든가 키보드를 친다든가 칼을 잡는 등의 일상 동작에서는 손가락이나 손목이나 팔꿈치나 어깨의 ‘올바른 사용법’을 의식하지 않는다. 의식하면 동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일부 근골만 사용하는 일상적인 동작에서도 우리는 중심을 이동하고 허리를 회전하고 복강을 확대・수축하고 어깨뼈를 열고 닫고 고관절을 안팎으로 돌리는 등 무수한 부위에서 세밀한 운동을 동시에 자동으로 실시하기 때문이다. 중추신경에서 제어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제어하려면 변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뇌가 계산할 수 있는 부분까지 변수를 줄이고, 사용하려는 해당 부위 이외의 부위는 되도록 고정된 것으로 해 두는 것이다. 그것이 ‘주저앉는다’는 것이다. 중추신경이 제어하는 구체적인 동작은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면 그 동작과 관련이 있다고 (본인이 믿고 있는) 신체 부위 이외의 부위는 움직임을 멈춰 버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비유적 표현에 의지해 ‘거기에 없는 것’을 사용해 몸을 움직이게끔 한다. 굵은 붓을 쥐고 공간 가득 커다란 원을 그린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가로로 길게 벤다. 손에 바늘과 실을 들고 바늘귀에 실을 꿴다. 이런 상상 속의 동작을 하게끔 한다. 그러면서 상대를 던지거나 굳히기를 한다. 실제로는 상대의 손목을 잡더라도 잡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없는 칼자루를 잡는다’고 상상하게 한다. 그러면 움직임이 극적으로 바뀐다.

     

    상대가 내 경동맥을 노리고 손칼로 한쪽 어깨에서부터 비스듬히 내리 베는 동작을 피하는 기술을 수련한 적이 있다. 그런데 좀처럼 잘 안 된다. 아무래도 상대의 손칼을 보고 그에 응하고 만다. 이를 ‘후수로 밀린다’고 표현한다. 상대가 이렇게 해 오면 이렇게 피하자, 이렇게 반격하자는 발상을 하는 한 반드시 후수로 밀린다.

     

    후수로 밀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상대의 동작과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이 상대의 동작을 피하거나 돌려주는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문득 어떤 동작을 하고 싶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데 그것이 ‘적중’할 경우, 이는 후수로 밀린 것도 아니고 선수를 잡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상대의 유무, 시간적 선후, 빠르고 느림과도 관계없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일본 각지에 요괴 ‘사토리’ 민화가 있다. 사토리는 원숭이나 너구리를 닮은 야수다. 산속에 있다가 인간을 보면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의 마음을 읽는다. “‘지금 섬뜩한 도깨비가 왔다’고 생각했지?” “‘빨리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읽고 괴롭힐 준비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화롯가 뒤에서 튀어오른 땔나무에 맞고 깜짝 놀라 황급히 달아난다……는 이야기다. 사토리는 인간의 마음을 읽고 다음 동작을 예측할 수는 있지만, 무작위로 일어나는 현상을 예지할 수는 없다. 이는 무도에서 ‘선수’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단서가 된다.

     

    ‘상대에 앞서 움직인다’는 틀에 머무르는 한, 몸이 움직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 의도가 이미 새어 나온다. 상대에게 간파당하기 마련이다. ‘상대에 앞서 움직인다’는 틀 자체가 ‘후수로 밀린다’는 의미다. ‘선수’란 사토리 이야기의 ‘땔나무’와 같은 움직임이다. 그것은 ‘상대의 공격에 앞서 공격’한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나 ‘먼저’ 같은 틀 바깥에 서는 일이다. 다다 선생님이 자주 쓰는 비유를 빌리자면 ‘잊고 있던 사람의 이름을 문득 떠올릴 때의 느낌’이다. 떠올리려 애쓰면 애쓸수록 그 이름은 점점 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물밑에서 기포가 솟아오르듯 문득 이름이 떠오른다. 이와 비슷하다. 상대의 공격에 응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물밑에서 기포가 솟아오르듯’ 어떤 동작이 하고 싶어진다.

     

    한쪽 어깨로부터 비스듬히 내리 베는 것을 무력화하는 움직임이 잘 안 되어 고민하던 중, ‘첫눈의 눈송이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심코 손바닥을 내민다’는 상황이 문득 떠올랐다. 상대방이 베어 들어오는 상황은 일단 잊는다, 베어 들어오는 상대의 대각선 뒤쯤으로 내려오는 눈송이가 보인다(고 생각한다), 눈송이를 받으려고 무심히 손바닥을 내민다…… 이 움직임을 제자들에게 시키니 ‘후수에 밀리지 않고’ 보기 좋게 베기를 제압할 수 있었다.

     

    손바닥에 닿은 눈송이를 감지하려면 먼저 손바닥 피부의 감도를 극대화해 둬야 한다. 미세한 감각의 입력에 반응하려면 신체 어디에도 힘씀이나 뻣뻣함이나 느슨함이 없어야 한다. 그런 몸 상태를 이루는 데에 ‘힘씀이나 굳음이나 헐거움이 없는 몸을 만들라’는 식의 명령은 아무 소용이 없다. 긴장 없는 몸을 만들려다 보면 긴장할 뿐이다. 그보다는 다른 일(그것도 실패할 수 없는 일)을 맡기면 된다. 애당초 눈 같은 것은 내리지 않았기에 손을 내밀어도 눈송이를 놓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상상 속의 눈을 찾아서 손바닥의 감도를 최대화하는 상태에는 틀림없이 이를 수 있다. 그때 우리 몸은 힘씀이나 뻣뻣함이나 느슨함이 어디에도 없는 몸이 되어 있다. 그것이 ‘강한 신체’다.

     

    뭔가 가상의 동작을 해 본다. 거기에 없는 것을 찾는다. 거기에 없는 것을 만지려고 한다. 거기에 없는 것을 조작하려 한다. 그런 움직임은 멈추기가 어렵다.

     

    거기에 무언가가 실제로 있을 때 누군가가 그것을 만지려고 뻗은 손을 제압하는 일은 간단하다. 하지만 거기에 없는 것을 만지려는 손을 제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것이 도대체 어디를 목표로, 어떤 종류의 운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목표물이 10센티미터 앞에 있는지 1미터 앞에 있는지, 손가락 끝으로 만지려는 것인지 손바닥으로 누르려는 것인지, 쥐려는 것인지 돌리려는 것인지 구부리려는 것인지 밀쳐 내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한 움직임에서 경로를 예측해 저지하거나 간섭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는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익히기 시작한 아기가 저쪽에서 아장아장 걸어오면 피하기가 쉽지 않다. 아기가 어디를 향해 어떤 행보를 하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아기의 동선을 피할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기가 내 무릎을 끌어안고 있다. 그때 아기는 균형을 잃고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있는 내 다리에 매달렸던 것이다.

     

    아기의 움직임은 내 다리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완만한 동작이었는데도 나는 쉽사리 잡히고 말았다. 과연, 거기에 없는 것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을 예지하거나 제압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거기에 없는 것에 생생한 실제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노가쿠에서는, 시테에게 중요한 인물이 정작 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마쓰카제」의 나리히라도, 「스미다가와」의 우메와카마루도 무대에 없다. (죽고 나서 부활해 세상에 다시 올 예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 인용자) 하지만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극적 공간이 구성된다. 인간 세상에서는 종종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의해 현실이 바뀐다. 그 상황은 무도에서도 아마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 『목표는 천하무적』, 169~181.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오길비 동무의 존재가 이제 현실로서 나타난 것이다. 죽은 사람은 창조해낼 수 있어도 산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기묘한 충격을 주었다. 현실 속에 존재한 적이 없던 오길비 동무가 과거 속에 존재하여, 일단 이런 날조행위가 잊혀지기만 하면 샤를마뉴나 율리우스 시저처럼 확실한 증거 위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