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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쥘 베른과 챗GPT인용 2025. 6. 22. 13:36
일 년 전쯤에 세비야 사람들은 북극에 있는 몇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다룬 기사를 읽느라고 신문을 잠시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기분은 작열하는 안달루시아 평원에 때 아닌 얼음덩어리들이 떼굴떼굴 굴러다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리 작은 땅 덩어리라고 하더라도 그의 기하학적인 영역에서만 갇혀 지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행위는 지구의 다른 지점에 많은 시각적 효과를 위해 작용되고 있다. 물리학의 원리에 따라, 오늘날의 지구는 그 어느 지점에서도 이때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실질적인 편재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겠다.
(…)
19세기에는 진보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어도 많은 것들이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최악을 상징하는 요소들, 즉 퇴보・야만・몰락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 자체의 성질로 보아 결코 나쁜 징후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모든 삶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과 다시 접촉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삶의 내부를 뚫고 들어가서 그의 무섭게 고동치는 내장 속에서 살 수만 있다면, 그 고통스럽고도 달콤한 불안은 그만 삶 속에 파묻히지 않을 수 없다.
진지한 태도로 삶을 뚫고 나가면서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지는 자는 아마 어떤 불안감에 사로잡혀 경계 태세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로마 군대의 군대 규율에는 군단의 보초에게 잠을 자지 않고 경계 태세를 취할 수 있도록 언제나 검지를 입술 위에 갖다 대게 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 자세는 과연 그럴 듯한 것이, 그것은 마치 미래의 은밀한 태동을 듣기 위한 것인 양, 밤의 정적에 대해 최대의 침묵을 명령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9세기와 같은 소위 완성의 시대가 우리 인간에게 주는 안정감은 그 시대의 방향을 우주역학에 맡긴 채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환각일 따름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자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자는 그들이 꿈꾸는 미래에 대한 염원이 천문학과 비슷한 필연성을 가지고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의식이 이러한 관념의 보호를 받게 되자 그만 방심을 해버렸다. 그리하여 아차 하는 사이에 그들은 끝내 역사의 키를 놓쳐 버렸고 따라서 민첩성과 능률성도 잃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 삶은 어느 틈에 그들의 손에서부터 빠져 달아나 아직까지 순종하는 기색을 통 보이지 않은 채 자기 멋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가 계획이나 예정이나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마음을 써서 그것들을 준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해서 대중의 반역과는 언제나 상극을 이루는 소수파의 지배권이 떨어져 나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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