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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비평적이면서 예의 바른 문체인용 2025. 6. 20. 18:34
(…) 다른 각료들은 쇠약하여 보였고, 특히 이시영 선생은 노쇠한 기색이 확연했다. (…) 선생 등도 심히 노쇠해 보였다. 우리와 같은 혈기왕성한 한때가 반드시 저 어른들에게도 있었겠지만, 조국을 잃고 해외로 망명해 나와 어쩌면 저렇게 늙으셨는가.
이분들은 내일의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분들의 과거는 우리의 현재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한국의 국무회의실이로구나 생각하니 한심스럽기도 하고 또 비장하기도 하였다. 식당 겸 대회의실로 쓰이는 방은 그 건너편 방이었다. 층계를 더 올라서 좌우편에 있는 건물은 역시 단층이었고 내부구조도 단층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암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집을 지을 때 암벽을 깎아내고 그 자리에 지은 호텔용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충칭 시내에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외지만, 지겨운 망명생활을 흙방에 침대 하나씩을 놓고 계속하고 있는 늙은 요인들의 모습은 한심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임시정부라고 하기는 하지만, 두드러진 일반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형식상의 정부를 지키고 있는 이들의 기거처가 바로 이 임정이었다. 그러니 유별나게 사무실의 필요성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망명정부라 할지라도 하는 일이 늘 애국의 염려와 걱정이니 기가 찬 노릇이었다. 감방 같은 방 안의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생활의 반복이 하루 이틀도 아닌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니 자연히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원래가 그릇이 큰 분들이라 조금도 초조한 빛을 담지 않고 여유 있는 생활신념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이렇게 서너 시간씩이나 환영회 자리에서 울지 않을 수 없던 우리의 심정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들었던 실망과 기대에 어긋난 현실과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 자신에 대한 각오가 뒤섞여 큰 설움으로 뭉쳐진 것이었으리라.
그것은 나라 없는 슬픔이다.
ー 장준하,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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