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가려읽기) ‘오늘은 후지산에 오르겠습니다’
    인용 2025. 6. 19. 13:00

    ‘오늘은 후지산에 오르겠습니다’라는 대략적인 진행방향만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수업에서는 신발 등의 차림새를 걷기 편하도록 갖추는 이야기를 하거나, 주먹밥을 만드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거나, 안개 속을 헤매게 되었을 때의 적절한 대처 방법을 가르쳐 주거나, 산속에서 노숙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등 점점 주제가 바뀌어 가는 것이지요. 학생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듣는지 잘 모릅니다. 선생님이 자신들을 어디에 데리고 갈지 잘 모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후지산에 당도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럴 때 학생들의 센서의 감도는 가장 올라갑니다. 실은 후지산을 주제로 삼든 무엇을 주제로 삼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센서의 감도가 올라가서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미지의 생각이 밀려 들어오는 경험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됐으니까 잠자코 공부나 해!”라고 말해야만 하는 때가 정말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됐으니까 잠자코 공부나 해’라는 판정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지금의 현장 교사들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됐으니까 잠자코 있어라”라는 말이 물리적인 힘을 갖기 위해서는 ‘너는 네가 왜 공부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앎’에 관한 비대칭성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이 선생님은 내가 나에 관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실감하지 않으면 ‘됐으니까 잠자코 있어라’는 효과가 없습니다.

     

     

    의미와 유용성은 나중이 되어서야 실감하는 것

     

    근대까지 유아교육은 기본이 소독(素讀; 뜨덤뜨덤 읽는 것 – 인용), 다시말해 글의 뜻은 무시하고 음독하는 것이었지요. 사서오경을 암기시켰습니다. 메이지 초기 무렵까지는 교육이라고 하면 그러했습니다. 요시다 쇼인이 숙부인 다마키 분노신으로부터 소독을 배울 때의 일화가 시바 료타로가 쓴 소설에 나옵니다. 다마키 분노신은 밭일을 하면서 어린 요시다 쇼인을 논두렁길에 두고, 한 이랑 일구고 돌아올 때까지 정해 준 곳까지 암기해 두라는 식으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외우지 않으면 때리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혹독하게 가르쳤습니다.

     

    아이에게 사서오경을 뜻도 모르면서 읽게 하는 것은 학문적 유용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면, ‘아이는 이해할 수 없는 가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가르친 것입니다. ‘네가 한문을 배워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지만 너는 모른다’는 사제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앎’에 관한 비대칭성 그 자체를 주입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고전에 나오는 내용 같은 것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아이에게 “네가 갖고 있는 작은 지적 틀에 모든 것을 담으려고 하지 마라”고 때려 가면서까지 가르쳤던 것이지요. 말을 바꾸면 아이에게 ‘앎의 개방성’을 가르쳤던 것이지요. 그것만 알면 그다음에는 아이가 스스로 학습할 테니까요.

     

    쇼인은 11세 때 이미 번주에게 어전 강의를 할 정도까지 지적 성장을 이루었는데요, 학문을 시작하고 나서 불과 몇 년 사이에 그 정도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공부한 양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던 정보라도 통째로 받아들여서 자기 자신의 지적 틀을 바꿀 수 있는 놀랄 만한 지적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