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테크노 봉건제』와 중세 퇴행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5. 25. 15:53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테크노퓨달리즘』(북이십일) 서평을 써야 하였다. 사실 서평이라기보다도 인터넷 상에서 편집자, 작가 등과 이야기 나눈 것을 활자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이게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으므로 한 시간 정도 말했다.

     

    바루파키스는 2015년 그리스 정부가 재정위기를 맞았을 당시 장관으로 불려가 나라 살림 정상화에 진력했던 경제학자이다. 현장을 잘 알고 있으니만큼 그 분석에 설득력이 있었다.

     

    바루파키스가 주장하기를, 인터넷 상의 플랫폼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기업(애플, 구글, 아마존 따위)이 급기야 ‘자본주의를 벗어던지고 완전히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더이상 질 좋고 값싼 제품을 시장에 제공하여 경쟁사를 제치고 점유율을 높이는 재래식 비즈니스모델을 채용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고 하니 아무 경쟁 상대가 없는 ‘블루오션’에 올라타 단숨에 시장을 독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봉토’에 찾아든 사용자들로부터 ‘지대’를 징수한다.

     

    바루파키스는 이러한 경제체제를 ‘테크노 봉건제’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변이한 끝에 최종적으로 다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자본가가 무산자의 노동력에서 잉여가치를 착취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배자는 ‘클라우드 영주’라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봉토는 땅에 있는 게 아니라 구름 위에 있다.* 중세 봉건제 때와 같이 영주들은 사용자, 정확히는 ‘클라우드 농노’들한테서 ‘지대(렌트)’를 거둬들인다.

     

    (* 이 대목의 어감은 유명한 일본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이라든가 전미를 석권한 일본 가요 ‘희노애락은 저- 구름 위에’를 알아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 옮긴이)

     

    이 모델의 창시자는 스티브 잡스. 그는 아이폰을 통해 세계 최초로 ‘클라우드 영주’에 등극했다. 애플의 자산을 제3자 개발자들에게 무료로 공개해서 그들이 만든 앱을 ‘스토어’에서 판매한 것이다. 구글은 애플을 좇아 똑같은 방식으로 ‘봉토’를 양분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회사(노키아라든가 소니)는 ‘독자 스토어’를 갖겠다는 기획을 못한 나머지, ‘클라우드 영주’들이 수 억 이용자들 즉 ‘클라우드 농노’로부터 ‘디지털 소작료’를 거둬들이는 모습을 그저 옆에서 지켜보며 하드웨어 제품 사업을 이어나가는 ‘클라우드 봉신’ 신분에 만족해야 했다. 그 이래로,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은 휴대폰 화면이 켜져있을 때마다 ‘클라우드 영주’들에게 끊임없이 ‘클라우드 렌트’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 스마트폰 운영체제 iOS나 안드로이드는 사용자의 지리적 위치를 비롯한 온갖 사용행태를 의뭉스레 계속 수집한다고 알려져 있다 – 옮긴이)

     

    이윤을 대신해 지대로 하여금 경제활동을 굴러가게 하는 시스템은 더이상 자본주의가 아니며, ‘테크노 봉건제’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 거라고 바루파키스는 서술한다. 지당한 말일런지 모른다.

     

    분명히 도널드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가 자행하는 ‘임금님 흉내’를 보고 있자면 세상은 근대에서 중세로 퇴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기는 했다.

     

    이런 흐름 속에 어떻게든 끝장을 보려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메타포가 ‘빨간 알약’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알약을 의미한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매트릭스가 자아내는 꿈 속으로 돌아간다. 빨간약을 먹으면 냉엄한 현실에 눈뜨게 된다. 알약 하나로 적절한 현실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비유를 한번 따져보면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숙한다’는 발상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 알약 하나를 고른다고 한순간에 세상의 진상을 보는 눈이 개안한다는 개념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회심’에 가깝다.*

     

    (* 주요 인물인 사도 바울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 – 역주)

     

    동아시아적 개념으로는 전통적인 자기도야란 ‘수행을 통해 연속적으로 자기쇄신을 이루는 것’이지, ‘알약 하나로 딴사람’이 되는 발상과는 딴판이다. (원문 無縁である。- 옮긴이)

     

    그러고보니 신반동주의자들의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피터 틸의 『제로 투 원』도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0이냐 1이냐’ 하는 양자택일이지 ‘01 사이의 틈새’는 그 존재 자체를 용납치 않는다.

     

    파랑이냐 빨강이냐, 0이냐 1이냐 하는 딜레마를 들이미는 ‘이단 심문(원문 踏み絵 - 역주)’을 통해 인간을 두 종류로 유별하여, 다른 한 쪽을 ‘버리는’ 발상 가운데 나는 ‘클라우드 봉건제’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앓는 지적・윤리적 퇴폐의 낌새를 엿보는데, 지나친 기우일까.

     

    (야마가타 신문 319)

     

    (2025-05-02 14:4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커먼의 재생』 『무도적 사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뱀다리: 『제로 투 원』은, 표지와 출판사만 보고도 1초 만에 기분이 나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제 ‘나쁜 놈 감지 센서’가 작동한 것입니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셀 남성과 질투  (0) 2025.05.27
    신체의 외부화  (0) 2025.05.26
    세계가 제국으로 분할되는 날  (0) 2025.05.22
    미국의 몰락  (0) 2025.05.14
    트럼프와 연방주의자  (0)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