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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것인용 2025. 5. 21. 17:18
함께 있을 수 있다
쓰쿠이야마유리엔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우생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중증 장애인에게도 우리와 '똑같이' 마음이 있다", "중증 장애인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라고 다들 말한다. 거기에는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의사소통이 안 된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가 파고들 여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르다/같다', '할 수 없다/할 수 없는 것 같지만, 할 수 있다' 같은 이분법에 빠지지 않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것과 함께 '잠깐 사이'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고 범인을 포함한 우리의 편협한 인간관을 흔드는 것이다.
인류학자 구보 아키라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인간'이라는 것을 기계가 아닌 것으로서 조치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생물과 기계의 유비성을 철저하게 인정함으로써 기계와 인간을 둘러싼 기존의 파악하는 방법이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환기되는 것은 인간과 기계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서 파악한 후, 거기에서 벗어나는 인간적 영역을 근거로 하여 양자를 비교하는 외재적인 시점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재적인 시점을 단념한 후에 인간을 기계와의 유비성에서 파악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미리 예측도 제어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생성 변화해 가는 이치다.
(...) 구보는 말한다. 계산기 과학이 추진해온 "인간적 지성은 기계로 재현할 수 있다"는 발상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인간을 단조로운 것에 빠뜨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계와 같은 단조로운 것이 아닌 것으로서 포착할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장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본래 누구와도 의사소통 같은 것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상정하면서 그래도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범인의 마음속에, 혹은 꿈속에 그가 죽여버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범인에게 속죄의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마음은 장애인 일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죽인 사람에 대해서다. '마음이 없는 이'라고 단정하여 죽여버린 사람들과 그가 '대화'를 하는 것, 그 자신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것을 그 자신이 바라는 것,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난쟁이와 함께 있는 세계
(...)
오전 10시가 넘어서 나나 사치(사제)가 마라카스를 흔들고 나나 보아포(난쟁이의 장로)를 건물로 부른다. 세 번째 호출에서 펑! 하는 충격음과 함께 보아포가 건물에 도착한다. 천 저편에서 격렬한 마라카스 소리. 나나 사치는 한 손으로 천을 걷어 올려 안을 향해 흰 가루와 향수 스프레이를 뿌린다. 이윽고 천 너머를 들여다보듯 나나가 나를 재촉한다. 나는 천 끝에서 고개를 찔러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방 1미터 남짓한 공간 중간쯤에 줄무늬가 작은 바타카리가 벗어던져 있다. 천장에는 검은 각형의 나무가 매달려 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옥양목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나나에게 말하자 그는 제단 구덩이에 조롱박을 넣고 영수를 떠서 그것을 내 눈꺼풀에 발랐다. 천의 뒤를 다시 들여다보니 방구석에 줄무늬 바타카리를 입은, 키 70센티미터 정도 되는 이가 있다. 검은 장발(곱슬머리?)이 얼굴부터 발밑까지 덮은, 몸 전체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에에, 에피아, 오피아포!" 라고 말하는 나나 보아포의 목소리가 그쪽에서 들린다. 가능한 한 고개를 쭉 뻗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를 나나가 뒤로 젖히며 "봤냐?" 하고 묻는다. "봤지? 그는 거기에 있어."이시이는 가나에서 돌아와 난쟁이를 본 이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시이의 지인 중에도 난쟁이나 갓파 같은 것을 본 것을 망설이면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말하는 일상의 균열이 보인 경험은 그녀가 사제의 집에서 난쟁이를 보았을 때의 감각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 감각은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은 가나의 마을에 살 때의 나의 감각과는 조금 다르기도 하다. 마을의 생활 속에서 정령이나 난쟁이들은 이형자이면서 사교적이어서 망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었다. 이들의 존재는 밭일인 이웃 간 실랑이나 축구경기 같은 온갖 일에 연루돼 있었고, 생활의 세부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나나 사치의 속임수라고 생각하거나 내 감각을 의심했지만, 그 사이에 익숙해졌다. 정령과 난쟁이들은 삶의 미묘한 사정과 나누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그들만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잘라내어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을에 살면서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렇듯 난쟁이를 보고 말았을 때의 감각을 이시이는 사우디아라비아 태생 문화인류학자 탈랄 아사드(Talal Asad)의 말을 빌려 '제정신(sane)'이라고 표현한다. 제정신이 되려는 것은 스스로 그 자리에 나타난 세상을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본연의 자세를 실천적으로 조율해나가는 것이다. 난쟁이가 있는 세계를,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익숙한 가치관을 놓지 않고 머뭇거리다가도 인정할 일도 아니다.
ー 이노세 고헤이, 『야생의 실종』 6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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