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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내의를 벗어 빨았어
    인용 2025. 5. 11. 18:15

    이런 내용을 그냥 한 번에 듣고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좀 더 정리해서 기록으로 돌려 보며 연구 교재로 삼자는 동지들이 나타났다. 그냥 내버리기 아까우니 두고 오래 보기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따라서게 되었다.

     

    그러자면 인쇄나 등사 시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맨땅에 가마니를 깔고 기거하는 훈련반에서는 허황한 욕심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초지일관했다. 쓰자, 손으로. 각자가 자기 발표 내용을 써서 그 원고를 모아 책을 매면 돌려 보는 교양서가 될 수 있지 않느냐.

     

    처음 며칠 동안의 강좌분을 모아 책을 만들고 다음 것도 계속 모아 꿰어 매놓으면 결국 몇 권의 책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몇 날을 두고 토의한 끝에 이 책자는 책이라기보다 잡지의 형태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그 제호는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앞길을 밝힐 ‘등불’이라 정했고, ‘등불’로 정해지자마자 즉시 착수했다.

     

    이것은 그때 그 상황 속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업이었다. 적어도 보람을 얻고 쌓고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숭고한 사업이라고 우리는 자부하고 일했다.

     

    학교 당국에 말하여 작은 방 한 칸, 책상 하나를 마련하고 이를 도서실 겸 편집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김준엽 동지, 윤재현(尹在賢)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편집을 책임졌다. 잉크나 펜이나 종이라도 있다면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매일매일 뒤지할 종이도 없어 나뭇잎을 사용하는 그 판국에서 잡지를 꾸며낸다는 일은 정말 책임에 달린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붓으로 써야 했건만 선화지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국 학교 당국을 다시 설득하기로 했다.

     

    미사여구의 설득이 아니라 설득을 위한 설득으로 육박해 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선화지를 좀 얻었다.

     

    그리하여 우선 각자에게 강좌 내용을 원고로 작성시키고 시, 단편, 수필, 희곡, 만화까지 모집했다. 우리는 이 작품에 손을 보아 베끼는 한편, 체제며 배열순서 등을 진지하게 의논, 김준엽 동지의 그림 솜씨로 컷과 삽화를 넣어가면서 똑같은 잡지 두 권을 손으로 붓글씨로 써서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나와 잡지와의 최초의 인연이 되었다. 말하자면 효시인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출판업자나 잡지 발행인으로서의 그 출발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이상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의 것이다.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붓글씨 한 자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손에 힘을 넣었고 그 힘은 나의 신념에서 솟아 흘렀다.

     

    중국 린촨의 밤이 깊어도 그 칠흑의 밤보다 더 검은 먹을 갈아 붓글씨로 잡지를 베끼는 일로 밤잠을 밀어제치고 지새운 것이, 결코 그런 세상의 말을 듣게 되는 그 기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안다.

     

    적어도 그때의 나의 생각을 스스로 모독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또 용납될 수도 없다.

     

    『등불』은 진정 우리의 뜻대로, 등불로써 불을 밝히고, 앞장서 길을 밝히며, 꺼지지 않는 등으로 이 민족 누구에게나 손에 손에 들게 만들어주고 싶은 그때의 그 뜻을 스스로 짓밟고 싶지 않다. 그것은 가마니를 깔고 누워 받은 최초의 사명감이었다.

     

    물론 제본도 우리가 해야 했다. 특히 이 제본에 마음을 많이 쓰게 된 것은 모처럼 우리의 성심성의가 결정(結晶)되는 것이니만큼 외관상으로 예쁘고 아담스러워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지마는 그보다도 겨우 두 권의 잡지로 80명이 돌려가며 읽자니 웬만큼 단단히 매지 않으면 우리의 보람이 곧 찢어지거나 해져버릴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생각다 못해 표지로 천을 사용하기로 했지만, 종이조차 구하기 힘든 이때, 두터운 종이는 고사하고 천을 마련한다는 것은 정말 기발한 착상이 아니고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김준엽 동지는 하루낮, 하룻밤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벌떡 일어났다. 내의를 빨기로 했다고 한다. 비누도 없이 빨고 또 빨고 하여 깨끗이 헹군 다음 널어놓고 살며시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 내의로 책뚜껑을 만든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야?” 옆의 동지가 물었다.

     

    “내의를 벗어 빨았어.”

     

    “내의를? 여자도 아닌데 왜 하필 밤에 벗어 빨아.”

     

    “……응, 그저…….”

     

    나 혼자대로의 생각으로 나는 그 밤을 즐겁게 지새웠다.

     

    다음 날 우리는 김 동지의 내의를 잘라 종이와 겹겹으로 부해서 표지를 만들었다. 비록 짧은 무명 내의로 된 표지였으나 훌륭한 표지가 되었다. 의젓하고 고답적이었다.

     

    역시 김준엽 동지의 그림 솜씨로 램프를 그려놓고, 그 위에 ‘등불’이라는 제자(題字)를 써넣었다. 무릎을 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잡지는 잘되었고 우리는 만족스러웠다.

     

     

    ー 장준하, 『돌베개』, 13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