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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철학.. 하지 않을래요?인용 2025. 5. 10. 21:46

자신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
『닛케이(日経)신문』에서 전화가 와서 선약 없이 전화 취재를 당했다.
“어째서 젊은이들에게 일할 의욕이 사라지는 걸까요?”라는 물음….
그것은 그/그녀들이 ‘자신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라는 대답….
노동은 본래 ‘선물’이다. 이미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에 대한 반대급부의 책무 이행이다. 노동은 출발점부터 ‘타자를 위한(l’un pour l’autre)’ 것이다.
어째서 그런지 이제부터 찬찬히 이야기하겠다.
‘pour’라는 프랑스어의 전치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을 위하여’, ‘…을 대신하여’, ‘…을 향해’, ‘…에게’, ‘…한 점에 대해’, ‘…에 찬성하여’, ‘…로서’ 등등.
‘l’un’은 영어로 말하면 ‘the one’이고 ‘l’autre’는 ‘the other’다.
나는 l’autre를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보다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주체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보다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것’을 위하여/을 대신하여/에 대하여/의 보답으로/에 찬성하여, 비로소 존립하는 것”이 아마도 레비나스 스승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그것은 l’autre(타자)가 사실상 주체에 시간적으로 선행한다는 말은 아니다. 스승님은 ‘l’un pour l’autre는 기호작용(signification)’이라고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기호작용이란 ‘a는 b라는 뜻이다’라는 대리 표상의 관계를 가리킨다.
기호는 물자체는 아니다. 대리 표상이다. 기호는 ‘그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 자체는 아니’라는 것에 의해 기능한다.
기호는 ‘대리인’이다. 대리인은 본인은 아니다. ‘본인’이 실제로는 거기에 없다는 사실이 ‘대리인’의 존재 이유에 기초를 이루며, 동시에 그를 ‘대리인’으로 지명한 ‘본인’이 어딘가에 있다는 신빙성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 ‘대리인’에게는 ‘본인’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자신의 존재 근거이며, 한편 ‘본인’의 존재 근거는 ‘대리인’이 여기에 출두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나는 A씨의 대리인’이라고 자신을 밝힘으로써 ‘나’와 ‘A씨’는 동시에 근거를 지닌다.
그리고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것은 ‘나는 나다’와 ‘A씨는 존재한다’는 두 개의 명제를 각각 개별적으로 참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보다 간단하면서도 견실하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체는 타자의 ‘기호’다.
스승님이 ‘주체란 l’un pour l’autre’라고 썼을 때 전하고자 한 바가 바로 그것이다. 레비나스 스승님이 “타자는 주체와 결코 경계선을 공유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썼을 때, 사람들은 대개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존재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조금 더 쉬운 비유를 동원하면, 그것은 ‘코끼리’라는 기호와 ‘코끼리’ 자체의 관계와 비슷하다.
‘코끼리’라는 단어는 어떤 거대한 동물과 어느 한 지점에서도 겹치지 않는다. 둘 사이에 공유하는 경계선은 없다. 여기에는 어떠한 실체적인 관계도 없다. ‘기호인 코끼리’에게 ‘실체인 코끼리’는 이해도 공감도 단절되어 있다(‘기호인 코끼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기호로서의 사자’라든가 ‘기호로서의 멧돼지’ 같은 동류뿐이다). 그렇지만 ‘실체인 코끼리’가 선행(先行)하지 않으면 ‘기호인 코끼리’는 애당초 태어날 리 없다.
그렇다고 소쉬르가 가르쳐주었듯 ‘코끼리’라는 짐승이 시차적(示差的; 변별적)으로 분절되는 것은 ‘코끼리’라는 기호의 발생과 동시적이다.
기호가 없으면 개념도 없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도 그렇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구조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다. 타자가 주체의 출현을 요청하는데, 주체가 없으면 타자를 ‘타자’로서 표상할 수 없다. 이렇게 서로 근거를 짓는 관계는 에로스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관능은 타자의 관능에 의해서 활력을 얻는다.
“관능이 지향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관능이다. 관능이란 관능에 대한 관능, 타자의 사랑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우리는 에로스적 관계에 있어서 우로보로스의 뱀과 유사한 불가사의한 순환구조 속에 묶여 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능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각 상대의 관능이며, 상대의 관능을 소생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관능이기 때문이다.
관능의 측면에서 볼 때 주체의 근거는 사랑하는 사람 안에도, 사랑받는 사람 안에도 없다. 관능의 측면에서 나의 주체성에 근거를 부여해주는 것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적 상황이다.
“주체는 각자의 권능을 스스로 행사함으로써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성에서 자신의 자기동일성을 이끌어낸다.”(위의 책)
그런데 나는 지금 노동 이야기를 하고 있다.
노동에서도 노동 주체는 각자의 권능을 스스로 행사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때마다 이미 누군가가 이루어놓은 노동의 성과를 향유하고 있다는 수동성에서 자신의 자기동일성을 이끌어낸다.
노동에서도 (다른 모든 인간적 영위와 마찬가지로) 주체성은 l’un pour l’autre라는 형태로만 존립한다. 하지만 이 점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학생들은 구직 활동에 전력으로 질주한다. 어떻게 자신의 능력이나 적성을 채용하는 측에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몰두한다. 거기에는 ‘자신을 위해’라는 동기밖에 없다. (…)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매우 알기 어려운 이야기가 쓰여 있는데도 ‘이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읽고 싶다’는 욕망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커진다. 그것은 “이렇게 써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라고 요로 선생 본인이 보증하기 때문이다. (…) “나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고 요로 선생이 보증을 하면, 어렵다고 생각하며 읽던 사람도 안심을 한다. 그뿐 아니라 “요로 선생님도 나랑 똑같은 의견이잖아. 그렇구나. 그러면 내가 요로 선생님과 대화할 수준이란 건가? 그래?” 이렇게 유쾌한 마음으로 자기평가가 올라간다.
요로 선생의 책을 읽으면 ‘똑똑해진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문장 자체가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는 이상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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