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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일본형 코뮌주의의 옹호와 현창・곤도 세이쿄 - 그 인물과 사상』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5. 8. 17:09
『월간 닛폰』 출판부에서 이르기를, 곤도 세이쿄의 『군민 공치론』 복간에 즈음하여, 이 책의 ‘해설’을 써달라 하는 ‘유별난’ 기획을 들고 왔다. ‘유별나다’고 여겼던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왜 이제 와서 곤도 세이쿄를 복간하는가?’ 하는 것과, ‘왜 필자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가?’ 하는 점이었다.
후자의 이유는 대충 알 듯했다. 연재 담당인 스기하라 편집자가 필자의 서재로 찾아올 일이 몇번 있었는데, 그때 서가에 곤도 세이쿄나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나 기타 잇키, 그리고 오카와 슈메이의 저서나 연구서가 꽂혀 있는 것을 보고서, 아마 필자가 우익 사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게다. 그 추리는 옳다.
필자는 이제까지 일본의 우익사상에 대해 이렇다 할 책을 써본 적이 없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필자의 흥미가 거기에 있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서재에 와본 사람은 책등만 보고서도 관심 영역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훤히 안다.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사상가들의 도서는 필자의 서가에서 가장 가까이, 손이 곧장 닿는 곳에 비치되어 있다 (필자의 원래 전공인 프랑스 문학이나 철학이 훨씬 깊숙이 밀려나 있다).
이러한 비치는 아마도 무의식적일 것이다. 어째서 그런 책들을 필자는 잘 간수해 왔을까? 그 이유는, 어쩌면 이 사상가와 활동가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고 오래오래 스스로가 다짐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잊게 된다면, 필자는 반드시 “일본적 정황에 의해 일을 아주 그르칠” 터이다. 이 점에 대해 깊은 확신이 있었다.
오늘날의 견지에서 곤도 세이쿄 사상을 조명하기 위하여, 상당히 멀게 돌아가기는 하겠으나, 우선 이야기를 하나 좀 하고자 한다.
필자는 전공투 운동 세대에 속한다. 십대의 끝자락 무렵이었으니만큼, 그 시대를 사로잡았던 열광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고, 당대에 이미 그 정치운동이 지금껏 몇 번이나 부활하였던 낡은 정치사상에서 기원한, 일종의 ‘격세유전’임을 알아챘다.
1968년 미군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의 사세보 기지 입항 때, 우리는 처음으로 ‘삼파계 전학련’이라는 사람들의 조직적인 투쟁 영상을 접할 수 있었다. 기항 저지 투쟁에 결집했던 학생들은, 당파명을 크게 적어넣은 헬멧을 쓰고, ‘게바 봉(Gewalt; 무력 투쟁 - 역주)’이라고 불린 6척 되는 봉을 손에 들며, 붉거니 검거니* 하는 거대한 자치회 깃발을 내세웠다. 그리고, 세계 최대급 미국 항공 모함에 맞서, 거의 맨주먹으로 ‘무력 추방’을 이루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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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색은 일본의 특색으로 일컬어진다 – 옮긴이)
필자는 그 영상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봤을 때 정말 놀랐다. 그때의 떨림과 감동이 필자는 아직도 기억난다. 헬멧은 ‘투구’이고, 게바 봉은 ‘창’이며, 자치회 깃발은 ‘하타사시모노’로 비쳤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그러한 비주얼을 선택한 이유는 물론 무의식적이었다. 허나, 그것은 ‘매튜 페리의 흑선 내항’ 소식을 접하고서 우라가로 뛰쳐나온 사무라이들의 모습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창조한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상황 아래 생각할 법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친숙하고, 소여된, 과거로부터 전해져 온 상황 아래에서 그리 하는 것이다. 죽어서 사라진 모든 세대의 전통이, 산 자들의 뇌수를 악몽과도 같이 짓누르는 것이다. 그리고 산자들은, 당면한 자기 자신의 사태를 변혁함과 동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 전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 정녕 그러한 혁명적 위기와 같은 시기에, 있는 힘껏 과거의 망령들을 호출해 도움을 청하며, 그 이름, 싸움의 표어, 의상을 빌리고, 그러한 유서 깊은 분장, 그러한 차용 언어로 새로운 세계사의 장면을 수행해내는 것이다.” (지쿠마 쇼보, 2005년, 4쪽)
이 문장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인했을 터인 ‘삼파계 전학련’ 소속 활동가들은 아마도 몇 번이나 마주쳤을 것이다. 여러 차례 읽고, 독서회에서는 토씨 하나까지 그 말뜻을 가지고서 엄청난 의논을 나눴을 것임에도,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정말로 “과거의 망령들을 호출해 도움을 청하며, 그 이름, 싸움의 표어, 의상을 빌리”면서 “새로운 세계사의 장면”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설마 자기들이 ‘115년 후에 등장한 요시다 쇼인의 아바타’를 연기하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정말이지 “과거의 망령들을 호출해 도움을 청하”였기 때문에야말로, 그들의 운동은 그로부터 3년간에 걸쳐, 일본 열도를 혼란 가운데 몰아넣기에 충분한 정치적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리라 필자는 생각을 한다.
이듬해, 미시마 유키오는 도쿄대 전공투의 초청으로, 고마바 캠퍼스 900번 강의실에 모습을 나타내, 천 명의 학생들을 앞에 두고, 전공투 운동과 미시마 개인적인 정치적 테러리즘의 ‘친화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미시마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건 여기서 처음 밝히는 건데, 이를테면 야스다 강당에서 전학련 소속 제군이 농성했을 적에, 천황이라는 말을 딱 한마디만 그네들이 했다면, 나는 기꺼이 함께 투쟁했을 걸세. (웃음) 농담처럼 들리는가? 늘상 하고 다니는 말이거든. 왜 그러냐면, 종전(終戰) 이전 시기의 천황 친정(親政)이란 것하고, 작금의 직접민주주의란 것에는 정치적 개념 상의 구별이 거의 없기 때문이야. 민주주의라는 게 너무나 공허한 정치개념이기는 하지만, 천황제와는 하나 공통요소가 있어. 그 공통 요소란 게 뭐냐면, 국민의 의사가 중간적인 권력 구조라는 매개물을 거치지 않고서 국가 의사와 직결한다는 점을 꿈꾼다는 걸세. 이 꿈은 한 번도 실현되지 못했기에, 전쟁 전에 일어났던 쿠데타는 모두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네. 그렇기는 하나, 그때는 천황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어. 이 말이 오늘날 쓰이지 않는 이유는, 그걸 갖다 대도 소용이 없다며 제군이 안중에 안 두고 있는 것일 뿐이거든. 만약 이 개념을 도입할 수만 있다면, 일본의 저변 민중에 어떤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제군들이 정녕 마음속 깊이 생각을 해 보면, 서로 딱 들어맞히지 않고서는 못 배길 거라고 나는 믿고 있네.” (『토론-미시마 유키오vs.전공투』, 64~5쪽, 강조는 우치다)
여기서 미시마는 일본의 근대 정치사에 있어서 마땅히 혁명의 단초가 될 ‘키워드’가 무엇인가를 실로 정확히 알아맞춰냈다. 그것은 “국민의 의사가 중간적인 권력 구조라는 매개물을 거치지 않고서 국가 의사와 직결”한다는 공상이다. 막부 말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모든 혁명적인 사상은, 중간적인 권력구조라는 매개물을 거치는 일 없이, 국민의 의사와 국가의사가 직결하는 ‘일군 만민’의 정체를 꿈꿔왔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메이지 유신이 있고 난 뒤, 아직 신정부가 앞으로 어떤 통치형태를 취할지 명확한 의사를 제시할 수 없었던 시점에서, 마땅한 일본의 모습을 선구적으로 실현했던 단기적인 정치 형태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하시카와 분조가 전하고 있다. 이름하여 ‘오키노시마 코뮌’이다.
게이오 4년 3월, 오키노시마 도민 약 삼천 명이 무력으로 마쓰에 번 군수를 쫓아내고, 이제부터는 “중간적인 권력구조의 매개물을 거치지 않고”서, 도민과 천황이 직접 이어지는 정체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오키는 본래 도쿠가와 씨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이후 마쓰에 번의 관할이 되었다. 도민들은 이 ‘매개물’에 의해 ‘황공하게도 천황의 은택을 받들 줄을 모르고서’ 지내왔던 점에 깊은 수치를 느낀다는 미토학적 멘털리티를 막부 말기에 이미 심층적으로 내면화했다. 이리하여 ‘선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황송하옵게도 선조 이래 부모 처자에 이르기까지 기르시고, 한결같이 세월을 보내게 하며, 때에 따라 오곡백과 풍성히 고복환락에 이르기까지, 망극한 은혜를 입게 된 차에, 제 몸의 신명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천황의 소유이거늘, 터럭 하나까지 제 것이 아닐진대, 이러한 전차로 제 몸의 비천함을 다시금 깨달아, 신명을 바쳐 진력할 일이며, 황국의 백성 된 명분을 다하지 않고서 어찌 배길쏘랴.” (하시카와 분조, 『내셔널리즘-그 신화와 논리』, 2015, pp. 142)
이때 오키노시마 도민들은 “막번 권력에서 내려보낸 기관을 추방하고, 직접적으로 천황이 「애민」하실 것을 선언” 한 것이다.
“그들은, 천황의 마음에 직접 연계되는 평등한 인간의 조직체임을 스스로 깨달았으며, 그 중간에 개재하는 중간적 권력을 부정함으로써 자치적인 정치공동체를 수립하게 되었다.” (같은 책, 145쪽)
하시카와는 이 자치공동체 시도를 이렇게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몽상을 서술한다.
“이를테면, 오키노시마 코뮌과 비슷한 부류가 전국 각지에 대략 100개 정도 속속 출현하여, 중간적 권력 기구가 배제된, 전국적으로 제각기 느슨한 코뮌 연합이 만들어지고 나면, 일본이라는 국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같은 책, 146쪽)
유감스럽게도 천황과 도민이 ‘직결’할 것을 꿈꿨던 이러한 ‘오키노시마 코뮌’은 마쓰에 번에 의해 즉각 진압당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일본적인 정치 유토피아 모델이 ‘국민과 천황이 무매개적으로 맺어지는 통치 시스템’, 와타나베 교지가 ‘일본적 코뮌주의’라고 명명한 종류의 것이라는 확신은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2・26 사건까지, 반권력적인 투쟁은 오랫동안 ‘유사(有司) 전제를 철폐함’, ‘군측의 간(奸)을 배제함’ 이라는 정형구 아래 행해졌다. 그 이유는 이러한 ‘정형’만이 민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해발시킨다는 점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도쿄대 전공투 담판에서 한 발언을 그 시점에서는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천황이라는 한 마디만 했다면”, 극우인 미시마와 극좌인 과격파 학생들이 연대투쟁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이로가 열여덟 살이었던 필자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일본에서 일어날 정치혁명에 대한 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미시마의 말을 필자에게 부여된 일종의 ‘숙제’로써 떠안기로 했다.
필자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이른바 전향론에 큰 영향을 받았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공산당 지도자였던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당한 뒤, 일본의 ‘국체’, 국민 사상, 불교 사상에 관한 서적을 읽고서, 그 심원함에 ‘대경실색’하여 전향하였다. 요시모토는 이러한 전향이 주로 내발적인 동기에 기인한 것이며, 그들을 전향에 이르게 한 것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 (감)’이라고 진단했다.
요시모토가 천착했던 부분은, 전향했던 지식인이 애초에 일본 사상이나 불교사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견해 없이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를 자처했는가’ 하는, “소박한 의문”이었다.
“이렇듯 소박한 의문은 사소하기는 하지만, 사노라든가 나베야마가, 우리 후학 인텔리겐치아 (이를테면 외국 문학 전공자) 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수준에서, 서양의 정치사상이나 지식에 뛰어듦에 따라, 일본적 소(小)정황을 무시하고, 모더니즘 흉내나 내는 시골 인텔리겐치아에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보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승형 인텔리겐치아의 의식은, 후발 사회 특유의 것이다. 사노와 나베야마의 전향이란 이런 시골 인텔리가 겨우겨우 봉건제로부터 벗어나, 고립무원에 처했을 적에, 애써 무시하려던, 이탈했다고 여겼던 일본적인 소(小)정황에 다시금 발목을 잡힌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1969년, pp. 10)
“이런 부류의 상승형 인텔리겐치아가 저평가하곤 했던 일본적 정황이(이를테면 천황제를, 가족 제도를),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모습으로 눈앞에 드러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일찌기 이탈했다고 믿었던 그 합리적이지 못한 현실과, 말하자면 본격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 단 한 번도 맞붙어본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같은 책, 17쪽, 강조는 우치다)
이렇게 신랄한 ‘인텔리’ 비판을 필자는 다름아닌 필자 자신이 새겨들을 말로 읽었다. 당시에는 아직 대학생이었으므로 ‘인텔리’라는 획정된 수준에는 달하지 못했을 따름이지만, 스스로 언젠가는 ‘상승형 인텔리겐치아’의 일원이 될 것임은 알았다. 따라서, 이 비판을 ‘나의 몫’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본적 정황에 다시금 발목을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렇듯 “불합리한 현실”을 “본격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개인적 책무로 할 수밖에 없으리라 봤다.
하지만, 이런 “합리적이지 못한” 정치 개념을 종횡으로 논하는 사상가・정치가들(곤도 세이쿄는 그중 한 명이다)의 저서를 실제로 읽게 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때까지는 “일본적 정황에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한 예비적인 자기훈련을 위해 시간을 들였다.
우선 무도 수행부터 시작했다. 이십 대부터 아이키도 수련을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이아이나 조주쓰, 검술 수련도 하게 되었다. 지천명에 가까워서는 이에 더해 노가쿠 연습을 시작했으며, 환갑을 넘어서부터는 미소기하라이 의식과 폭포수행을 닦았다. 일본적인 ‘유서 깊은 전통 의상’을 차근차근 입어 보았던 것이다. 지금은 매일 아침 도장에서 축사와 반야심경을 외고, 부동명왕의 진언으로 도장을 정화시키며, 쿠지 수신호를 긋고, 미소기하라이 호흡법을 행하는 임무를 하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하지 못할 정도의 신체가 되었다. 멀리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만 ‘어느날 갑자기 책을 읽는 것’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가 그렇게 말이 안 되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히 말과 글 측면에서부터 들이대는 건 가장 좋지 않다. 오독할 가능성이 있거니와, 뭐니 뭐니 해도 신체가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책을 읽게 되면,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리스크가 있다.
요시모토는 사노 나베야마 등이 불교 서적 하나 변변히 안 읽고서 지식인이 되겠다며 나섰던 것을 조롱했지만, 이는 아무래도 부당한 처사라고 본다. 그들도 어엿한 인텔리였다. 책을 허투루 읽지 않았다. 그래도, 읽기는 했지만, ‘팟 하는’ 느낌이 안 왔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해했지만, 몸에 스며들지를 못했다. 그리고, 훨씬 나중이 되어서야,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에 몸서리친 뒤, ‘대중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절실히 알고 싶어진 때 비로소 한 번 그런 책들을 집어서 보니, 거기에 쓰여져 있던 것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런 수순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합리적이지 못한” 사상 그리고 감정과 “본격적으로 맞붙기” 위해서는, 일단 책을 읽기보다, 그러한 사정이나 언어가 ‘납득이 되는(원문 腑に落ちる: 체증이 쑥 내려갈 정도의 - 역주)’ 신체라든가 감정에 익숙해지는 방식이 비록 멀리 돌아갈지언정 확실할 거라고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다. 여기서 뭔가 논리를 구사하려는 건 아니다. 그렇게 직감했을 따름이다. 우선 신체를 가다듬고, 깊은 감정을 채비한다. 책을 드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조만간 어느날, 그러한 서적들에 문득 ‘손이 가는’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 정작 책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헛것이 되므로, 우선 책을 입수하는 족족 가져다놓는다. 그리고, 손이 곧장 닿는 범위 내에 꽂아둔다. 그리하여, 반세기 가까이 시간이 지난 뒤, 어느날 ‘곤도 세이쿄에 대해 글을 좀 써주십시오’ 하고 제안을 하러 오는 것이다. 아이고, 올 것이 왔구나, 그렇게 해설에 나서려고 이제야 붓을 쥐기로 했다.
이상이, 어째서 필자가 해설을 쓰기로 했는가에 관한 경위이다. 이렇게까지 써 놓고 보면, ‘왜 곤도 세이쿄가 복간되는가’ 하는 맨 첫번째 의문에도 얼마간은 답변이 되었지 않나 싶다. 하지만 결론을 서두를 것은 없다. 지면이 넉넉히 있으므로 ‘어째서 이 마당에 곤도 세이쿄가 꼭 읽혀야만 하는가’에 대해 독자의 속이 아주 시원해지도록 여유롭게 써나갈 작정이다.
이 책의 구성은 이렇다. 당초 계획은 우선 곤도 세이쿄에 관한 전기적 사실을 기술한 뒤 그의 사상을 한켠에 쓰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써보니 전기적 사실이나 교우관계는 그의 사상과 분리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러한 연고로 요 아래서부터는 전기적 사실을 써나가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거기서 세이쿄가 겪었던 사건의 역사적 의의와 문맥에 관해 설명하고자 할 때마다 샛길로 빠지기도 하면서 쓰기로 했다. 학술논문 서술방식이었다면 아예 안될 것이지만, 본 해설은 ‘어째서 지금 곤도 세이쿄를 읽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는 한정적인 목적을 위한 문장이므로, 독자는 이러한 파격의 연유를 그리 알아주시기 바란다.
더욱이, 전기적 사실에 관해서는 그 거개를 다키자와 마코토 씨의 『쇼와 유신 운동의 사상적 원류: 곤도 세이쿄의 인물과 사상』 (펠리컨 사, 1996년) 에서 추렸다. 이 책이 현재까지 쓰여진 곤도 세이쿄 전기로서는 가장 신뢰성이 높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연대 표기법은 연호를 주로 하되, 소괄호 안에 서기 연도를 넣기로 했다. ‘메이지’ 유신, ‘다이쇼’ 데모크라시, ‘쇼와’ 유신 등의 역사적 사건을 다룸에, 연호가 바뀌면 그에 맞춰 세상 물정과 인정도 또한 변한다는 환상 아래 당대 사람들의 시간 의식이 농밀하게 스며들기 마련이라서 그렇다. (2024년 7월 30일)
(2025-04-15 09:1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커먼의 재생』 『무도적 사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뱀다리: 역문은 ‘환구단’에서 탈고했습니다. 왠지 그러고 싶었습니다.
(※ 근자에 박선생님에 의한 역서가 출간되면, 꼭 한번 다시 대조하며 살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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