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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현상과 위기에 대해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5. 1. 10:41

    『건설 노동의 광장』이라는 이채로운 매체로부터 기고를 의뢰받았다. 자그마치 12,000자를 쓰려고 보니, 글이 여기저기 샛길로 빠지곤 해서 전반적으로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다 보면 이럴 때도 있으니 너그러이 보아주기 바란다.

     

     

    기고 의뢰의 취지는 ‘열화하는 민주주의, 커지는 격차, 극단으로 치닫는 「자기중심주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 정세 등, 자국민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적인 일본의 현상과 그 요인에 관하여, 동시에 (아주 조금이라도) 희망에 대해 한말씀 해 달라’는 사연이었다.

     

    엇비슷한 주제에 관한 문의를 자주 받는다. 따라서, 그 대답도 항상 대체로 비슷하다. 그러므로 아래의 문장을 읽으신 분이 ‘이거, 예전에 어디서 읽었던 적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를 ‘중복 투고’라고 비난해 보았자 소용 없다. ‘현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하고 물어볼 때마다 새로운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별다를 것 없는 얘기라는 거다.

     

     

    오래 살다 보니 알게 된 하나는, 역사는 올곧은 한길을 가는 게 아니라, ‘더치 롤’로 진행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비교적 지성적이고 인정 많은 시대도 있거니와, 반지성주의자가 제 세상인 양 발호하는 시대도 있다.

     

    필자가 아는 한,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가 끝날 무렵까지는, 일본 사회가 적잖이 ‘점잖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계 제 2차대전을 겪은 전중파 사람들이 사회의 중추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중파 사람들은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얼마나 국민을 기만하는 존재인가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취약하고 믿을 수 없는 ‘국가’라는 짜임새가 아니고서는 살아갈 곳이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상황에 따라 얼마나 비도하고 잔학한 존재가 되는지도 목도했고, 반대로 인간이 때로는 얼마나 용감하고 도의적인지도 보아왔다.

     

    세상은 복잡하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인간에게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그런 존재다’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다. 이렇듯 거의 초연함에 가까우리만치 ‘산전수전 다 겪어본 경륜’이란 응양함(鷹揚; 도량이 넓음 - 역주)을 전중파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지녔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두터움이나 깊이가 있다고 말해도 되겠거니와, ‘어두운 면’이라든지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러한 사람들은 인간의 우둔과 경박함에 상당히 관대했다. ‘인간에게 아무리 기대한들 별도리가 없다’며 포기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데, 그것은 우리 자식들 입장에서 고마운 환경이었다. 어른들은 폐허 가운데서 사회를 재건하느라 분주했으며, 신생아의 숫자도 많았으니만큼, 자녀들은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렴’ 하고 방치되었다.

     

    그 시절 일본이 비교적 ‘어엿했던’ 이유는 나름의 ‘유연함’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이 시대에 경이적인 기세로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단기간에 세계적으로 버금가는 경제 대국이 되었으며, 80년대가 꺾일 무렵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일등 경제 대국에 거의 다다랐다. 1985년 이른바 ‘플라자 합의’로 그 꿈은 깨졌지만, 윗선에 있던 사람들이 세세한 것들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젊은이를 저 좋을 대로 내버려둔 시대에 경제 활동은 활발해진다는 사실은, 결국 어찌 됐든 필자 세대에 소여된 현실이었다. 이러한 필자의 확신은 이후에도 흔들린 적 없었다.

     

    이 시기는 정치적 활동도 너무나 활발했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쳐, 전국 대다수의 대학은 교육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무법 상태의 대학에서 학생들은 여기서도 역시 ‘하이고, 너희 볼 일 봐라’ 하고 방치당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이 시기에 학부생과 대학원생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나중에 세계적인 수준의 업적을 올린 연구자가 적잖이 배출되었다.

     

    70년대에 일본인의 40% 이상이 사회당・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정치가가 수장인 혁신 지자체에 거주했다. 자민당 정권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 일본 열도에 펼쳐져 있었으므로, 정부 입장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시대였을 터이나, 이 시기에 경제성장률은 매년 10% (!) 를 상회했다. 놀라운 일이다. 온 일본 곳곳에서 데모와 파업이 행해졌던 시기에, 적어도 전후에는 가장 경제활동이 활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정치의 계절’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고등교육기관이 심각한 통제 아래에 놓임에 따라, 학술적 산출물이 차츰 가물어가고, ‘내부적 통제’가 극에 달해, 모든 교육 연구 활동이 중추적으로 관리되는 시스템이 되었을 때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다), 학술적 산출물은 질과 양 할 것 없이 전후 최저 수준이 되었다. 경제성장도 완전히 멈췄다.

     

    경제성장에는 다양한 요소가 관여되기에 쉬이 말할 수는 없으나, 관리와 창조가 제로섬 관계라는 점은 적어도 전후 일본의 사례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사회가 중추적으로 관리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대에 인간은 그 퍼포먼스를 최대화하고, 그와는 반대로 철저한 관리가 행해지면서 개인의 가동역(可動域)이 제한됨에 따라 창의는 소실되고, 생산성은 저하되었다. 관리와 창조는 서로 상충되는 관계다. 이는 1950년생인 필자가 경험적으로 확언할 수 있다.

     

    이 정도 얘기는 오래 살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누구든지 말할 수 있다. 특별히 현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래 살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20, 30년 정도 되는 짧은 ‘타임 스팬’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만을 볼라치면, ‘관리와 창조가 제로섬 관계에 있다’는 점을 알 수가 없다. 논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실제 감각으로는 알 수 없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 제도 설계를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40~50대 사람들은 일본 사회가 아나키하고 와일드하며 응양한, 바로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창조적이었던 시대를 알지 못한다. 직접 본 적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각인 당해온 바 ‘관리를 철저히 하면 조직은 효율적으로 기능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도통 의문을 품을 줄 모른다. 안타깝다.

     

    조직 매니지먼트 원리주의’라는 개념은 필자가 젊은 시절 존재하지 않았다. 톱다운 조직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전후 기업 경영자 가운데 거의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톱다운 조직의 최고봉은 군대였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것이었는지를 그들은 패전을 통해 여실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상위자의 명령이 아무리 부조리하더라도, 그것을 순순히 따르는 예스맨일 것이 가장 중요한 노동자의 자질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꺼내면 ‘여기가 군대인 줄 아느냐’ 라며 나무랐다.

     

    그 시대에 경영자의 ‘모범’으로 일컬어졌던 인물로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이부카 마사루, 혼다 소이치로 등이 있었다. 그들은 사원들이 어떻게 하면 그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오버 어치브먼트’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이를 위한 근로 환경 정비에 전적인 지혜를 짜내었다. 소규모 공장에서 단기간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던 이들 경영자들은, 조직 매니지먼트라든가, 사원 대상의 정밀한 근무고과 같은 것들에는 부차적인 관심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위자의 명령에 잠자코 따르는 예스맨일 것이 최우선적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부터이다. 90년대 후반부터 가치 창조보다 조직 관리를 우선시하는 조직 매니지먼트 원리주의자들이 등장함으로써, 온갖 조직을 통할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기업 경영자들은 사원들의 잠재 가능성을 꽃피우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들의 노동력으로부터 얼마나 잉여 가치를 착취해 낼지에만 흥미가 있다. 그리고, 좀 답답한 일이지만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점에 특단의 불만을 품지는 않는다. 업계에서 성공하려거든 으레 다들 그런 거라고 여긴다. 에고이스트가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에게는 성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굴욕감을 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건대, 참으로 안타까운 얘기다.

     

    조직 매니지먼트 원리주의’라는 어휘를 아까부터 계속 쓰고 있는데, 익숙지 않은 단어일 것이다. 필자의 조어이므로, 여러분이 모르시는 것도 당연하다. 조직이 ‘무엇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하는가’에는 부차적인 관심밖에 없고, 그 조직이 ‘어떻게 중추적으로 관리되고 있는가’에 주된 관심을 두는 사고방식이다. 1990년대 말엽부터 이런 개념이 일본 사회에 지속적으로 침투하여 끝내, 2010년대에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필자가 기억하는 한, 조직 매니지먼트 원리주의가 일본 사회에 ‘자이언트 스텝’을 새긴 결정적인 날은 공립 학교의 교직원에게 ‘기미가요’를 기립 제창할 의무를 부여한 전국 최초의 조례안이 오사카부 의회에서 성립되었던 2011년이다.

     

    이 조례안은 하시모토 도오루 지사가 이끌었던 ‘오사카 유신회’가 제출했다. 오사카부 관내에 있는 공립 학교에서의 행사에서 기미가요를 제창할 때, ‘교직원은 일어서서 함께 부르도록 한다’ 못 박아둔 것이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전국 교육 위원회는 학교 현장에서 국기 및 국가법과 학습지도요령 등을 근거로, ‘기미가요’ 제창 시에 기립 제창할 것을 지시했으며, 기립을 거부한 교직원을 처분해 왔다. 하지만, 유신회의 정책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때까지 국가 제창을 지시함에 있어서 ‘애국심의 고양’이라는 자치 목적을 명백히 첫째 가는 의의로 두었음에 대해, 이 조례는 ‘공무원의 규율 엄격화’를 중점적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기립제창을 거부한 교원에 대한 처분이 실제로 일어난 당시 기자회견에서, 하시모토 지사는 이것이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언론의 자유 문제도 아니고, 양심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순수히 여느 기업에서 그러는 것처럼 취업 규칙 위반에 관한 문제이다, 교장의 업무명령을 위반한 사실에 따라 당해 교원을 처벌한다는 논리였다. 정치 문제가 아니라, 조직 매니지먼트의 문제이다. 그렇게 언명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때의 기자회견 영상을 티브이 뉴스로 보았는데 ‘국가 제창을 거부한 교원의 처벌은 조직 매니지먼트의 문제이다’ 하는 주장에, 기자들이 단 한 명도 반론하지 않았던 데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어이, 너희들은 <조직 매니지먼트의 문제다>라는 말을 듣고서도, 누구 하나 반론할 수 없는 거냐’ 하고 생각한 것이다. 조직 매니지먼트라는 도대체 무슨 소리냐. 그보다는 국가와 국기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해 시민 한 명 한 명이 숙려할 기회를 보증하는 게 국민국가로서 한층 더 중요하지 않느냐, 하는 반발이 들었다.

     

    국민국가라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의제(疑題)*이다. 17세기에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탄생한 비교적 새로운 정치단위이다. ‘국경’선으로 획정된 ‘국토’ 안에 인종, 언어, 종교, 생활문화에 있어서 동질성 높은 ‘국민’(nation)이 집주하여, 국가(state)를 형성하는 모델이다. 그 이전의 기본적 정치 단위는 다인종, 다언어, 다종교가 혼재하는 ‘제국 모델’이었다. 제국이 해체되기에 이른 것은, 종교전쟁이 너무나 큰 재난과 화를 초래했으므로, ‘동일 종교를 가진 사람들만 모여서 나라를 만들고, 이웃 사라 사람이 어떤 종교를 믿든지 신경 쓰지 말기로 하자’ 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른바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던 것이 세계 표준 정치 단위가 된 계기는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 본질은 다른 것인데 같은 것처럼 꾸미는 일 - 역주)

     

    이때 프랑스군은 의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의 대의를 유럽 전역에 선포하기 위해 나서서 총을 들었다. 그때까지 절대다수의 전쟁은 왕후와 귀족이 영토라든가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용병을 고용해 행하던 것이었다. 전투 프로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켠에서는 농민들이 토지를 경작하고, 상인은 장사를 하고 있었다. 전쟁은 전쟁이고 생활은 생활이라는 구분선이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군은 달랐다. 그들은 용병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들의 전투를 경제인, 언론인, 교사, 예술가, 후방의 가족들 모두가 온 힘을 다해 응원했다. 총력전이라는 개념 이때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군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했다. 전선에서 부상당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은 프랑스군 장교가 그대로 말을 타고 전선을 달려 복귀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런 열성적인 싸움을 용병은 수행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소모율이 30%에 달하면 조직적 전투가 불가능하게 되므로, 백기를 들고서 항복하는 게 예로부터 당연했는데, 나폴레옹의 군대는 달랐다. 근위병 니콜라 쇼뱅이라는 병사가 있었다. 적군에 둘러싸여 중과부적에 처해 백기를 들어야 할 처지가 되자, ‘나폴레옹 군대의 병사에게 항복이라는 선택지는 없다’고 말하며, 말 한 필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으며, 이에 전군이 뒤따랐다 (고는 하나, 후세의 창작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광신적 애국주의(쇼비니즘 chauvinism)’라는 정치 개념의 어원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그런 ‘돌출 행동’을 하는 병사가 없었다는 말이다.

     

    베스트팔렌 조약 당시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발명되었던 국민국가는,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러서 ‘전쟁에 이기는’ 장치로써 이상하리만치 고성능을 발휘했다. 국민국가는 전쟁에 강하다.’ 이것은 나폴레옹에게 유린당한 유럽 전역의 생생한 감각이었다. 이렇게 19세기 전 유럽은 국민국가로 재편되었다. 국민국가가 아니고서는 총력전으로 싸울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모두 거의 같은 시기에 그때까지는 여러 왕국이나 번으로 분단되었던 영역이 단일한 국민국가로서 성립하기에 이르렀으며, 한마디로 ‘국민국가가 아니고서는 다른 나라에 침략당한다’고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미토학파 사람들이 에도막부 말기에 남겼던 논고(이를테면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의 『신론新論』)를 살펴보면 당대의 초조함과 불안감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다.

     

    국민국가란 그러한 역사적 조건 아래서 형성된 정치단위이다. 따라서, 역사적 조건에 변동이 생기면 변질이 일어난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지각변동적 이행기에 적절한 모니터링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국력은 쇠미해지고, 더 나쁘게는 망하게 된다.

     

    따라서, 국민국가란 무엇인가. 국민국가를 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시민은 국민국가에 무엇을 요구할 것이며, 또한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대한 숙려는 국민국가에 속한 모든 이의 의무이며, 권리인 셈이다. ‘까불지 말고 국기에 경례하라, 국가를 제창하라. 업무명령에 불과하니 따르라’ 하는 것은, 국민에다 대고서 ‘국민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을 그만 두라는 얘기와 같다. 시민적 성숙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일이다. 그런 흉계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국민의 신성한 권리와 의무를 업무명령과 그에 대한 낙부(諾否) 차원의 문제로 왜소화시키는 것을, 필자는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당시에, 필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일본 사회에 거의 없었다 (지금도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그때 ‘언젠가는 반드시 조직 매니지먼트 원리주의가 일본을 망하게 하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사태는 진행되고 있다.

     

    됐으니까 잔말 말고 윗선의 말을 들어라. 명령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권리는 부하에게는 없다. 현장에서 무엇이 일어난들 자기판단으로 뭘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상위자에게 보고하고, 그 지시를 받들어라 (그때까지는 가만히 있어라). 이런 식의 행동 양식이 일정 시기부터 모든 업계에서의 철칙이 되었다. 그렇게 하면 조직은 매우 효율적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조직 매니지먼트 원리주의자’는 신봉하고 있으나, 그러한 맹목적 ‘신앙’에는 사실 어떠한 현실적 근거도 없다.

     

    상부가 지시를 발해도, 도중에서 ‘이런 불합리한 지시에는 따르지 않겠습니다’라든가 ‘이런 못마땅한 명령을 내린 바보가 어딨어?’ 라는 ‘저항’에 조우하게 될 시, 상부의 그 의향은 어지간하면 물질화되지 않는다. 그런 요소가 발생하면 성가시므로, 까다로운 말을 하는 부하를 전면적으로 배제하여, 예스맨만으로 조직을 강고히 하면, 상부의 지시는 즉각 현장에서 물질화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최고로 효율적인 조직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당연하다. 톱다운 조직이 기능적이고 생산적인 까닭은, 상부가현인 경우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지의 사실대로, 톱다운 조직의 운영 규칙에 조직 내에서 뛰어난 현인을 상부에 기용토록 한다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현인 상부로 이끌기 위한 승진 체계가 톱다운 조직에는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 톱다운 조직을 만든 인물은 나름대로 수완이 있었을 것이다. 상당한 역량이 없다면, 그렇게 무리한 조직을 만들 없다. 하지만, 사람이 물러난 상부에 앉는 자는 대체로 창업자의 옆에 붙어 ‘아첨하는기술에 능한 예스맨이다. 그들은상부의 명령에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엇이든 따름으로 해서 지위를 얻은조직 매니지먼트 원리주의자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대에 이르러 조직의 정점에 있으면, ‘ 조직은 본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하는 근본적인 사항을 아무도 묻지 않게 된다. 그리고, ‘조직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가만이 우선적으로 문제시되면서 창조성이고 생산성이고 아무것도 없는 조직이 탄생한다. 이러다 보니 일본의 국내총생산이 급격히 수직낙하한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다 한탄해도 소용없겠지만, 이러한 역사적 변천은 50 가량에 걸쳐 일본 조직 전반의 주된 인사정책을 관찰하지 않으면 없다. ‘어떻게 멍청이만 선택적으로 출세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는가 대한 해답을 여느 경영서에는 찾아볼 없다. 실제로 자신이 속한 조직이 그러한 성질의 것으로 바뀌게 경험을 가진 인간(혹은 필자와 같이 몸소 그러한 실제 톱다운 조직을 만드는 힘썼고, 나중에 몹시 후회한 인간)밖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도 언젠가는하한가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괴상한 짓거리 오랫동안 있을만치 인간은 어리석지가 않다. 분명히 고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초두에 바와 같이, 역사는더치 하는 것인데, 절대 무목적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거니와, 반듯하게 지옥으로 향해 굴러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하나, 걸음걸이가 한참 더딜 뿐이다. ‘ 걸음 나가고, 걸음 물러나는정도의 보폭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조금씩착실하게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렇게 말을 꺼내면 ‘그렇지 않다. 인류는 점점 열화하고 있다 허무감을 내비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금, 노예제나 인종차별, 고문을 합법으로 유엔 가입국은 없다. 물론, 실제로는 그와 비슷한 일이 지하에서는 행해지고 있으나, 정부가 공공연하게 행하는 일은 사라졌다.

     

    미군은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에서 이라크 전쟁 포로에게 잔학한 고문을 행했는데, 이는 관타나모 기지가 미국의 법률과 쿠바의 법률 어느 것도 적용되지 않는 법률적인 진공 지대였기 때문에 가능했. 어쨌든 고문하는 측도이것은 법률위반이다하는 거리낌 (같은 ) 있는 셈이다. 우크라이나나 가자지구에서는 비도한 국제법 위반이 행해지고 있는데, 위반의 당사자들은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닌 적들이다라며 강변하고 있다. ‘국제법에 저촉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하는 명분만은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이 100 전과는 많이 다르다. ‘ 걸음 정도는 전진하고 있다 필자가 말함은 이를 두고 하는 것이다.

     

    지금 트럼프가 집권한 미국에서는정치적 올바름’에 무지막지한 백래시가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나 정치적 관용, 다양성・공정성에 대한 배려나 소수자의 사회적 포섭에 대해, 이렇게까지 심하게, 상궤를 벗어나서까지 공격이 행해지고 있는 까닭은, 근대 시민 사회가 조금씩 배양해 왔던 이러한 가치가, 대통령이 의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직권을 난사하지 않으면 부정을 없을 정도로 미국 사회 속에 뿌리내리고 있음 의미한다는 식으로 (낙관적인) 해석을 법도 하다. 그러한 민주적인 가치관이 나름대로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MAGA* 표어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성미가 저돌적인 것이다.

    (* Make America Great Again - 편집자)

     

    내 젊은 친구 중에 어떤 이*는 “현재 일본은 1930년대와 다를 바가 없다”고 개탄하는데, 그건 전혀 아닌 것 같다. 1930년대 일본에는 치안유지법이 있었고, 특별고등경찰과 헌병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부 상위에 통수권으로 보호받는 군대라는 실력장치가 있었다. 그 시대에 살았었더라면, 필자는 아마 매우 이른 시기에 집필의 장을 잃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정부적인 언동을 책잡혀 체포 수감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은 시대’이다. 필자가 정부를 아무리 비판해도, 혹은 공익을 해치는 사이비 집단에 대해 준열한 언동을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자택까지 찾아와 필자에게 ‘발언을 삼가라’ 하며 실력행사하는 사람은 (현재 시점에서) 없다. 필자의 실명과 주소라든지 전자우편 등이 모두 공개되어 있으므로, 정녕 필자에게 폭력을 가하며 입을 틀어막을 심산이라면, (필자에게 물리적으로 호되게 혼날 리스크만 배제한다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허나, 다행히도 지금까지 아무도 안왔다. SNS에서 필자의 발언이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는 점을 때때로 지인들이 알려주기는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필자에 대해 쓰여진 글을 읽지 않으므로, 어떠한 구설수에 휘말린다 하더라도, 아무런 데미지가 없다. 총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언론의 자유’는 일제시대*** 때보다 훨씬 확실히 보호받고 있다고 필자는 느낀다.

    (* 야마자키 마사히로 山崎雅弘 씨. 1967~. 전쟁사 연구가 – 편집자)

    (** 원문은 連ね인데, 우치다 선생이 수련하시는 전통 예술 노가쿠의 원형인 ‘사루가쿠’에서 유래한 일본어이다. 한국어로는 세설細說에 가깝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사이비 집단은, 언론의 장을 흐리는 ‘N국당’ 류이다. - 옮긴이)

    (*** 원문은 炎上, 원문은 戦前 – 역주)

     

    그만큼 여유로이 ‘언론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으니만큼, 언론이 지난 시기보다 위축되어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자질 문제이다. 용기가 없다든가, 긍지가 없다든가 하는 그런 문제인데, 제도 자체보다는 삶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제도는 바꿀 수 있으나, 인간은 바꿀 수 없다’는 사고방식도 있기는 한데, ‘제도를 바꾸는 건 무척 성가시지만 인간은 (종종) 단 한 마디에 바뀌는 경우도 있다’ 하는 사고방식도 존재한다. 일리는 나름대로 다 있다. 바꿀 수 있다면 제도를 바꾸면 되고, 인간은 바뀐다는 희망을 걸어도 좋다. 꼭 양자택일을 해야되는 건 아니다. 둘 다 해 보면 될 일이다. 필자는 언론인이므로, ‘인정과 도리를 다한 말과 글로써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우직하게 믿고 있다. 만약 그 믿음을 저버린다면, 필자는 붓을 꺾을 수밖에 없다. 이 판국이 됐으니만큼 아예 줄기차게 신소리를 농하련다.

     

    이 원고는 425일 발행호에 실릴 예정이다. 그 무렵, 해외와 국내가 어떻게 되어있을지 필자로서는 예측이 안 간다. 아직은 제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지 말라고, 아직은 ‘난카이 트로프’ 지진이 일본 열도를 덮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가장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대상은 아마 미국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에 의한 연방정부의 재편(이라기보다 차라리 파괴)은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 어느 시점에서 사법부에 의한 제동이 걸릴 것인가. 혹은 공화당 내부에서 ‘지지층이 급격히 이탈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가는 중간선거에서 참패한다’는 읍소가 백악관에 전해져 트럼프의 폭주가 멈출지도 모른다. 트럼프가 무슨 행동을 취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미국 외교는 전통적으로 ‘전략적 애매함’을 카드로 써왔다. 트럼프는 ‘카드’라는 비유를 좋아하므로, ‘다음에는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 도통 예측이 안 되는 존재’ 라고 다른 나라 지도자에게 각인시키므로써 게임을 지배하려고 한다. 트럼프는 이런 스타일을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전략적 애매함’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에는 좀 심한 말로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불렀다. ‘대통령이 실기하여 핵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를지도 모른다고 알려지면, 가상적국은 행동을 자제적으로 할 것이므로, 대통령은 미쳐버린 척을 하는 게 외교적 우위에 도움 된다’ 하는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닉슨은 심리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풍설이 유포되는 가운데, 닉슨은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중국과의 화해를 실현했으며, 소련과의 핵전쟁을 피했다. 미치광이가 어쩌다 보니 꽤나 ‘업적’을 이뤘던 것이다. 트럼프가 이러한 ‘성공 사례’를 흉내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일어날 수 있을 만한 일 가운데 가장 충격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미국이 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탈퇴(가장 큰 충격은 ‘유엔 탈퇴’이지만,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하는 것이고, 우리 일본인에게 가장 충격적인 카드는 일미 안보 조약의 해소이다.

     

    나토 가입국들은 이미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우세’ 소식이 전해진 이후 ‘탈미국 시대의 유럽 안전보장 구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 대신에 프랑스의 ‘핵우산’으로 유럽을 지키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중동의 평화 문제는 터키가 미국을 대신해 주요 행동자가 되어 영향력을 증대할 수 있다. 나토의 또다른 탈미국 전략은 중국과의 ‘중립’ 맹약이라고 필자는 본다. 유럽연합 나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러시아의 군사력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추세를 보면 폴란드와 핀란드는 러시아의 직접적인 위협에 처해 있다. 러시아도 갑자기 군사 침공을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군사침공하겠다’는 공갈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러시아에게 억제 기조를 요청할 수 있는 외교적 역량을 가진 나라는, 러시아를 가장 크게 지원하는 중국밖에 없다. 시진핑도 미국과는 비타협적으로 대립하고 있으나, 나토와의 관계까지 그르칠 생각은 없다. 미국이 자국 시장 문을 닫는 경우, 유럽연합은 중국산 제품의 가장 큰 시장이 된다. ‘일대일로’ 구상에 유럽연합이 전면적으로 코밋*하겠다고 제안해오면 아마 중국은 환영할 것이다. 중국이 러시아를 ‘만류하는 역할’**을 받아들여준다면, 나토는 러시아 때문에 지출하는 안전보장 비용을 상당수 절감할 수 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국에 유화적임으로, 마크롱이 시진핑과 담판할 가능성도 아마 있을 것 같다. 영국이 ‘브렉시트’의 실패를 호도하기 위해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구실로 유럽연합에 복귀할 여지마저 있다.

    (* commit. 커밋; 우치다 선생이 분야 막론하고 자주 쓰시는 말 – 옮긴이)

    (** 원어 止め에는, 급소를 노리고 있다, 또는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 역주)

     

    위에서 살핀 것과 같이, 유럽연합 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미국 없는 유럽’의 향방에 대해 사고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나라는 일본 뿐이다. ‘일미동맹 기축’ 하고 경문처럼 외지만, 일미 안보 말고는 안전 보장 구상에 관해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채 80년 동안을 핀둥핀둥 세월만 보내다가, 트럼프란 자가 ‘일미 안보 조약을 해소해버릴 테다’ 하는 으름장을 놓자 그제서야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다.

     

    여러 번 다른 데서도 얘기를 했는데, 예전에 고명하신 정치학자와 대담했을 때, ‘일미 안보 말고 일본에는 어떤 안전보장 전략이 있을까요?’ 하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문외한적인 호기심의 발로에서, 어떤 시나리오가 가능할지 전문가의 지견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 학자는 그만 말을 뚝 끊어 버렸다. 그때 일을 계기로, 일본의 정치학자들은 ‘일미 안보 이외의 일본 안전보장 체제’를 화제로 올리는 습관 자체가 없구나 하고 깨달았다. 정치가, 공무원, 정치학자 모두 ‘일미 안보 이외의 안전 보장 구상’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트럼프가 무엇을 요구하든, 특히 ‘주일 미군 기지를 미국령으로 하겠다’는 말을 꺼내도 수용할 것이다 (트럼프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따라서 일본에는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희망의 여지가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우선 정권을 교체해서 아베 정권 이래로 쌓여온 ‘고름’을 째내는 것이다 (‘정치 개혁’ 같은 유장한 개념을 내세우려는 게 아니라, 공인으로서 부적절한 정치인을 국사에서 배제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중추적인 관리와 통제가 일본의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마지막으로 교육과 의료, 그리고 농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예산을 배분할 것. 이 세 가지가 우선 가장 긴급한 정책 과제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실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그 방도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수밖에 없다. 필자 자신은 손수 지은 도장 공동체를 ‘커먼(common. 코먼, 커먼즈 - 역주)’으로 기능하게끔 돌보는 것을 여생의 과제로 삼고 있다. 필자가 주재하고 있는 공동체는 현재 시점에서 많아봐야 200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에 귀속되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서로 돕는 인적 그물망에 의해 보호받는다. 그렇게 보증할 수 있는 범위는 필자의 여력상 거기까지만 이른다. 이를 조금씩 넓혀가고자 한다.

     

    ‘커먼의 부흥’은 일본 열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크기를 저마다 달리하는 상호부조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수백 수천의 '커먼'은 이제 무르고 성긴 연결관계를 갖게 된다. 이는 곧 종래 모델인 중앙집권형 '허브 앤 스포크' 네트워크가 아닌, 한 커먼이 여러 커먼과 얽혀서, 땅 속 줄기와도 같이 펼쳐진 분산형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일본을 다시 살릴 작은 첫걸음이 되리라는 상상이 든다. 허나 필자 생애동안 그 성과를 볼 기회는 아마 없을지 모른다.

     

    (2025년 3월 17일)

     

    (2025-03-31 09:17)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커먼의 재생』 『무도적 사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오길비: 저는 머리가 나쁘기에, 반복 학습은 개인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도무지 '쇠 귀에 경 읽기'입지요.

     

    그리고 저는 초등학생 때까지는 분명, "일본을 봐라, 일본은 선진국이니까 배워라" 하는 말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저는 꽤 순진하므로, 일본의 가장 양질의 면을 계승해 실현하게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That reminds me of the story】

     

    90년대에 일본에서 나온 대중문화 작품들을 잘 살펴보면요.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레벌루션 NO.3』라든가, 상남2인조의 『그레이트 티처 오니즈카』라든가...) 당대 일본 중년 남성의 초라한 면을 가감 없이 묘사한 장면이 유난히 많더군요. 요전번에 <카우보이 비밥: 천국의 문>(2001)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극초반 에피타이저(여흥)로 이른바 '변변찮은 아조시(つまんないオッさん)' 에피소드가 끼어있더라구요. 좀도둑 수준이라고도 할 수 없는 강도질을 하는 주제에 별 이상한 설교를 길게 늘어놓는, 참 잊을 수 없는 인물상이었습니다.

     

    어쨌든 저쨌든, 황송하게도 우치다 선생님의 이번 옥고를 읽고 나서, 어떻게 하면 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수 있을까? 하는 첫 관문에 이르기까지 어언 30년 이상이 걸린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