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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도 ‘데라코야’ 세미나 주제 “카오스화하는 세계와 일본: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4. 21. 11:46
이번 학기의 주제는 ‘카오스화하는 세계와 일본: 어디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입니다.
어째선지 매년 엇비슷한 테마로 진행하게 되는군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좀더 온건한 주제, 이를테면 종교나 문학, 철학 등의 분야를 정온하게 논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세계 정세가 아시다시피 말이 아니니까요. 향후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본이 전쟁 당사국이 될 가능성조차 있는 상황인지라 적어도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그 문맥과 의미만큼은 인식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카오스’라는 말을 제목에 넣어서 발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입니다.
이제는 ‘세미나 발표란 무엇인가’ 하는 다소 일반적인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데라코야 세미나’는 결국 명실상부한 ‘세미나’이므로, 발표자는 ‘모노그래프(monograph)’를 제시해야 합니다.
(1) 논점은 한가지로 한정할 것.
(2) 이 단일논점에 대해 청강생들에게 충분한 정보 제공을 행할 것
(3) 그 논점에 대한 사견을 제시할 것.
지금까지 세미나 발표를 죽 지켜본 바로는, 마지막 ‘사견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여러분이 매듭을 잘 못 짓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사견’이란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마 아무도 말하지 않을 듯한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생각을 짜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는 나와 줄 겁니다. 평소에도 그런 일은 저도 모르게 하기 마련이니까요. 자신이 고른 테마에 대해, 이래저래 알아보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떠오른, 그리고 이건 아마 자기 말고는 그다지 남들이 안 떠올릴만한 것’, 그것이 ‘사견’입니다.
설마 여러분 가운데에는 ‘객관적인 사실의 적시에만 그치고, 사견을 밝히지 않는’ 것이 지적으로 억제적인 행동이며, ‘바람직’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틀렸습니다.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을 듯한 것’ 만이 학술적인 ‘증여물’이 됩니다. 학술이라는 것은 집단적인 작업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좀 어렵습니다만, 어떤 지견이 ‘자기 말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을 만한 것’임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자기 이외의 분들이 말하고 있는 「상식적인 지견」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알아들으시겠나요? 세미나 발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명을 똑바로 하는 것’입니다. ‘똑바로 설명’하는 것이란 ‘스스로도 설득이 되게끔, 자기도 알 수 있게끔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가 쓴 것을 가져다가 그것을 붙여넣기만 해서는, 그게 설령 제3자에게는 ‘설명’으로 비칠지언정,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 겁니다. ‘자기도 알아먹게끔 설명하는 것’이란, 저작(咀嚼)하고, 연하하며, 소화해서, 자신의 신체에 흡수된 것만을 내어놓는 것이란 얘기가 됩니다.
자신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설명’이라는 행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학술적인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공자가 ‘술이부작’을 논했던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선현의 말을 조술하는 것일 뿐, 어떠한 새로운 것도 거기에 가필하지 않는다’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이때 ‘선현의 말을 조술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창조적인 행위라는 겁니다. 따라서, ‘조술자’라는 주체적인 입지에서야말로 비로소 ‘비주체적인 주체성이 존립한다’는 감동적인 ‘설명’을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은 『논어』를 조술하며 사견을 밝혔던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설명’은 ‘창조’이며, ‘조술’은 ‘창조’입니다. 진짜입니다.
그럼, ‘데라코야 세미나’의 발표자 여러분, 분발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025-03-27 11:4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커먼의 재생』 『무도적 사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사견: “AI 시대에 웬 번역?” 이라는 말을 많이 듣곤 합니다.
AI 대두 이전에도 번역은 원래 동네북이었습니다. 기술적이고 허드렛일같은 것이라고 비쳐졌던 모양이에요. (대한민국 국군만 하더라도 단기 사병이 대다수의 번역을 맡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어느 외국어 화자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싶었고, 이것을 저 스스로도 납득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기 위해 여가 시간에 수동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AI가 정말로 생각을 위한 도구라면, 잘은 모르겠지만 발상이나 호기심 같은 것에 좀 더 역점을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인간 지성의 작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같은 이야기인데, 예전 같았으면 혼자서 책을 읽고 (이른바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문리를 깨치는 과정이었겠고요.
아무튼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야말로 제가 우치다 선생님의 글을 적극 소개드림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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