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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인물) 자유의 반역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5. 5. 7. 09:02
    민주정치 아래에서는 주권이 시민에게 있지만, 주권이 일단 대중에게 주어지면 처음에는 그 권리를 남용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상실하는 법이다. - 로마제국 쇠망사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극우세력이 선동하는 폭력과 혐오가 넘치는 시대지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악을 마주하고 너무나도 빨리 뒷걸음질 치면서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유일한 돌파구로는 “공포심 앞에 이리저리 놀라서 움직이는 군중에 합류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서) 조금 떨어져 판단하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를 권했다. 악에 적응하지 않는 일상의 실천도 강조했다. (…)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사는 사람들은, 일본국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구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구태여, 인권이 제한받고 자유도 없었던 과거에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자유나 권리를 획득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그럴싸한 집단의 일원이며, 강대한 권위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보다 비중을 두기 때문입니다.

     

    ー ‘자유’보다는, 설령 행동과 권리에 제약을 받더라도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데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씀이시군요.

     

    일본의 사례 뿐만이 아닌, 세계사적으로도 보편적인 얘기입니다.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 속에서, 나치 독일이 발흥했던 이유를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해석해 놓았습니다.

     

    자유’란, 그것을 능숙히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는 법입니다.

     

    ー 비극을 불러일으켰던 대일본제국적인 가치관은 전후 일본에서 일단 한번 부정되었는데, 이렇듯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반성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본에서 다시금 그런 시대의 가치관이 힘을 얻고 있는 걸까요?

     

    2011311일이 그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날 이래로 ‘끈 (원문은 絆 키즈나 - 역주)이라는 말이 곧잘 쓰이곤 하지요. 한마디로 고독함을 달래려는 표현입니다.

     

    사상 초유의 재난에 직면한 뒤 불안함이 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 또한 어느 집단의 일부이며 주위 사람과 끈끈히 연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때 통용됐던 게 ‘일본인’이라는 민족집단적인 의식이었습니다.

     

    ー ‘일본 예찬’이로군요.

     

    그 언저리를 기점으로 ‘일본인은 어째서 훌륭한가’, ‘외국인이 본 멋진 일본 문화’, ‘일본의 기술력에 세계가 감탄’ 같은 콘텐츠가 늘었는데 이는 자국민의 우월감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물론 예전부터 대일본제국 시대의 권위주의를 동경하던 사람은 소수지만 있어왔는데, 311 이래로 그 수가 급격히 늘었으며, 그런 분위기를 타고 아베 신조 정권이 탄생했다고 보거든요.

     

    아베 정권 그리고 그 지지층은 전적으로 대일본제국적인 정신문화를 계승하려는 집단이므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했다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ー 본질적인 의문입니다만, 어째서 그런 권위 없이는 못 배기는 걸까요?

     

    전쟁 전후로도, 심지어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민주주의의 근간인 개인주의 교육을 하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ー 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각자가 ‘개인’으로서 자기 삶을 살게 되면 원래는 어떤 사회경제적 집단에 속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한편, 다수파에 속해 있다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심리의 발로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수호하고자 외부의 적을 설정해 공격하기 마련입니다.

     

    여성 혐오와 성차별, 중국 등에 대한 배타주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차별, 기초 수급자・장애인 등 약자 멸시와 같이, 이 모든 사안들이 권위주의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ー 권위주의의 다양한 폐해 가운데 ‘언론의 기능 부전’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째서 이리 암담한 상황이 되어버린 걸까요?

     

    요즘 들어 레거시 미디어의 본령이 뭔고 하니, 숫제 방관적인 보도 자세를 취한다는 거예요.

     

    이를테면 모리토모・가케학원 문제 등 정권에 무슨 스캔들이 터지면 ‘이는 명백한 국민에의 배임’이라고 언론 자신이 목소리를 내 비판을 해야만 함에도, 조건반사적으로 여야당 정치인들의 발언을 받아쓰기하고 이를 보도합니다.

     

    물론 그렇게 처신해야만 문제 안 만들고 일상적으로 언론사를 굴릴 수 있기는 하겠지만요. 하지만 그들이 하루이틀은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래의 일본 사회와 그들 자신의 업계에, 심지어 악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이에 대해 좀 스스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ー 언론이 어째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보십니까?

     

    결국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다들 ‘개인’을 확립한 어른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교육을 보면, 부모나 교사의 낯빛을 살피고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미리서부터 대령하는 아이가 ‘착한 애’ 소리를 듣지요.

     

    주요 일간지 언론사에 채용될만한 명문대 출신은 학창시절 내내 그런 기준 아래 높은 평가를 받아온 사람일 것이므로, 그러한 가치관에 순응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제껏 권위나 권력에 한점 의심 없이 성장해온 사람이, 사회에 나왔다고 갑자기 그것들에 의심을 품기란 어렵지요. 그러기 위한 능력도 기르지 않았거니와, 오랫동안 실천해온 경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조직에 이런 별난 특성을 가진 사람이 발 붙일 수 없게 되는 거겠지요. 말하자면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ー 이러한 현상이 표면화된 게 아베 정권 출범 이후이므로 아베 총리의 문제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사실 그 근저에는 다양한 문제가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는 것이어서, 차후에 아베 정권이 물러나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은 계속 이어질 것 같다는 예상이 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베 신조가 문제의 모든 근원만은 아니예요. 아베 정권의 폭정은 단순한 결과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황이 달랐다면 이런 사태는 안 일어났을 것이며, 애초에 그가 총리 자리에 오를 일도 없었겠지요.

     

    2010년대 일본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해 먼 훗날 역사적인 검증이 꼭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야마자키 마사히로 씨 인터뷰 일부 발췌 / Wezzle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