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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포르를 주는 도서, 맘을 휘어잡는 영상 -- 매체에 선택지가 있다는 것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5. 3. 6. 18:45

    효고현 시국 관련 정상화를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해 한마디 해달라는 청을 받게 되었다. 필자를 제외한 등단자는 전원 유튜브를 통해 정기적으로 방송하고 있는 소위 ‘인플루언서’ 분들이었다. 문자 정보 중심으로 발신하고 있는 건 필자 혼자였다. 이러한 주요 이용 매체의 상반된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영상 스트리밍의 이점은 압도적인 속보성과 즉흥성에 있다. 연극적 능력* 또한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한번 보게 되면 멈출 수 없다. 작금의 여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에 비해 필자처럼 문자 정보를 중심으로 발신할라치면 이렇듯 직접적으로 여론을 환기했던 사례가 매우 드물다. 문자란 게 구어가 지닌 ‘아지테이션’에는 역부족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자 발신에도 나름의 이점이 있다. 동영상에 비해, 독자의 참여 비중이 비교적 높다는 게 그것이다.

     

    문장의 경우, 읽으면서 어느샌가, 그때까지 독자의 머릿속에 막연히 떠오르곤 했던 사념이라든가 감정의 윤곽이 명확해지는 일이 있다. ‘맞아 맞아. 나도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지견의 획득’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는 만족감을 느끼는 셈이다. 설령 ‘나도 예전부터’ 운운이 사실은 대부분 독자가 사후적으로 꿰맞춘 모조 기억이라 할지라도, 크게 문제 될 소지는 없다. 이렇게 ‘나도 예전부터 생각해 왔었던 것’의 자격으로 재발견된 ‘타인의 의견’은 비로소 독자의 내면에 착상하여, 깊이 뿌리를 뻗는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책의 경우 이해가 어렵다 싶으면 건너뛸 수 있고, 마음이 쓰이는 대목은 다시금 읽을 수가 있다. 몇 년 지난 뒤 책장에서 다시 꺼내 읽을 수도 있다. 전기가 끊긴 환경에서도 (반딧불로, 바깥에 쌓인 눈으로) 읽을 수 있다. 동영상은 법리적으로 따지자면 업로더의 소유물이다. 그에 반해 도서는 독자의 재물이다. ‘내 독차지’라는 느낌이 동영상과는 아주 다르다. 따라서, 문자로 발신되는 것들에는 ‘독자로 하여금 흉금을 털어놓게 하고, 또한 독자에게 온전한 소유감을 안겨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어 있다.

     

    첫 만남의 순간에 ‘시청자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 매체’를 택할 것인가, 고생깨나 한대도 ‘독자의 길동무 되는 매체’를 택할 것인가는, 발신자가 고를 일이다. 뭐가 좋고 나쁘다 하는 얘기가 아니다. 매체에 선택지가 있다는 건 단적으로 ‘바람직하다’.

     

    ※ 주간 AERA 202533일호 게재

     

     

    출처: https://dot.asahi.com/articles/-/251160?page=1

     

     

     

    * 본문에 언급된 ‘연극적 재능’에 대한 역자의 단견으로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구술 문화가 문자 문화로 이행해 가는 풍토였던 바, 당대 희곡이나 웅변 등에서 연유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른바 수사학의 ‘설득 3요소(로고스・파토스・에토스)’ 같은 것과도 연관이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점은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 착안점을 시사해 준다고 생각됩니다.

     

    ** 원문은 懐に入る인데, 옛날 복식 생활에서 유래된 ① (재물 등을) 자신의 소유로 한다는 뜻이, 현대에 와서는 ② 친화성이 좋다 하는 의미로 일본어에서 쓰이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중국의 고사에서 비롯된 애초의 뜻은 “도움을 구하고자 상대에게 간청함”과도 통한다는 일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중의 뜻을 밝히는 작업이 매우 긴요했으나, 역자인 제 불민의 소치로 말미암아 기나긴 주석이 달리게 된 점 해량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