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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이기 때문입니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5. 3. 4. 17:22
(옮긴이: 박동섭 선생의 주선 하에 출판인 위주의 당월 2회차)
어제 한국에서 오신 손님들이 하신 질문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게 "우치다 선생님은 어째서 그렇게 낙천적이신가요?"였습니다. 뭔가를 집요하게 신경쓰지 않는 비법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서, 좀 생각해본 뒤 이렇게 답해드렸습니다.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제 철학 은사로는 레비나스 선생님, 무도 스승은 다다 선생님이 계십니다. 저는 이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수행은 뭐에 써먹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받아도 '잘 모릅니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알면 수행을 이어갈 의미가 없습니다.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수행하는 겁니다.
제자 된 입장에서 '알지 못합니다' '불가능합니다' 라는 말은 우리 스승님이 지닌 예지와 기예의 한없는 위대함을 증언하는 것인데, 그런 위대한 스승의 뒷모습을 보며 걷는 제자 노릇의 기쁨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괜히 폼을 재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깐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저는 제자이므로, '쓰기는 했으되 지어내지 않는(술이부작)' 식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말하고 쓰는 건 전부 선현의 옛 말씀을 그대로 읊는 겁니다. 이러한 스승들의 예지 가득한 어록을 대할 적에, 제가 가진 자그만 국량으로는 이걸 제대로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시라카와 선생이 언급하신 바 있는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에 으레 깃드는 몰주체의 주체"로 남고자 합니다. 그런 모습이 남들 눈에는 '낙천적'으로 비치는 것이겠지요.
'스승을 모신다'는 자세의 개방성과 풍요성을 높이 평가하는 건 아시아 문화가 가진 고유한 성질인지도 모릅니다. '주체적인 태도'나 '정체성(아이덴티티)'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서양에서는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가는' 동양적 삶의 자세를 놓고서 어쩌면 '비주체적'이라는 낙인을 찍기 십상이겠지요.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은 『공자전』이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공자는 자신의 학문을 '술이부작'이라 했다. 이는 공자가 몸소 뭔가를 만들어 냈다는 의식, 창작자라는 의식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조라는 의식이 기진할 때야말로, 도리어 거기에는 진짜 창조가 있다 하는 역설적인 견해 역시 설득력 있다. 전통은 추체험에 의해 개(個)에 내재함으로써 화할 때, 비로소 전통으로서 확립된다. 그리고 그것은 개(個)의 작용에 따라 인격화되고, 구체화되며, 「말과 글이 된다」. 이때 나타난 텍스트는 이미 창조물이나 다름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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