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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변경론》 중국어판 해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5. 2. 8. 21:36
어느 가을 저물녘, 비상근 강사로 오래 봉직해 왔던 고베여학원대학에서 우치다 다쓰루 교수에게 《일본변경론》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석양이 캠퍼스의 교회당과 D관 앞의 조그만 일본 목조 신전을 따스히 비추고 있었다. 전자는 양풍인데, 후자는 일본 고래의 건축양식이고 보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 대조적인 풍경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 고즈넉한 풍경을 볼 때마다, 우치다 교수의 논설은 지금 눈 앞의 인상적인 정경과도 같이, 일본 국내에 그치지 않고 보다 확대된 외부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외부 시야란, 말하자면 국외자의 시점이며 그것은 내가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 중국인의 시점으로 일본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인에게는 별 것 아닐지라도, 바깥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일본변경론》에서도 논의의 대상으로 다룬 바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이 허다한 외국어로 번역되는 반면, 일본의 국민 작가라고 불리는 시바 료타로가 외국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를 방불케 한다. 이 점에 대해 우치다 교수는 "이 책을 쓰는 내내, 만약 외국어로 번역되는 경우 어떤 표현이 나올지를 항상 유념하며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 점이 결국 일본어 본문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라며 자인하고 있다. 일본인 학자가 일본 문화에 대해 논할 적에, 이러한 자기 규율 의식을 지녔다는 점은 굉장한 귀감이다.
19세기 독일 사람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1873년에 트로이목마 전투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유명해진 부호인데, 전 세계를 여행하며 청나라 중국이나 당대 일본을 방문했고, 그 체험을 기록한 여행기를 남겨두었다.
슐리만은 중국이 점차 뒤처지고 있는 반면, 일본은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여행기에는 중국을 일본과 비교해 기술하는 단락이 상당히 많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생활 습관을 일본과 비교해 서술하는 구석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그는 "일본에 가보고 나서야 비로소 유럽처럼 침실에 호화로운 가구를 놓을 필요가 없단 걸 깨달았다. 만약 인간이 모두 정좌할 수만 있다면, 테이블이나 의자, 나아가 침대 역시 필요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지혜를 익힐 수만 있다면, 생활은 더욱 여유로워질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일본의 독특한 식기인 젓가락이 어디에서 전래되었는지 독일 사람 슐리만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여행기에는 편견이 엿보이는 바, 중국을 격하하며 일본을 추어올리는 분위기가 명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러한 서술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이국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교'가 불가결하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19세기 독일인이 보았던 일본을 빗댈 대상은 유럽과 중국 양자였다. 그는 복수의 비교방법을 활용했고, 다양한 참조 기준을 제시했으며, 그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거니와, 단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 전부를 열거해 기술하는 데도 역점을 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를 할 때는, 직접적인 체험에 바탕을 둔 심플한 비교, 즉 마음 깊이 느낀 체험으로서의 '비교'가 더욱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비교 스타일을 《일본변경론》이 구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중국인 독자가 이 책을 통해,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본인은 기기괴괴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말예요. 일본인은 오랫동안 중화문명과 유럽문명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정작 자기 자신은 항상 변경에 자리잡았지요. 일본인은 중심부 사람들의 생각에 열심히 적응하지만, 스스로 중심을 창조했던 적은 단연코 없습니다. 이건 숙명입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중화문명을 기준으로 둘 것인가 유럽 문명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사상적으로 엄청난 혼란기를 겪었습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이란 서구 중심으로 되어 있기는 합니다."
나는 우치다 교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중국어에는 변연(邊緣)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일본어의 변경(邊境)이 가지는 뉘앙스와는 확연히 다르지요. 하지만, 이 중국인 화자가 변연(邊緣)에서 느끼는 감각에 상응하는 단어를 일본어에서 찾아내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그렇겠지요." 하고 우치다 교수는 말을 이었다. "변경(邊境)이라는 말에는 지정학적인 함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변연(邊緣)이라는 말만 딱 놓고 보면, 두뇌 기관이나 조직 명칭 등 해부학적인 면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지요. 인문학계에서 변경(邊境)이란 개념은 적극적인 사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방금 전에 일본인이 변경에 스스로 처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단순히 유행을 쫓아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중심부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마치 변주곡을 연주하는 듯이, 개량・흡수・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일본변경론》은 2010년 베스트셀러에 등극했으며, 평론계는 "일본인론의 금자탑"이라고 평했다.
학계의 정설에 따르면 '일본인론'은 에도 시대 후기에 등장했다. 일본인이 외국인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의식하면서 비로소 그 분수령이 성립되었다는 점에 착안하고 있다. 이러한 시선 의식의 기원은 에도 중기부터 막부 말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쇄국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정보가 알음알음 유입되었는데, 이렇게 서양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일본인 역시 서양을 주제로 기술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아라이 하쿠세키의 『서양 기문』은 그런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즉 '일본인론'은, 일본인이 서양인을, 그리고 서양인이 일본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상호작용적인 지식 환경 속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식이 강했던 축에는 스즈키 하루노부의 우키요에 제자이자 일본에 처음으로 유화 기법을 도입한 시바 고간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는 서양 문물에 비교적 선각적이었다. 그런 그는 『춘파루필기』에서 "우리 일본인의 지력은 얕고, 생각도 매우 일천하다. 그래서 구라파를 쫓아가는 데 역부족이다"고 썼다.
나중에는 와타나베 가잔이나 다카노 조에이 등, 유사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 속속 등장한다. 물론 그들은 본격적인 '일본인론'을 전개한다기보다는, 일본인은 뒤처졌으니 서양의 지식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일본인론' 방계의 흐름 속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 유자들의 논점은 사뭇 달랐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일본인을 연구할 적에 중국을 준거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모노노아와레'라는 개념이 일본 고전 문학에서 기인했음을 주창했다.
그들 사상의 근저에는 일본 우월론이 복류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서양과 비교하든 중국과 비교하든, 일본인은 항상 뛰어나다는 생각이다. 이를 보면, '일본인론'의 근원점은 애초부터 일본 문화의 '후진성'과 '선진성'이라는 양극단의 선택지에 직면하고 있었음이 역력히 드러난다.
막부 말기까지의 '일본인론'은 기본적으로 한쪽 측면만 부각했었는데, 메이지 시대에 이르자 특히 서양과의 비교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지 개략』을 대표적인 작품으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현대에도 '일본인론' 가운데 명성이 높다.
후쿠자와는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미국과 유럽에 갔다온지라 일본인이 외국인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서양 지조』는 지금 읽어 봐도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외부와 한발 앞서 접촉을 가졌던 내국인 엘리트층이 일본인론을 주도했다"고 썼다.
일본인 엘리트층이 선구적으로 '일본인론'을 부단히 개척한 결과, 전 세계적으로 일본 문화의 관찰과 연구가 날이 갈수록 지식의 참조대상으로서 그 중요도가 높아져 갔다. 수많은 명저 가운데 내가 읽어본 범주만 놓고 보면, 나카네 지에나 도이 다케오 등 일련의 저자에 더해, 『국화와 칼』이 가장 전형적인 '일본인론'으로 꼽힌다. 물론 그 전후로도 많은 외국인 저자가 이 주제와 관련해 집필을 이어 가고 있다. 이를테면, 메이지 덴노의 독일인 주치의라든가, 브레즈네프 서기장 시절에 『벚꽃 가지』라는 책을 집필해 700만 부라는 화제를 불러일으킨 구소련의 저널리스트, 프세볼로트 오브치니코프 등도 있다. 중국에서는 다이지타오의 『일본론』이 비교적 유명하다.
우치다 다쓰루 교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50년생 도쿄 출신으로, 1975년에 동경대 문학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부터 고베여학원대학 문학부에서 교편을 잡은 뒤 2011년 봄에 퇴직했으며, 같은 대학 명예 교수로 있다. 또한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무도가인데, 도장 '가이후칸'을 주재하고 있기도 하다. 주저로는 『거리의 중국론』,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등 다수. 2007년 『사가판 유대문화론』으로 제 6회 고바야시 히데오상 수상. 현재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활발한 강연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 등에도 정기 출연하고 있다. 그러나 티브이에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나는 티브이란 걸 안 보는 인간이다"라고도 언급한 바 있다.
출전: 마오단칭(毛丹青) 고베국제대학 교수 홈페이지 https://note.com/maodanqing/n/nba1e0987bc31
(…) 조지 마이클과 중국의 인연은 31년전인 1985년 4월 10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지 마이클이 활동했던 그룹 왬(Wham)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시절 이후 중국에서 공연을 가진 첫 서구밴드였다고 베이징청년보와 외신등이 27일 전했다.
신중국 성립 이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고립돼 있던 중국인들에게 치렁치렁 머리를 기르고 춤을 추는 왬의 콘서트는 '컬처 쇼크'였다는 게 당시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콘서트는 당시 베이징 최대 체육관이었던 공인(工人·노동자)체육관에서 열렸다. 장당 30∼40위안의 티켓을 사느라 줄이 길게 늘어섰다. 중국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96위안이었을 때였다. 상당수 관중들은 각 기관, 학교별로 배정된 단체 티켓으로 입장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작가 마오단칭(毛丹靑·54)은 "그렇게 많은 경찰을 본건 처음이었다"며 "블록마다 경찰이 줄지어 관중들 앞에 서 있었다. 삼엄한 경계는 관객들을 겁에 질리게 했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앞 자리의 외국인 학생들이 일어나 춤을 추자 곧 경찰들이 다가와 앉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뒷자리에 북한에서 온 유학생들이 앉았던 일도 기억해냈다.
마오단칭은 "공연 도중 작은 소동이 하나 있었다"고 소개하며 "전기가 부족했는지 조명이 하나 꺼졌다. 그러자 베이스기타 연주자가 잠시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 중국인들이 그런 춤을 본건 처음이었고 사람들이 열광했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마오단칭 선생 소개: 서울대나 동경대도 대단하지만, "북경대 출신이올시다" 하면 어딘가 기죽이는 데가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경악스러운데, 홀홀단신 도일해, 수산물 무역 종사 등의 이력을 거쳐 지금은 후학 양성에 매진 중.
하루키 문학 권위자이기도 한 마오단칭 선생에게는, "열 왕이(외교관)가 한 마오를 못 당한다"라는 말이 합당합니다.
마오 선생 텍스트 미디어 보도 자료들. 중국어 공부용 (2025-02-14)
성조가 넘 어려워요 😭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 La miseria y el esplendo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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