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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재난으로 잃은 것과 배운 것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5. 1. 31. 13:13
한신아와지 고베대지진이 일어난 지 어언 30년이 흘렀다. 30년 전 1월 17일 그날, 아시야 자택에서 이불 위로 굴러떨어진 장롱서랍이 안면을 강타하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열두 살 난 딸과 둘이서 살고 있었기에, 딸의 방으로 곧장 달려갔다. 가구는 거의 대부분 쓰러져 있었지만, 침대 위에 딸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아, 무사했구나' 하고 딸을 껴안았다. 그때 느꼈던 안심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그밖의 일들은 사실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집 주위의 공중전화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그때 코트를 입고, 서류가방을 든 남성이 사람들 옆을 스쳐지나갔다. 버스가 오지 않는 탓에 걸어서 출근할 작정인 듯했다. 그때, 한 트럭이 언덕을 올라왔는데, 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 운전수가 '전철역까지 가도 소용없다니까. 아시야 역이 사라졌어' 하고 알려주는 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마친 뒤에 딸을 태우고 오토바이로 아시야 역까지 가보니, 확실히 역사가 무너져 있었고, 기차역을 거의 가로지르다시피 빌딩이 한 채 넘어져 길을 막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자연재해가 일어났음을 그때 비로소 실감했다. 평시 상태에서 비상 상황으로 두뇌의 방향을 스위치 다루듯 전환하는 게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매일같이,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오토바이로 직장인 대학에 들러, 잔해를 수습하는 토목작업에 종사했다. 작업에 뛰어든 교직원은 상당수 그들 자신이 피난민이었다. 멀찍이 사느라고 지진과 관련이 없던 교직원은 캠퍼스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개중에는 '막일 하려고 월급 받는 건 아냐'라며, 연구실이 복구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발걸음하지 않은 교원도 있었다. 그 후로, 그들이 교수 회의에서 어떤 발언을 하든지 간에, 필자는 그들의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학생 자원봉사자들 또한 우리가 머물던 체육관에 찾아왔다. 선의의 발로였기는 하되, 무엇을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 어찌나 한가했던지, 하루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뛰기 시작했다. '너희는 뭐하러 여기 왔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극력 자제했다. 그들 역시 뭘 해야될지 몰라 나름대로 곤혹스러운 것이다. '자원봉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미스 매치이다'라는 점도 그때 깨달았다. 지진 재난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배운 점도 많다.
(AERA 2025년 2월 3일호 /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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