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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인물) 한국 국민에게 말한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5. 2. 24. 14:25

    어제 가이후칸에 오신 한국 손님들과 있었던 질문 시간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2기 취임으로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요?” 하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같은 동아시아인끼리 피부에 와닿을 여러 사안 가운데 하나는, 트럼프가 양국에 핵무장을 다그치는 것이 있겠고, 나머지 또 다른 하나는 한미 상호방위 조약, 내지는 미일 안보조약을 파기하라고 압박할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트럼프가 하는 짓들은 그가 잘하는 ‘딜’ 같은 것인데 진짜 속내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맹국 핵무장이든 상호방위조약 파기든지간에 벌어지기만 하면 동아시아는 그 순간 아비규환에 빠집니다. 중국은 역내의 혼돈을 원치 않습니다. 따라서 트럼프는 여차하면 지르겠다고 해놓고서 정작 중국한테서 외교적 실속을 챙기려 들 거예요. 트럼프라면 그러고도 남습니다.

     

    여하간 미국 측이 동아시아의 해양세력에게 ‘너희 나라는 이제 너희가 스스로 지켜야지?’ 하고 요구하는 날이 오면, 두 나라는 사이좋게 ‘선군(先軍) 정치’를 도입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한국은 1987년 이전의 ‘군사 독재’, 일본은 1945년 이전의 ‘大일본제국’을 참조 모델로 삼게 됩니다. 그저 국방이라면 아는 게 그것뿐이니까요.

     

    이번에 특별히 한국 분들에게는, “트럼프 때문에 한국이 민주화 이전으로 퇴행할 리스크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상정되어 있으니만큼, 절대로 그것이 실현되지 않도록 지금부터 준비를 단단히 해 두시라, 는 겁니다. 현재 일본에는 태평양전쟁을 몸소 경험한 세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서 누구 하나 ‘선군 정치’의 위험성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일본이 훨씬 심각하다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일본이고 미국이고 할 것 없이 ‘어쩌다 하다 하다 못해 저런 인간이?’ 소리가 절로 나오는 정치가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통치자로 선출되어, 국운이 쇠하고 마는 그런… 패턴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사이토 모토히코와 ‘N국당’, ‘유신회’ 등을 이르는 것이다. - 역주) 그래, 민주주의나 인권 사상, 근대적 시민사회 추구 같은 가치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서 ‘다음 단계(phase)’로 들이받으려는 가속주의적 허무주의가 국민적 규모로 침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닉 랜드와 신반동주의』의 저자 후기에는 이러한 사조의 와중에 처해 있는 밀레니얼 세대를 ‘「잃어버린 미래」에 속한 세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작에 자기들의 순수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present) 그리고 미래(future)란 늘 그들에게 생존적 문제를 여의치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름의 미래를 선취적으로 빼앗긴 사람들은 결국,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던 과거 어느 시점에 향수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유토피아를 찾아내고자 하는 심성’을 가진 그들은 이제 트럼프에 주목합니다.

     

    “트럼프는 『다시금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친다. 이 말인즉슨,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도 마치 지표면 아래에 묻혀 있던 과거에서 미래의 비전이란 걸 파내어낸 셈이며, 동시에 이를 잘 포장했다는 얘기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미래란 게 원래 현재에는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과거로부터 회귀해 오는 망령이 아니고서는 불러낼 수 없다, 는 그런 측면의 반영이기도 하다.”

     

    트럼프와 가속주의의 친화성에 관해 내가 이제까지 접한 글들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한 번도 현실이 된 적 없는 과거”야말로 비로소 사람들의 사고와 감정을 다스린다는 이치를 어떤 책에 쓴 적이 있습니다. 가속주의는 한마디로, ‘모두가 희망찬 미래를 꿈꾸던 과거로의 퇴행’과 함께, ‘자본주의, 그리고 그 자본주의의 사후 경련과도 같은, 미래 세상으로 들이밀고 나가려는 전진 추세’를 동시에 행하는 운동과도 같은 것입니다.

     

    노스탤지끄한 퇴행, 그리고 설령 벼랑 끝이라도 앞쪽으로만 목숨 걸고 날아오르려는 게 ‘결국 매한가지’라고 힘 있게 주장하는 그 무논리성에 바로 가속주의의 매력이 있는 듯 보이네요. 트럼프의 복고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일론 머스크 식으로 자본주의라는 식품첨가물을 친 정치적 니힐리즘이 서로 짝짜꿍하는 이유가 다 있더라고요.


    독재자는 자기 평가가 이상하게도 높은 거랍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적들을 싹 다 끌어내고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었으니 ‘난 엄청난 존재다’ 하는 의식이 멈추지를 않는걸요. 주위 참모들은 당연하게도 ‘각하께서는 이 나라의 천재이자 국부이자 성인을 모두 겸하고 있습지요’라고들 떠들어대는데, ‘흐흐. 임자, 너무 띄워주면 쓰나?’ 하고 짐짓 찌푸리는 모습은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각하께서는 지금 사실을 오인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방안입니다’, ‘좀 더 심려숙고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하고 간언하는 인간이 독재자 앞에 나타날 경우, 응당 ‘거짓말쟁이’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걸핏하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 분야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네가 뭘 알아?’가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게 독재자 주위에는 돌대가리들이 판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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