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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보초의 자질인용 2025. 4. 9. 19:53
보초의 자질
마이니치신문사가 곤고부지에서 연 세미나에 다녀왔다. ‘공공성의 재구축’이라는 제목이었는데 3・11 대지진 전에 정한 것이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사회제도를 새롭게 고치기’라는 주제로 70분간 이야기를 하였다.
최근에 반복해서 말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것’의 최전방에서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우주의 기원을 모르고 우주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또는 무엇이 없는지)도 모른다. 때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고 때가 언제 끝나는지 모른다.
「욥기」에서 하느님은 욥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너에게 묻는다. 나에게 말하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느냐.
(……)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네가 그 모든 것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ー 「욥기」 38:1-18욥은 이 물음 앞에 말문이 막힌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부’에 관해서는 무지하다. 우리는 우리 손안에 있는 도량형으로는 계량하지 못하는 것, 손안의 언어로는 기술하지 못하는 것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 이해를 넘어선 세계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
우리가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로 그 경계선을 수호해야 한다.
누군가 경계선을 수호해야 한다. 「욥기」에서는 하느님이 그 일을 담당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한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 내가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ー 「욥기」 38:8-11‘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해서 “여기까지는 와도 좋다. 그러나 이 이상은 안 된다”라고 선언하는 경계선이 있다. 고야산 산속 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최전방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법대사(구카이)가 막아 냈다는 ‘높은 파도’의 미세한 파동이 감지되었다.
성역이란 거기서 완결되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과 무엇 사이의 경계이다. 기능적으로는 ‘빗장과 문’이다. 스컬(skull) 아일랜드 원주민이 콩의 인간 세계 침입을 막기 위해서 건설한 거대한 ‘문’을 상상해 보라.
‘빗장과 문’이 제대로 기능하는 장소라면 우리는 ‘거대한 파도’의 바로 옆까지 갈 수 있다. 성인(聖人)은 ‘경계를 정하고 빗장과 문으로 거대한 파도를 막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 전원이 그러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성인이 등장해서 ‘빗장과 문’을 점검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다.
나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초’라고 이른 적이 있다.
우리 사회제도의 다양한 곳에서 ‘틈’이 생기고 ‘무언가’ 그 틈으로 침입할 기척이 나면 보초는 그곳으로 달려가 ‘빗장’을 걸고 ‘문’을 닫는다.
우리 사회의 제도 피로, 제도 붕괴는 ‘보초’의 절대수가 줄어들어 ‘틈’을 수선하는 손길이 점차 미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는 ‘가공할 만한 힘’을 제어하기 위한 ‘빗장과 문’을 정비하고 점검하는 업무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거기에는 회사의 수익과 매뉴얼과 자신의 조직 내 입장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거대한 파도를 여기서 막으라’고 말하는 ‘보초의 업무’를 자신에게 부과된 소명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경계를 지키는’ 것을 본무로 삼는 사람을 ‘문’ 가까이에 배치해야 하는 인류학적 ‘상식’을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잊고 말았다.
전쟁도 테러도 기아도 공황도 없는 윤택하고 안전한 생활이 반세기 계속되었을 뿐인데 일본인은 그런 상식을 잊고 말았다. 우리가 사는 좁고 부서지기 쉬운 세계는 ‘경계를 지키는 자’들이 묵묵히 꾸준하고 헌신적인 노력을 들여 간신히 지탱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경계선을 지키는 보초의 행동에는 정형적인 매뉴얼도 가이드라인도 없다. 보초의 자질에 관한 일반론은 있지만(신화와 공포 이야기로 반복적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침입이 어떠한 형태일지 우리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보초들에게는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모를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센서를 갈고 닦기 위해서 경험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인류는 그러한 방법을 연마하고 체계화하려고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종교의 수행과 무도의 수련은 본디 그것을 위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 센서가 제대로 기능하는 사람이 있다.
9・11 테러 때 ‘왠지 바깥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서’ 건물 밖으로 나가 재난을 피한 사람이 있었다. 그날만 ‘평소와는 다른 행동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누군가 통계를 내서 그 사람들이 어떤 공통된 ‘삶의 양식’을 취했는지 음미하는 것은 흥미로운 연구 주제지만 아마도 ‘비과학적’이라고 일축될 것이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안다’는 것은 진실이다.
지난번에 이런 기사를 읽었다. 오사카와 교토의 경찰청 수사관이 광역사건 회의를 할 때 교토 경찰청 형사가 ‘이런 사건도 있다’며 어느 빈집털이 사건 용의자 사진을 오사카 형사에게 보여 주었다. 회의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간 지 10분 만에 오사카 경찰청 형사가 가까운 경륜경기장 근처에서 용의자를 발견한다.
이 수사관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지명수배범을 찾아내는 전문가였다고 한다.
그는 경찰관의 시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내보내는 미세한 낌새를 감지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의심스러운 움직임’이란 체크리스트를 들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대조해 점수가 높은 사람을 찾아내고 판단하는 작업이 아니다. 몇백 명 속에 숨어들어도 작은 눈짓이나 발걸음만으로 평범하지 않은 인간만 골라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경찰관이 되어야 한다.
경찰이라는 제도는 본디 그런 인간의 능력을 감안해서 설계되어 있다.
우리는 형사 드라마를 볼 때 형사들이 거리에서 너무나 쉽게 거동이 수상한 용의자와 마주치는 것을 편의주의라고 비웃는데 경찰 조사는 원래 그렇다.
그런데 거동이 수상한 인간을 감지하는 능력과 거짓말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직감적으로 식별하는 능력은 그 유무와 옳고 그름을 눈에 보이는 증거로 제시할 수 없다. 원래 경찰관을 채용할 때는 그런 ‘증거를 들이댈 수 없는 능력’의 유무를 기준으로 채용 여부를 결정해야 하지만, 증명하지 못할 능력의 유무를 판정하는 증거가 (당연하게도)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공무원 채용 규정으로는 이를 적용하지 못한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의 질이 떨어졌다.
무고한 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법 시스템이 거짓말하는 인간과 진실을 말하는 인간을 직감적으로 식별할 능력을 갖출 사법관이 일정 수 존재한다는 전제로 제도가 설계됐기 때문이 아닐까.
‘재판관의 심증형성’이라는 희한한 법률 용어가 있다. 재판관이 ‘복수의 해석 중 어떤 해석을 우선으로 채택하고 싶어지는 기분’을 의미한다. ‘기분’에 법률적인 힘이 인정되는 까닭은 사법계에서는 사법관(중 적어도 일부)에게 증언의 진위를 직감적으로 판정하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능력을 겸비한 사람이 일정 수 존재한다는 전제로 만든 제도가 그런 능력이 전혀 없는 인간들로 운용되는 탓에 억울한 사건이 일어난다.
셜록 홈스의 모델이 된 에든버러대학 의학부 교수 조지프 벨은 환자를 한 번만 보고도 출신지, 직업, 질병력을 맞추었다. 그런 의사는 전설적인 예외가 아니라 실제 의료인 중에 제법 많지 않을까. 그래서 의사 중 일부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고 의료제도가 설계되었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교사에게 정말로 필요한 자질은 주위의 누구도(본인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아이들의 ‘감추어진 재능’을 감지하고, 재능이 꽃 필 때까지 긴 시간을 끈기 있게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이다.
사법과 의료와 교육은 사회적 공통자본 중에서 ‘제도자본’으로 범주화된다. 이러한 제도는 모두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인간의 잠재능력을 계산에 넣고 설계된 제도이다.
사법관, 의사, 교사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의 최전방에 있는 ‘보초’의 일족이기 때문이다. (← 감동적인 대목에 산통을 깨서 죄송하지만, 여기 오타 있더라구요. 제가 아는 한, 하필이면 여기 한군데 있는 것 같더라구요. 유유출판사 관계자 분 계시다면 참조 부탁드립니다. 이 책, 정말 잘 출간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 말씀 한마디 드리고 싶었어요. - 인용자)
인간 세계 내부에서는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
‘세계의 내부’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것의 최전방’에서는 그 규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그곳이 ‘존재할 리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형태를 바꾸는 생성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리에 어떻게 ‘보초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을 배치할 수 있을까?
젊은이 가운데 그 같은 ‘보초적 자질’을 갖춘 이들을 어떻게 찾아내서 능력 개발을 지원할 것인가.
이것은 원리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다.
(2011-08-07)
ー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224~233쪽.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
역사란 ‘사건’의 연결을 서술한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역(歷)’의 옛 뜻은 ‘군행(軍行)에서 경력을 쌓는 것 또는 그 공력(功歷)’이다. 아주 함축적인 어원이다.
무공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혁혁한 무훈’ 같은 화려한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데 무공이란 그런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진정한 무공은 오히려 그렇지 않다.
러일전쟁 때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도고 헤이하치로를 발탁한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메이지 천황에게 “도고는 운이 좋은 남자”라고 아뢰었다고 한다. 도고는 영국과 사쓰마 번 전쟁 때 두각을 드러낸 군인인데 야마모토는 그의 군력에 대한 최상급의 평가로 ‘운이 좋다’는 형용사를 골랐다. ‘용맹 과감’이나 ‘군사를 부리는 재주가 있다’가 아니라 ‘운이 좋다’는 말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야마모토가 전장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약한 군대를 이끌 때는 강적을 만나지 않고 강한 군대를 이끌 때만 약한 적을 만난다. ‘칼을 내려쳤더니 거기에 적이 목을 내미는’ 경우를 무도에서는 ‘선수’라고 말한다.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운이 좋은 남자’라는 말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도고는 수를 읽을 줄 아는 남자’라는 평가로 바꿀 수 있다.
도고는 젊을 때부터 자신의 주위에 문제가 잘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길을 걸을 때 말의 재갈을 쥔 마도위의 모습을 보고 도로 반대로 이동한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국군인이나 되는 주제에 말이 무서워 길을 피한 겁쟁이”라고 동료가 비난하자 도고는 “얌전하게 보이는 말이 갑자기 발광하는 경우도 있다. 자칫 말에 차여서 본 업무에 지장이 생기면 그것이야말로 제국군인의 본무를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쿨한 얼굴로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된 일화인데 도고의 위기 센서가 성능이 좋다는 것을 엿보게 해 준다.
오랫동안 무도를 수련하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위험 전조 알림이 있어서 상황에 따라 알람이 울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어쨌든 알람이 울린다. 그때 어떤 자세를 취하거나 어떤 방향으로 신체를 틀거나 가던 길을 바꾸면 알람 음량이 줄어든다. 그래서 알람 음량이 줄어들도록 신체의 운용을 변화시킨다. 체술(體術)에서든 무기를 사용하는 수련에서든 상대가 타이밍을 뺐고 기술을 걸어 올 때는 알람이 격하게 울린다. 그 소리가 줄어들도록 신체를 사용한다. 기술이 훌륭하게 성공하면 귀청이 떨어질 것 같던 소리가 단번에 잦아든다.
물론 ‘알람 소리’는 비유로 실제로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뿐이다. 아마도 말에 가까이 갔을 때 도고에게도 알람이 울렸을 것이다. 방향을 바꾸니까 소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걸어간 것이다. 그저 그런 일이 무의식중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막부 말기와 보신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은 ‘군공’에 넣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것을 나는 진정한 ‘실증성’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무사한 사람’ 도고는 발틱 함대를 전멸시켰다.
요시쓰네와 벤케이 일행이 수행하는 승려로 변장하고 도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관문지기인 도가시 일당이 아타카 해안에서 교토에서 오슈로 가는 승려를 검문한다. 관문 앞에서 곤경에 처한 벤케이는 완력으로 그들을 제압하자는 의견을 누르고 가짜 권화장을 읽으며 진짜 수행자인 척 거짓말을 밀고 나가 위기를 벗어난다.
벤케이의 지략으로 아타카에서 ‘일어났어야 마땅할 일’(도가시 일당과 요시쓰네 일행의 전투)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지 두루마리를 가짜 권화장처럼 꾸며서 거침없이 읽은 벤케이의 ‘없어야 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재주와 ‘일어났어야 마땅할 일’은 구조적으로 쌍을 이룬다. 아타카 이야기가 벤케이의 예외적인 무훈으로 천 년에 걸쳐 전해져 내려오는 이유는 ‘없어야 마땅한 것을 존재케 함으로 있어야 마땅한 일을 없앴다’는 정밀한 구조 안에서 옛 선현들이 무공의 최고 형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만약 역사를 움직이는 정말로 큰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건으로 형태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거대한 인간적 노력, 가장 정밀한 인간적 교지는 ‘일어날 수 있었던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형태로 달성되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일어난 사태를 연결지어서 인과관계로 서술하는’ 형식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런 형식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일어나지 않은 사태’로 역사의 흐름이 규정되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는 것에 있다.
물론 ‘일어나지 않았던 사태의 역사’는 학술적으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왜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그와 다른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일어난 사태’를 계속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헤아리는 것과 똑같이 (때에 따라서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지적 행위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증거’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받는다. 나는 앞에서 ‘알람’이라고 썼는데 당연히 그 논리에 ‘증거’는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알람’은 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위험 감지 센서가 실제로 작동하지 않으면 무도 수련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확실하다. 내가 ‘알람’이라고 부르는 것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계량할 계측기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다.
19세기 말에 드미트리 이바놉스키가 세균 여과기를 통과시켜도 감염력을 잃지 않는 병원체를 발견하여 ‘바이러스’ 가설을 세웠을 때 ‘바이러스’는 아직 어떠한 계측기기나 인간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었다.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 문제와 ‘계측기기로 실측이 가능한지’라는 기술 문제는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다. 그래서 ‘계측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론은 논리적으로 틀렸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현장에 센서 감도가 좋은 사람이 있었다면 이토록 심각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두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징후를 감지한 사람이 있으면 ‘알람 소리가 멈출 때까지’ 설계를 변경하거나 관리 시스템을 바꾸거나 작업 정지 명령을 내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지진과 쓰나미 뒤에도 원자력 발전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아무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본인조차도).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공적을 칭송하는 사람이 없는 영웅’들의 무언의 헌신으로 간신히 지금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도대체 누구를 향해서 하면 되는지 그것을 모르겠다.
(2011-05-02)
ー 같은 책, 351~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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