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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rade Ogilvy, who had never existed in the present, now existed in the past". - 에릭 아서 블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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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료인으로서 살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4. 3. 11:35

    도쿄 보험의협회라는 곳에서 기고를 요청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일본 의료계에서 특정 세대가 후기 고령자에 이르는 올해를 ‘2025년 문제’로 다룬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1950년에 태어난 필자도 올해 가을에는 75세 생일을 맞이하는바, 공식적으로 후기고령자 대열에 합류한다. 신체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하고, 병원에 다니는 빈도도 늘었다. 필자가 발생시키는 소위 ‘급증하는 의료비’는 젊은 일본 국민들에게 문제를 안겨주는 원흉 가운데 하나가 된 셈이다. ‘노인은 집단 자진하라’고 공언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미디어가 띄워주는 현상을 보자니, 필자 같은 노인은 앞으로 ‘오래 살아서 미안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소위 ‘천수’란 것이라서, 자기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젊은 동포에게 폐스럽고 싶지는 않으나, 당분간은 세상에 걱정을 좀 끼치게 될 듯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국내외의 향방과 관련해, 한 마디 전망을 읊어볼까 한다.

    (* 일본의 보건의료계 용어. 한국에서는 나중에 조금 순화, 구체화된 ‘사전연명’ 운운으로 적용된 형세 – 옮긴이)

     

     

    오래 살면서 알게 된 한 가지는, 역사는 외길을 나아가는 게 아니라, 하늘거리며 더치 롤(8자 횡행 - 역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든지 국운이 성할 때도 있고, 잘 안될 때도 있다. 사람들이 인정 많고 도의적인 때도 있으며, 비도한 도배들이 위세를 떨치는 때도 있다. 하지만, 완전한 무목적성을 띠며 역사가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3보 나갔다가, 2보 반 물러나는’ 정도의 느린 페이스이기는 하되, 인류는 조금씩 ‘미덥게’ 되어가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렇게 말했다가는 ‘그렇지 않아. 인류는 점점 열화하고 있어’ 하고 허무적인 말을 읊조리는 사람이 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지금 노예제나 인종 차별, 고문을 합법으로 간주하는 유엔 가입 국가는 없다. 물론, 실제로는 그와 비슷한 것이 지하에서 행해지고는 있으나, 정부가 공공연히 행하는 일은 사라졌다. 미군은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에서 이라크 전쟁 포로에게 잔혹한 고문을 행했는데, 이는 관타나모 기지가 미국과 쿠바 그 어느 나라의 법률도 미치지 않는 일종의 진공 지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어쨌든 고문을 가하는 측에게도 ‘지금 내가 하는 건 법률 위반 행위이다’ 하는 수오지심 (같은 것) 은 있는 셈이다.

     

    우크라이나라든지 가자지구에서는 무도한 국제법 위반이 행해지고 있기는 하나, 위반의 당사자들이 강변하기를 ‘국제법 위반은 우리가 아닌 적국이 하고 있다’ 한다. ‘국제법에 저촉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겉치레*만은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런 점이 100년 전과는 많이 다르다. ‘반 걸음 정도는 전진하고 있다’고 필자가 말하는 건 그런 의미다.

    (* 다테마에. ‘혼네’의 짝꿍 – 역주)

     

    현재 미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을 타박하는 엄청난 백래시가 시작되고 있는데, 민주주의나 정치적 관용, 다양성・공정성에 대한 고려나 소수자의 사회적 포섭에 관하여, 이정도로 격렬한, 상궤를 벗어날 정도의 공격이 벌어지고 있는 형세를 잘 살펴보면, 근대 시민 사회가 조금씩 육성해 왔던 그런 가치가, 대통령이 의회의 의결 없이 대통령령을 남발하지 않고서는 부정이 안될 정도로 미국 사회 가운데 그러한 가치관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인식을 갖고 보면, ‘조금씩 미더워지고 있다’고 내다보는 건 결코 그릇된 시각이 아니리라.

     

     

    필자가 사귀는 젊은 벗은 “오늘날 일본이 1930년대 일본과 다를 게 거의 없다”며 개탄하기는 하지만, 1930년대 일본에는 치안유지법이 있었고, 특별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부 상위에 통수권으로 무장한 군대라는 무력 장치가 있었다. 그 시대에 살았었다면, 필자는 아마 한참 전에 집필할 공론장을 잃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정부적인 언동이 문제시되어 체포 및 투옥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은 시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정부를 아무리 비판하더라도, 혹은 사회를 흐리는 사이비 집단을 놓고 단호한 언동을 줄기차게 하더라도, 집까지 찾아와서 필자에게 ‘발언하지 말라’며 해코지하는 사람은 없다. 필자의 이름이고 주소고 이메일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맘먹고 필자에게 폭력을 행사해 입을 틀어막으려 들려고만 하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다. 허나,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안 찾아왔다.

     

    SNS 상에서 필자가 한 발언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논란이 종종 일어났음을 지인들이 알려주는데, 필자는 나 자신에 대해 미주알고주알하는 걸 읽지 않으므로, 온갖 비방중상을 듣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충격이 없다. 이렇듯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언론의 자유’는 1945년 이전보다 너무나 확실히 보호받고 있음을 필자는 실감한다.

     

    이만큼 유복하게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니만큼, 언론이 지난 시절보다 위축되었다손 친다면, 그건 제도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자질 탓이지 않겠는가. 용기가 없다든가, 긍지가 없다든가 하는 건, 제도 때문이 아니다. 그 사람 마음가짐의 문제다.

     

     

    ‘제도는 바꿀 수 있으나, 인간은 바꿀 수 없다’는 명제가 있다. 여기에는 일리가 있다. 한편,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인간은 순식간에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명제 또한 마찬가지로 참이다.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인간을 사출성형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시간이 걸리지만, 불과 한 마디가 그 사람 연래의 ‘결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 원문은 呪縛 주박. 서수(瑞穂) 부화(浮畵)에 부지기수로 등장하는 소재인지라 한국 일각에서도 심심찮게 쓰이는 말인 줄 아오나, 오늘날 괴괴한 풍문이 장안에 파다한 지경에 이르러서까지 ‘주박’을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풍조가 불러일으킨 폐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호, 어찌 해동의 사대부 되어 마땅히 괴력난신을 배격함과 동시에 문체를 바로 세우지 않을 수 없겠사오리까? - 옮긴이)

     

    필자는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므로, 제도를 바꿀만한 여유가 없다. 그보다는 ‘인간 바꾸기’를 목표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찬스가 있을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단 아직은 가소성이 있는 젊은 사람들한테 대고서, ‘용기를 가지시오’라든가 ‘정직하게 삽시다’, ‘남들에게 친절하게’ 하는 식으로, 초등학교 학급 목표로 걸어둘 말을 일삼아 꺼내고는 한다. 너무나 유치한 목표처럼 보이겠지만, 이래봬도 이제껏 연구자와 무도가를 해 왔던 필자의 숨김 없는 실감인 것이다.

     

    연구자는 무릇 고립을 염려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세웠던 가설의 반증 사례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비전문가라도 이해할 수 있게끔 정성스레 자설을 설명하는 데서부터 외려 연구에서 얻어진 지견은 현실에 생동한다.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홀로서기에 개의치 않는 용기, 스스로 말했던 게 ‘이상하다’ 싶으면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하고 정정할 수 있는 정직함, 그리고 이성과 감성을 고려한 친절심,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연구자로서의 자질이 충분치 못하다.

     

    무도가로서의 경험 역시 똑같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다른 점은 ‘정직’해야 할 상대가 ‘자신의 신체’라는 것뿐이다. 자신의 신체가 아주 조그마한 위화감을 느꼈다거나 힘이 들어갔다거나, 혹은 뻣뻣함이나 힘풀림을 느낀다면 그것을 정직하게 시인하고, 그 자리에서 고쳐먹는다. 무도적으로 솜씨가 는다는 것은 (원문 上達 - 옮긴이), 신체적 위화를 감지하는 센서의 정밀도가 향상된다는 의미이다. 충분히 정밀도가 높아지면, 자신이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 해야 할 소업’이 무엇인가를, 상당히 정확히 예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마 ‘위험 신호’가 울릴 상황을 마주치는 일 없는 (seamless 하게 - 역주) 나날을 보낼 수 있을 터이다.

     

     

    용기, 정직, 친절 가운데 어느 덕목이 가장 중요할까? 아마 ‘정직’일 것이다. 스스로 살아갈 지혜와 힘이 무럭무럭 발동하는 데 매진하는 것. 그것이 용기와 친절에 동기를 주기도 한다. 용기를 가지는 게 기분이 좋거니와, 친절하게 구는 게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는 실감에 한 점 흐림*이 없는 것, 그것이 정직이라는 것이다.

    (* 원문 濁り: 불교에서 유래한 일본어로 본래 뜻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사념” – 옮긴이)

     

    어째선지 무샤노고지 사네미쓰(1885~1976. - 옮긴이)가 만년에 푸념하던 것처럼 되어버렸는데, 오래 살다 보면 한 바퀴 빙 돌아 초등학교 시절이나 매한가지인 말을 꺼내고 싶어지나보다. 그래도 이런 가르침은 단순할지언정, 오래 살아남았으니만큼 진진한 맛이 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다. 기고 의뢰의 취지는 ‘의료계가 지향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정부의 미흡한 의료분야 정책’ 등에 관해 논해달라고 했었다. 기억이 났다. ‘역사는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 걸음 나갔다가 두 걸음 반 물러나는’ 그런 발걸음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점은 의료 분야 관련해서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려던 차에, 이야기가 곁길로 샌 것이다.

     

    의료계의 문제를 5년 혹은 10년 되는 ‘스팬’으로 고려하면, 혹여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견해도 제기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50, 100년 스팬으로 보면, 의료 테크놀로지도, 의료 시스템도, 분명히 성숙했으며, 향상되었거니와, 의료의 진보로 말미암은 수익자의 수는 극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다지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일례를 들면, 이러저러한 업계에서 일손이 충분치 못하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음에도, 의료 분야만 놓고 보면, ‘의사가 되고 싶다, 간호사가 되고 싶다’ 하는 젊은 사람의 수는 계속 늘고 있다. 이는 예외적인 현상이다. 학생들의 모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 전문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의 수는 줄지 않는 셈이다. AI 도입에 따라 인간이 필요 없게 되는 직종이 무엇이냐 하는 게 곧잘 얘깃거리가 되고는 있으나, 간호와 요양(케어. 일본어 介護 - 역주) 분야의 경우 ‘늘어날 전망은 있어도 줄어드는 일은 없다’는 조사결과를 몇년 전에 미국 정부 기관이 발표했다. 그만큼 학생들을 ‘끌리게 하는 마력’이 의료에는 있다, 하는 의미이다.

     

     

    의료의 기본원리는 (뜬금없이 여러분께 설할 것까지도 없지마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보듯 ‘환자가 자유인이어도 혹은 노예여도, 그 진료 내용을 바꾸어서는 아니 된다’는 문구에 응축되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의료 행위는 상품이 아니다. 따라서, 환자의 속성에 따라 베푸는 의료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히포크라테스가 그렇게 말했던 건, 그야말로 그리스의 의성(醫聖)이 활약하던 시대조차도, ‘상대방의 재력에 따라 차별적인 의료 행위를 행한 의사’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현실에 순응했다면, 의학의 진보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일찌감치 그리 직감했었기에 그러한 선서를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의료가 상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의사 입장에서 가장 기민한 삶의 태도란 왕후장상에게 속한 ‘시의(侍醫)’가 되는 게 제일이다. 의료는 부유하고 권력 있는 인간에게만 한정적으로 배풀어져야 한다는 원리로 의학의 역사가 추이(推移)하였다면, 값싸고 처방이 용이한 약제의 발견이라든가, 다수의 환자를 단시간에 모니터할 수 있는 시약이나 기자재의 개발이라든가,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의료를 받을 수 있는 보험 제도의 정비 등은 행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류는 이날 이때까지 의료에 관하여서는 태고의 암흑 속에서 분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달성하기 곤란한 목표를 내걸음으로써, 인류는 이제까지 걸어왔다. 허다한 분야가 그러하다. 의료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의사 여러분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애석해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탄함이 옳다. 그러나, 그러한 탄식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태()’가 되는 한숨인 것이다.

     

    이러한 전차로 이야기는 착지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모 의대의 이사를 맡고 있다 하는 사정이 있어서, 매년 입학식에 ‘의료인으로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짧게 강의하는 시간을 가진다. 올해는 위와 같은 말을 하렷다.

     

    (2025-03-19 10:3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커먼의 재생』 『무도적 사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 옮긴이: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만, 일본 의대에 입학하려는 일본 학생들이 잇따르고 있다는 소식 말인데요, 이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한국 입시계의 소위 ‘메디컬’ 운운과는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일본 사회경제적 발전단계의 상이점을 양지해두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데미안’ 오구치 이사장의 말: “우치다 군,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해서 뭘 하려고 해?” 또한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 진로의 의미는 사후에나 알 수 있는 법입니다.

    파라메딕 비슷한 배경을 지닌 탓에 이것저것 보고 들은 제가 충심으로 말씀드리건대, 정말 맞는 말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의료는 인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몇 번이고 소리 높여 말하겠습니다. 만약 이런 교훈을 소홀히 한다면, 지난 3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났던 극심한 사회적 혼란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요?)


    我想:希望是本无所谓有,无所谓无的。这正如地上的路;其实地上本没有路,走的人多了,也便成了路。

      一九二一年一月。 (루쉰)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 미야자키 하야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 김대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꿀 수 있는 요소다. 유전자와 소득은 임의로 선택할 수 없지만 생활습관은 그렇지 않다. 마음먹으면 스스로 바꿀 수 있다.

     

    병원과 의사는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부러진 뼈를 붙이고 상처를 꿰매고 감염을 막고 적절한 약을 처방함으로써 병을 낫게 해줄 뿐이다. 병이 없다고 해서 건강한 것은 아니다. 건강은 질병에 걸리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바를 모색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지닌 상태를 의미한다. 의사가 제공하는 약과 처치와 조언은 건강해지려는 의지를 품고 노력하는 사람한테만 도움이 된다. 의료기술의 발전과 나의 건강 사이에는 직접 연관관계가 없다. 정부도 그렇다. 더 강력하고 폭넓은 공중보건 정책을 펴면서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지도록 시민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건강증진정책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해지려는 의지가 없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나고 대형병원 응급실이 문을 닫아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가야 한다.” - 유 아무개 前 후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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