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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신판 영화의 구조분석』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3. 27. 10:33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신판 영화의 구조분석』을 집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머리말'만큼이라도 읽어주세요. 금방 끝납니다.
이 책의 원형이 되는 건, 2003년에 쇼분샤에서 출판되었던 영화론입니다(이제 20년도 더 된 일이군요). 그것이 제 3장까지입니다. 제 4장부터는, 그 이후에 제가 썼던 글들 가운데서 편집자인 안도 아키라 씨가 골라준 영화론입니다. 개중 몇몇은 영화 개봉 때 공식 팸플릿에 게재된 것(『하나레이 베이』, 『괴물 2023』, 『연극1』, 『연극2』 등. / 일본 영화관 소책자는 거의 티켓값 만합니다. - 옮긴이), 몇몇은 다른 매체에 기고된 것입니다(원문 商業誌に; 영화론을 자비출판 및 논문으로 쓰신 적이 있음 - 옮긴이). 제가 과거 20년 동안 썼던 영화론 가운데 중요하다 싶은 것들은 거의 전부 망라되어 있습니다. 안도 씨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교정쇄를 통독하고서 떠오른 게 있는데, 영화에 대해 쓸 적에는 그밖의 주제에 대해 쓸 때와 비교해 문체가 많이 다르더군요.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문체적으로 달뜨게 되는 겁니다.
영화론의 독자는 모두 이 영화를 이미 봤든가, 앞으로 볼 예정이란 게 전제되어 있으므로, 약간 기대감을 갖고 있는 독자를 상정해서 쓸 수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러기가 힘듭니다. 길 가는 사람의 소맷부리를 붙잡고서, '저기 잠시만요. 제 얘기좀 들어주시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간청하는... 그런 서술 방식을 채용하거든요. 백지에서 시작하여, 정성스레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론의 경우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앞머리를 잘라먹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영화사적 온축*을 몽땅 내보인대도, 절도를 잃고 개인적 호오를 열띠게 주장한대도, 망상적인 해석을 끝없이 폭주시킨대도, 결론을 내지 않고서 갑자기 얘기를 끝낸대도, '이딴 영화론이 다 있냐' 하고 성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화론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아무도 학술적 엄밀성 따위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 '온축'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운영전」에서도 쓰였다 하네요. 원문 蘊蓄を傾ける는 일본어 숙어. - 옮긴이)
애초에 이 책 전반부를 아예 '영화론이 아니라, 영화론을 빙자한 현대사상 입문이올시다' 하고 참칭하여 영화론을 전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통하는 건 결국 영화론이라는 건 어떤 형태를 취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얘기입니다.
누가 그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까이에 뒤 시네마』 같은 스타일도 좋고, 『에이가 히호』 같은 방식도 좋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같이 써도 좋고, 미우라 준 같이 써도 됩니다. 진실로 자유로운 영역인 것입니다. 이러한 나머지, 제 흥도 덩달아 올라가 버렸지 뭡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온갖 예술 작품은, 그에 대해 논하는 담론도 역시 포함함으로써 '작품'으로써 성립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작품에 일종의 '부가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창조에 (간접적인 방식이기는 합니다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술 비평이라든가 문예 비평이라는 분야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예술 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영화는 비평이 점하는 비중이 높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든가, 유화를 그리는 등의 예술 창조의 경우에는, 단일한 '오서(author)'*가 있어서, 확실히 전체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가 옆에서 이래저래 작품 제작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이지요. 소설을 쓸 때 옆에서 다른 사람이 시끄럽게 '여기는 이렇게 쓰면 되잖아' 같은 소리를 하는 걸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 우치다 선생님은 다른 곳에서 '오서'를, 음모론의 장본인이라는 식으로도 설명하심 - 옮긴이)
하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터무니없는 수의 사람이 영화 단 하나를 제작하는 데 관여하고 있습니다. 크레딧에는 (원문 '엔드 마크 뒤에는' - 옮긴이) 실로 다양한 사람이 (케이터링 관계자부터 회계사까지) 열거되어 있습니다 (많이 지루하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이렇게 집요하리만치 '관계자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영화가 단일한 '오서'에서 비롯된 작품이 아니라는 단호한 의사표시인 것입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영화 제작자'로서 이 영화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집단적 창조라는 점에서는 영화에 필적할 장르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를 논하는 사람들 또한, 영화의 창조에 (사후적이라고는 하지만) 참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엔딩 크레딧 가장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이 영화를 주제로 얘기를 해 준 모든 사람' 이라는 한 줄이 들어가면 참 근사하겠다, 고 저는 생각합니다.
(2025-02-26 09:3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저 『커먼의 재생』, 『무도적 사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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