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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rade Ogilvy, who had never existed in the present, now existed in the past". - 에릭 아서 블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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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도적 사고』 한국어판 서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3. 23. 12:33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이 책은 『무도적 사고』라고 해서 제 저작의 한국어판입니다. 원저는 2010년에 나왔으므로, 15년 전 책을 선보이게 된 셈입니다.

     

    다행히도, 무도에 관한 원리적인 지견을 남겨둔 것이므로 시사성이라든지 속보성과는 무연*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제부터 접하실 주제는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시대에 뒤처진' 책이 될 일은 없는 것입니다.

    (* 無縁: 불교 용어. 한때 일본에서 '무연 사회'가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다. - 옮긴이)

     

     

    제가 생각하는 '무도적 사고'라는 것은 동양의 고유한 사고방식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에 국한되지 않고서, 한국이 되었든 중국이 되었든, 어쩌면 베트남이나 태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인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다소의 지역적인 차이를 수반할지언정), 각국 문화의 심층에 확실히 복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분이라도 한번 읽어보시면 '뭔진 모르겠지만, 이해가 간다' 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아마 이런 개념을 '무도적 사고'라는 식으로 제시하는 사람이 이제까지 없었던 것뿐입니다. (한국의 무도계를 제가 잘 아는 건 아닙니다. 허나 제 책이 이번에 번역된다 함은 이제까지 이 분야에서 유례가 없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하리라 추찰해 봅니다.)

     

    제 스스로, 오랫동안 '무도적 사고'는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결국 '아시아적 사고' 에 속하는 하나의 상(相; aspect - 역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서문에서는 이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다소 길어진 점을 용서하십시오.

     

     

    아시아와 유럽(여기에는 미국도 포함시키기로 합시다)이 갖고 있는 인간관의 명백한 차이점은,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있다고 봅니다.

     

    정체성(identity)은 유럽 철학의 핵심에 있는 개념입니다. '진정한 자신', '더 바뀔 데가 없는 궁극적인 자신'을 이릅니다.

     

    유럽적인 인간관에 따르면, 일상을 사는 인간은 '진정한 자신'이 아닙니다. '거짓된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가정 환경, 학교 교육, 지배적인 정치 이념 등 뭐가 되었든 간에, 이렇듯 다양한 억단(doxa. 플라톤이 제창 - 옮긴이)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눈이 가려져 있고, 사고와 감정이 비틀려 있으며,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반성적으로 살게 되면 인간은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에 들러붙어 있는, 내면에서 기원하지 않은 모든 협잡물을 씻어내고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토록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유럽적인 '정체성의 철학'이 품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 철학의 대표주자로 독일의 하이데거가 있습니다.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취임 연설에서 하이데거는, 독일 대학인에게 부여된 사명이 '우리 자신이 애초에 되어야 할 존재가 스스로 되는 것'이라고 언명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애초에 되어야 할 존재가 스스로 되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만, 짧게 말해서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선구적・직관적으로 멍하게나마 알고 있으나, 다양한 장애로 말미암아, 아직 '진정한 자신'이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온 힘을 다해 일생을 걸어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럽 사상계에서 이러한 발상이 전면적으로 부정된 적은 아직 없는 줄 압니다. 맑스주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가속주의 등등... 사상으로서의 모습은 제각기 달라져도 '억단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온다', '환상에서 벗어난다', '잠에서 깨어난다' 하는 식의 유사한 메타포가 항상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감옥에서 빠져나온다든지, 잠을 깨고 일어난 사람은 '진정한 자신'이 되어 삶의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빨간 알약을 고른 뒤 '매트릭스'에 조종당하는 꿈에서 깨어난 주인공 네오가, 척박한 현실 세상과 마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진정한 자신'의 가장 전형적인 표상입니다. (좀 많이 단순화시키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나 아시아적 인간관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시아에서는 인간의 성장이 '자기 찾기'가 아닌 '자기를 버리는'것을 통해 달성된다는 사고방식이 오랫동안 주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계속 변합니다. 따라서, 어떤 계기로 '진정한 자신'과 만남에 따라 '자기 찾기 여행'이 끝나는 일은 없습니다. 여정은 언제까지나 이어집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은 영원히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하의 아몽'이라는 이야기를 알고 계신지요? 『삼국지』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한국 젊은이들이 얼마나 삼국지 이야기에 익숙한지 저로서는 상상이 안 갑니다만, 일본에서는 곧잘 읽히는 중국 고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기에 보면 오나라의 훈신 되는 여몽 장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군은 대단히 용맹한 무인이었지만 동시에 무학이었습니다. 오나라 왕 손권이 '만일 그대에게 학식이 있었더라면...' 하고 탄식한 데에 분발하여, 여몽 장군은 그때부터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좀 지나고 나서 동료 노숙이 장군을 찾았을 때, 여몽 장군이 지닌 학식의 깊이에 경탄한 나머지 '이제는 예전처럼 무용을 뽐내기만 했던 「오하의 아몽」이 아니도다'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에 '아'자를 붙이는 것은 친밀함을 담아 부르는 방식으로 '몽이' 비슷한 어감입니다). 이에 응수하는 여몽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비와 헤어지고 사흘 되면 모름지기 눈을 다시금 비비고서 마주해야 하는 법이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인간은 3일 동안 만나지 않으면 그새 딴사람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사람과 대면할 때에는 눈을 크게 뜨고서 보지 않을 수 없다, 전에 만났을 때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여기면 아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학교 선생님 가운데 때때로 이와 같은 고사를 대는 축이 있었습니다.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어른들은 곧잘 언급하곤 했습니다. 그릇이 큰 인간은 성장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그리 경솔히 남을 평가해서는 아니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여기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인간은 계속 변화한다'는 아시아적 인간관입니다.

     

     

    제 철학 스승인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위에서 말한 유럽적인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할 존재가 되기 위한 여행'을 오디세이의 모험 여정에 빗댄 적이 있습니다.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이 있고 난 뒤 기나긴 모험 여행에서 다종다양한 '타자'와 조우합니다. 하지만, 이런 '타자'들은 오디세이에 의해 경험되고, 정복당하며, 소유당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외눈박이 거인과의 싸움도, 마녀 키르케와의 연정도, 세이렌의 노래도, 어떠한 모험이든 오디세우스의 정체성을 동요시키는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모험은 그가 고향인 이타카 섬으로 향하는 여정을 삽화적으로 꾸미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렇듯 '자기 자신으로 존속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자아에의 집착을 레비나스는 서양 형이상학이 지닌 일종의 '증후'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그것과는 다른 '여행'의 모습이 있을 것이라는 질문을 출발점으로 그의 철학체계를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진정한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라는 말이 참인가? 오히려 사람은 '자신이 자신 이외의 것이 되지 못하는 상태'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정형에 못 박혀 있는 상태'에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레비나스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제가 서른 살을 약간 넘겼을 무렵이었습니다), '정체성 탐구와는 성질이 다른 여행'이라는 이런 철학적 아이디어에 제가 무척이나 마음이 갔던 겁니다. 저는 그때 이미 다다 히로시 선생님 문하에서 아이키도 수행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났었음으로 '멘토의 지도를 받아서, 수행을 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감각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스승의 뒷모습을 좇으면서 무한 소실점으로서 상정된 목적(무도의 경우에는 '천하 무적')을 향해 한결같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자아에의 집착을 무도에서는 '이츠키(居着き)'라고 이릅니다. 길을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 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은 수행의 방해물이 될 뿐입니다.

     

    레비나스 철학도 또한 '자아에의 집착'은 '타자'와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논합니다.

     

    레비나스가 다루는 타자의 철학, 그리고 다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제게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느껴졌다'는 것 뿐이지, 두 분의 가르침이 어디가 '똑같다' 하는지를, 그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레비나스 철학도 거의 이해할 수 없었고, 아이키도도 이제 겨우겨우 뭔가를 터득해 나가는 단계였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올해로 아이키도 수련을 시작한 지 50년이 됩니다. 레비나스의 저서를 읽기 시작한지도 45년 정도 지났습니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으니만큼, 무도적 사고와 레비나스 철학이 어느 지점에서 통하는 데가 있는지를, 이제야 조금은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신'과 만나는 것을 목표로 '안쪽을 향하는' 삶의 방식이 있는 한편으로는, 자기가 자기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속박으로 느끼고서, 현재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려는 '바깥을 향해 나가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너무나 단순한 이항 대립 도식으로 환원시키는 건 원래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만큼 심플한 이야기서부터 시작해, 점점 복잡한 뉘앙스를 덧붙여 가는 게 독자 여러분에 대한 제 친절일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 『무도적 사고』는, 제가 아이키도 수행과 레비나스 철학 연구를 통해, '아시아적 인간관'이란 무엇인가를 암중모색하던 시기에 쓴 책입니다. 그러므로 주제가 통일되지 못하며, 여기에서 제시되는 지견 또한 단편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이 모여서 퍼즐이 맞춰지는 것과 같이, 이 책을 써나가며 제 안에서 차츰 '무도적 사고'의 윤곽이 만들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생성적인 과정을 독자 여러분도 함께 경험하신다면 저로서는 기쁘겠습니다.

     

     

    끝으로, 박동섭 선생을 비롯해 『무도적 사고』의 한국어 번역 출간에 힘써 주신 여러분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이 책이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어느 부분은 가깝고 또한 어느 부분은 먼지에 대해 그 원근감을 명료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2025년 2월

    우치다 다쓰루

     

    (2025-02-09 08:3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저 『커먼의 재생』, 『무도적 사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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