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옴진리교와 영적 스승 이야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4. 8. 10:08
옴진리교의 지하철 신경가스 살포 테러가 일어난 지 30년 지났다. 어느 방송국에서 이에 관한 특집을 제작하겠다 하여, 필자가 사는 고베까지 인터뷰하러 찾아왔다.
필자는 사건 몇 달 전, 큰 지진 피해가 닥쳤던지라, 살던 집을 잃고서 체육관에서 머물렀으며, 피해가 막심했던 재직 대학 토목 작업에 날마다 전념한 탓에 티브이는 물론이거니와 신문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따라서, 옴진리교 사건 보도를 접했건만 ‘연거푸 난리가 터지는구나. 말세로다’ 하는 정도의 막연한 반응밖에는 없었다. 다만, 옴진리교는 일본인의 종교적 미성숙이 낳은 산물이며, 일본 사회 그 자체를 배지(培地)로 하여 자라난 ‘귀태(鬼胎)’라는 점에는 확신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텔레비전이나 출판계 미디어에서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수차례 조명해 왔다. 내심 ‘미심쩍다’ 싶기는 했으되, 흥미본위의 소재였으니만큼 이용해 먹자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같이 뭘 좀 알만한 사람조차 아사하라를 희유의 종교가라고 진지하게 평가했던 것 역시 사람들의 판단을 흐렸다고 본다.
분명히 아사하라는 그만큼 흡인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접한 그의 용모와 발언으로 미루어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인간’임을 느꼈다.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것이 있다. 그 사람이 지닌 사상・신조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능력이라든지 사회적 지위와도 별개다. 다만, 그 사람한테 가까이 접근하면 내 ‘살아가는 지혜와 힘’이 쇠약해지는 그런 것만은 분명히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니 다가가야 바람직하다. 이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기준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는 사실은 필자가 어렸을 적에 부친이 가르쳐 주셨다. 전쟁을 겪은 아버지는 청춘기의 대부분을 중국 대륙에서 보냈다. 따라서, 일본 식민지 지배의 실상, 제국 군인들이 당시 조선반도나 중국대륙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인간이 때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며 비도(非道)한 짓을 벌인다는 점을 통감하리만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평화로운 전후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에게도 이것만큼은 가르쳐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아사하라 쇼코를 처음 딱 본 순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유형’임을 필자는 느꼈다. 모종의 카리스마성이 있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진폭’*이 컸던 것이다. ‘성속 혼효’라고 불러도 되겠다. 초인적인 수행을 쌓은 끝에, 어떤 종류의 특이한 종교적 경지를 체험했다는 (듯한) 요소와 동시에, 극히 속악한 물욕과 지배욕, 성욕 등이 떡칠된 그런 허물이 동일 인물 속에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모순을 우리는 ‘국량의 크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약점을 커밍아웃할 수 있는 종교인에 우리는 마음이 간다. 이는 신란이나 잇큐, 데구치 오니사부로에 이르기까지 공통되는 자질이다.
ー
(* 원문은 ‘신푸쿠’가 아닌, ‘후레 하바振れ幅’로 읽힘을 유의할 것. ‘幅(はば)が利く’라는 표현도 있다. - 옮긴이)
어떤 ‘장대함(원문 大きさ; magnificent - 옮긴이)’이 아사하라에게 있다는 점은 필자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까이하면 필자가 지닌 삶의 지혜와 힘을 감쇄시키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점도 동시에 알아챘다. 아사하라는 어쩌면 ‘너는 자기 머리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가 너를 대신해 생각해 줄 테니 말이다’ 하고 필자에게 말하는 셈이리라. 그러면 필자는 다양한 골칫거리에 따르는 스트레스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사고정지할 것을 요구받는다. 필자에게는 이제 그 이상의 지성적・감정적인 성숙을 자력으로 행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다행히도, 필자는 이십 대 때 무도 스승과 만난 바 있다. 스승은 필자에게 인격적인 귀의도, 사고정지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수행하는 것의 중요함을 가르쳐 주었을 따름이다. 덕분에 필자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홀딱 빠지는’ 유혹에 굴하지 않고서 이때껏 살아올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들을 했다.
(주간금요일 3월 5일)
(2025-03-19 10:4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커먼의 재생』 『무도적 사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고 서칭 하는 사람들 (0) 2025.04.15 공인과 도의성 (0) 2025.04.09 의료인으로서 살다 (0) 2025.04.03 야니스 바루파키스 『테크노퓨달리즘』 서평 (0) 2025.03.28 머리말 『신판 영화의 구조분석』 (0) 202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