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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다시 만난 세계인용 2025. 3. 22. 09:28
머리말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 책을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사지는 않았더라도 서점에서 이 머리말을 읽고 계신 분 또한 책을 사실 확률이 높을 테니까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자신감 있게 미리 감사를 드리냐고요? 왜냐하면 이 책은 이제까지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선택적으로 골라 쓴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별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니까 더 읽고 싶으시죠?
하아, ‘이제까지 별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것’입니다. 당연하겠지요.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자’든가 ‘인류의 역사는 끝장나도 상관없다’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견’이라고 논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런 것은 SF나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소재입니다.
또 하나는 ‘지나치게 상식적인 것’입니다.
평상시에 우리는 당연한 일에 대해선 굳이 말하지 않습니다. ‘불에 손을 대면 안 된다’든가 ‘배가 고플 때에는 영양을 공급해야 한다’ 같은 법률 조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굳이 다른 누군가가 지시하지 않아도 본인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일본 사회를 보고 있자면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일이라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너무나 오랫동안 거론해오지 않은 탓에 그것이 상식적인 일이라는 걸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뜨거운 스토브를 맨손으로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라든가 ‘배가 고프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해!’ 하는 것까지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때가 종종 있습니다. 진짜로요.
그래서 이 책은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일이기 때문에 ‘이제까지 별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지만, 이제 슬슬 누군가가 ‘그거 말이야, (비)상식이거든!’ 하고 딱 잘라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논제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얼마 전 네야가와(寝屋川)의 한 초등학교에서 폭력범이 침입해 교사 세 명을 살상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기억하고 계신지요? 이튿날엔 보호자 모임이 열렸습니다. 출석한 아버지 중 한 사람은 “학교도 교육위원회도 한마디 사죄를 하지 않았다. 나쁜 것은 범인이지만, 관리 책임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상식적’이지 않은가요?
아니, 교사가 세 사람이나 죽고 다쳤다고요. ‘위기관리’라는 말로 트집을 잡기 전에 온몸으로 자기 아이들을 지켜준 선생님들에게 통한과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니겠어요.
난카이(南海) 전철의 노선에 헬리콥터가 추락하여 몇 시간 동안 전철이 멈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어떻게 된 거야? 회사는 어떻게 책임을 질 거야?” 하고 의기양양하게 역무원에게 따지는 승객들 모습이 보도에 나왔지요.
선로 위에 헬리콥터가 추락한 것은 난카이 전철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막을 도리는 없어요. 이럴 때 하다못해 ‘할 수 있는 한 복구를 돕겠다’고 하는 것이 상식 있는 사회인의 태도일 것입니다. 역무원에게 따지고 든다고 복구 작업이 그만큼 진척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회보험청의 연금 불상사가 일어났을 때에도 똑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매스컴에서는 지식인들이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이래서는 젊은이들이 연금을 낼 마음이 없지 않겠는가?” 하고 평을 달았지요. 이 말에 “그럼, 연금은 이제 그만 내자”고 생각한 사람이 일본에 몇 십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과연 연금을 내는 사람이 줄어들면, 연금제도는 개선이 되는 걸까요? 결과는 상상할 것까지도 없겠지요. 하지만 현행 연금제도가 와해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무너져 내리려는 연금제도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매스컴은 ‘연금 불신’을 부채질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행태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짐작이 가시는지요?
그것은 ‘공적인 것’은 워낙 강고하기 때문에 아무리 비판해도 상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무자비하게 비판을 가함으로써 ‘공적인 것’은 점점 더 강고하고 효율적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낙관적 견해입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러한 ‘낙관’의 근거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런 사람들은 ‘공적인 시스템’을 책임지는 전문가가 어딘가 있어서 그 사람한테 개선책을 요구할 작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못을 박아두지만,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연금제도가 위태로워진 가장 큰 이유는 사회보험청의 공무원 자신이 “연금제도는 워낙 탄탄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돈을 꺼내 아무리 흥청망청 써버려도 괜찮을 거라 낙관했기 때문에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제도를 붕괴시킨 원인이 바로 이 ‘근거 없는 낙관’에 있는데 사람들은 오로지 비판의 말만 쏟아냄으로써 이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나 관공서, 혹은 기업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정당화시키는 건 “사람은 비판을 받으면 받을수록 노동 동기가 높아진다”는 ‘근거 없는 낙관’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그렇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에 한해서만 ‘나와 달리 비판받은 것을 계기로 행위의 동기가 높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대학 사무실로 집요하게 불만을 토로해오는 학부모가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불만을 토로하기에 직업이 뭔가 봤더니 고등학교 교사였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평상시에 학교에서 보호자들의 불평 때문에 고통을 당해왔겠지요. 이 사람은 이치에 맞지도 않는 불평을 해봤자 교육제도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속 깊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점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도 불평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 ‘분풀이’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이는 ‘비판을 당함으로써 제도개선의 의욕이 솟아오르는 사람(본 적은 없지만)’이 시스템 내부에는 분명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시스템 내부까지 침투한 징후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을 더듬어보면 아시겠지만,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스템을 기능 마비로 몰아넣는 것은 ‘제대로 일을 해주는 사람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입니다.
“누군가 잘 알아서 시스템을 관리해줄 것이다(그러니까 나는 안 해도 된다)” 하는 주인의식의 결여가 ‘낙관’을 불러오고, 그것이 시스템의 구조적인 파탄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주인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제도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불평’하는 일뿐입니다.
본인은 ‘좋은 일’을 하려는 생각이겠지요. 시민으로서 귀찮은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불평을 토로하면 누군가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실은 꽤나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입니다(이런 말을 듣고 안심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옛날에 ‘좌익’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했습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그 사회의 모순을 한 몸에 체현한 사회집단입니다. 그들은 “자기 해방이 곧 사회 전체의 해방”이라는 특이한 존재 방식을 취합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가 ‘난 여기에 불만이 있다’고 말하면 그대로 ‘모든 사람은 여기에 불만이 있다’는 식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국민국가든, 사유재산이든, 프롤레타리아가 ‘이건 마음에 안 들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사회 전체에서 ‘이건 마음에 안 들어’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에게 역사적으로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다음, 이번에는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녀들도 “자기 해방은 곧 부권제로부터의 사회 해방”이라는 특권적인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부조리는 거의 대부분 ‘부권제’가 초래한 것이고, 피해자인 그녀들의 주된 일은 ‘참을 수 없는’ 대상의 리스트를 오로지 늘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이 이라크 전쟁 때 <세계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연설을 통해 ‘미국이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대로 ‘세계가 참을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는 등식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테러리즘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려는 싸움’은 그대로 ‘테러리즘으로부터 세계를 해방하려는 싸움’과 동일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설마 부시 대통령이 마르크스를 환골탈태해서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의 리스트를 늘려감으로써 세계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글로벌 기준으로 등록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태를 보니 어쩐지 ‘마르크스주의의 전체화’가 일어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과연 천재 사상가가 지어낸 사고 체계로군! 21세기가 되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버렸어!
마르크스주의의 난점은 그들에겐 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할 일은 ‘가급적 재빨리 사회질서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계급적 사명에 매진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들은 결코 사회질서를 어떻게 유지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계속 활용할까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혁명에 대해서는 백 년 가까이 귀중한 경험을 얻었습니다. 그 혁명의 역사가 가르쳐준 것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사회의 일정 수 이상을 차지하면, 사회질서는(심지어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질서라고 하더라도)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혁명주체는 ‘일체의 사회질서를 강력하게 전복하는 것’이 할 일이니까, 가장 훌륭한 혁명가는(체 게바라 같은) ‘영구 혁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고, 범용한 혁명가들은 이윽고 ‘공적 자산으로부터 취할 수 있을 만큼 취하는’ 자, 즉 우리에게도 낯익은 ‘당 관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제도가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 탓은 아니”라는 사고방식이 부패하고 압제적인 정치체제를 타파하기 위해서 효과적이며 필수적이라는 점은 기꺼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는 사상이 효과적이고 필요한 것이기 위한 역사적 조건은 상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좌익적’ 비판자가 생산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수가 많아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이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왜 그러냐고 비판을 받아줄 ‘당사자’가 필요하니까요. 당연한 일입니다만.
비판을 받을 때 “미안하네, 어떻게든 해보겠네…” 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일정 정도 없으면, 사회질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비판이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비판을 곧바로 받아들여 “면목 없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비판자가 말뜻 그대로 비판적이기 위해서는 ‘비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제대로 재생산하는 제도를 담보해두어야 합니다. 비판하는 사람들도 사회 전원이 비판하는 사람이기만 하다면 설 자리가 없겠지요(그 전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비판자들과 함께 소멸하고 말겠지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상식적’이라고 글 앞에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행의 사회질서를 원활하게 기능하도록 하고, 비판을 받아들여 이를 개선하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일정 수 확보할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을 통해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표입니다.
물론 사회 전원이 그렇게 될 필요는 없습니다(언제까지나 비판적이고 싶다는 사람은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실은 ‘상식적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20%, 하다못해 사회 성원의 15% 정도가 ‘공적인 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해준다면, 그것으로 사회질서는 충분히 기능할 것입니다. 경험적으로 말하면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어른’이 있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든 굴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섯 명 중 두 명이 어른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시스템은 제도의 설계 자체가 잘못입니다.
현대사회의 위기는 그런 점에서 ‘정량적(定量的)’입니다.
위기에 대한 처방은 요컨대 ‘상식적인 어른’의 머릿수를 조금 더 늘리는 것,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나는 딱히 사회제도의 근본적 개선 같은 크게 도리에서 벗어난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대체로 사회를 한꺼번에 ‘좋게’ 만들자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아이’라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변변치 않은 제도라고 해도 시스템의 현장에서 ‘제대로 된 어른’이 있으면 제도가 초래하는 해독은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반면,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고 해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들’뿐이라면 전혀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상당히 긴 ‘머리말’이 되어버렸습니다만, 이 책은 젊은이들을 위해 쓰인 것임에도 전하려는 메시지는 단 하나뿐입니다. 한마디로 잘라 말해 “제발 여러분 중 다섯 명의 한 사람 정도만이라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준다면 원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소박한 바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라는 제목은 밤중에 자다가 생각해낸 것입니다(잠을 자면서도 일을 하고 있어요!).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능력’이라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다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개발하고, 남과 공생하는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 아낌없이 자원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이 책을 쓰는 것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다가 생각해 낸 제목치고는 꽤 풍부하게 시사를 던져주지 않습니까?
이제 긴 머리말의 끝을 맺겠습니다. 본문을 읽어주세요. 본문은 아시는 바와 같이 블로그 일기에서 편집(compilation)한 것입니다(물론 대폭 첨삭과 삭제를 해서 원문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겠지만). 그러니 갑자기 가나푱(かなぴょん) 같은 고유명사가 튀어나오곤 합니다만, 그런 것은 ‘우치다 머릿속 세계의 등장인물’이라고 여기고 가볍게 지나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나중에 ‘맺음말’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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