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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경제학인용 2025. 3. 28. 19:59
이하 『테크노퓨달리즘: 클라우드와 알고리즘을 앞세운 새로운 지배 계급의 탄생』
아무도 감자를 사고 싶어 하지 않아서 감자의 재고가 쌓이면 감자 가격은 떨어질 거예요.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수요(말하자면 대출 수요)가 현재 대출 가능한 돈의 양을 밑돈다면, 돈의 가격, 즉 이자율은 내려갈 겁니다. 빅 비즈니스는 막대한 예금을 쌓아놓았고 돈을 빌려줄 용의가 있는 사람, 즉 대부자들로부터 돈을 빌려올 역량을 지니고 있고요. (채권 구입의 형태로 돈을 빌리게 되겠죠) 그러므로 돈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를 결정할 힘을 갖고 있는 건 대출의 의향이 있는 빅 비즈니스들입니다. 이론의 세계에서는 중앙은행이 다른 은행에 빌려주는 이자율을 조절하는 형태로 전체 이자율에 영향을 미치죠.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낮추면 은행도 낮은 이율로 돈을 빌려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투자를 촉진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반대도 마찬가지겠고요. 하지만 이자율 전체, 즉 돈의 가격은 모든 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돈의 전반적인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정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2008년 이후,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돈의 교환가치는 유지되고 있었어요. 2008년 말부터 2022년 초까지는 인플레이션이 매우 낮게 유지됐습니다. 때로는 마이너스 인플레이션을 기록하기도 했죠. 그런데 같은 기간 동안 돈의 가격, 즉 이자율은 아예 처박혀 버렸습니다. 심지어 많은 경우 마이너스 금리로 돌아섰죠. 이것은 긴축 재정으로 인해 사업 투자가 백지화되었다는 것, 사업하는 사람들의 돈 수요가 아주 미비해졌다는 것을 반영하는 현상이었어요. 하지만 만약 중앙은행이 계속 금리를 낮게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돈 가격이 충분히 싸지고, 대출이 늘어나면서, 투자가 다시 활기를 띠는 시점이 왔어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감자나 마이크로칩, 아니면 자동차 같은 경우, 가격이 낮아지면 대체로 공급 과잉 문제, 즉 공급이 생산량을 넘어서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차익을 노리는 이들이 낮은 가격에 물건을 쓸어담고, 동시에 생산자는 생산량을 줄여서, 과잉된 생산분이 사라질 때까지 가격 ‘조정’이 벌어지는 식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돈의 경우에는 일이 다른 식으로 흘러가죠. 돈의 가격, 그러니까 이자율이 급락하면 자본가들은 패닉에 빠집니다. 돈을 더 싼 값에 빌릴 수 있다고 환호하는 대신, 그들은 머리를 굴려요. ‘그래, 이건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값에 돈을 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야. 하지만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이렇게까지 낮췄다니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아 보여! 설령 내 손에 돈을 쥐어준다 해도 빌리지 않겠어.’ 중앙은행들이 돈의 공식적인 가격을 거의 0까지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투자가 회복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었죠. 하지만 이건 2008년 이후의 악몽에 대한 반쪽짜리 설명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타락한 은행가들이 모든 이들의 목을 졸라맸다는 것으로 해명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지어 중앙은행과 정부까지도 은행에 끌려다니게 됐죠. 이건 미국의 미노타우로스가 세계 자본주의를 지배했던 지난 30년의 유산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목줄을 쥐고 있던 덕분에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연이어 은행 부도를 겪고 있을 때조차 무사했습니다. 정부에 화급한 전화 한 통을 걸어 무기한 당좌대월을 해달라고 요구하면 그만이었으니까요. 2008년 말부터 2022년 초까지, 유럽, 미국, 일본의 중앙은행은 갓 찍어낸 현금을 금융가들의 계좌로 꽉꽉 밀어넣고 있었고 그리하여 이자율의 수수께끼는 그 전보다도 한층 더 꼬이고 말았죠. 빅 비즈니스가 투자를 거부하는 가운데 막대한 돈을 공급하고, 금융가들을 위해서는 차라리 사회주의적이라 해야 할 정책이 시행되면서, 이자율은 점점 더 한없이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상하고도 새로운 신세계였습니다. 마이너스 가격은 좋은 것과 반대되는 무언가, 나쁜 것에 붙는 가격이거든요. 가령 어떤 공장이 유독성 폐기물을 처리하고 싶다면 그들은 폐기물에 마이너스 가격을 붙여요. 그러면 누군가 그것을 처리해주는 대신 그 마이너스 가격만큼의 돈을 받아가는 거죠. 환경을 고려하는 관점에서 도입되는 가격 처리 방식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돈에 폐기물처럼 마이너스 가격이 붙을 수 있나요? 중앙은행이 돈을 마치 자동차 제조업체가 황산 폐기물을 다루듯, 아니면 원자력 발전소에서 냉각로를 식힌 물을 보듯 하고 있었다면, 자본주의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이 근사한 왕국에서 뭔가 썩고 있다는 신호로 봐야만 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돈이 마이너스 가격을 갖게 되었을까요? 아버지, 당신 덕분에 저는 마이너스 금리의 모순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제게 빛에 두 개의 본질이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소개해 주셨죠. 마찬가지로 노동과 자본에도 쌍둥이 같은 두 개의 본성이 있고요. 자본, 그러니 돈도 마찬가지인 거죠. 돈은 우리가 다른 모든 상품을 거래하게끔 해주는 상품이라는 본성을 지니고 있어요. 하지만 돈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죠. 우리가 주변의 물질을 어떻게 변형하며 세상을 어떻게 형성해가는지 돈은 보여준답니다. 돈은 인간이 집단으로서 가지고 있는 ‘소외된 능력’을 수량화하고 합산해서 보여줘요. 이렇듯 돈이 지니는 두 번째 본성을 깨닫고 나면 모든 게 말이 되죠. 바로 이 집단적 능력이 망가지고 만 것입니다.*
(* 망치질을 하고 있는 목수는 그 시간에 시를 짓고 있을 수 없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시간 단위로 거래되는 임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보았다. 노동 역시 화폐를 통해 거래된다. 따라서 한 나라에서 유통되는 화폐는 그 나라의 노동 전체와 양적으로 같거나 비슷하거나, 적어도 유의미하게 반영할 것이다. 저자의 문장은 그러한 인식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소외된 능력’이란 바로 노동이며, 화폐는 노동의 총량과 비례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노정태) (170~174쪽)
이윤은 여전히 모든 자본가들이 꿈꾸는 야망의 목표였고, 모든 중간 공급자가 노리는 바였으며, 보다 안락한 삶을 떨치고 일어나도록 사람들을 끌어내는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체 파이를 키우는 힘, 축적을 통해 부 자체를 늘려주는 자본 축적의 원동력은 이윤과 갈라서고 말았죠. 마치 브레턴우즈 체제가 끝나고 글로벌 미노타우로스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열심히 일하는 것과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게 상관없어진 것처럼 말이에요.
중앙은행과 은행장들이 이윤을 노리고 그런 일을 벌인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고 말았을 뿐이죠. 2008년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인해 투자를 위한 돈의 수요가 사라졌습니다. 이는 돈의 과다 공급을 낳았고 이자율을 찍어 눌렀죠. 이자율이 떨어질수록 투자자들은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미치지 않고서야 투자할 때가 아니라는 확신 말이에요. 하지만 중앙은행이 찍어낸 수조 달러 이상의 돈이 계속 금융계로 흘러들어가고 있었고, 지옥의 악순환도 끝나지 않고 있었으니, 이자율은 점점 더 미끄러지다가 결국 0 혹은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대 기업 집단과 정부는 이자 없는 대출의 맛에 길들어가고 있었고, 개발도상국의 기업들은 자국보다 외국의 돈을 빌려오기 시작했어요. 2010년대의 말에 이르면 2조 달러 넘는 돈이 쏟아져 나온 상태였는데, 그러자 중앙은행장들은 추악한 딜레마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죠. 첫째, 돈이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잠근다. 이러면 돈 찍어내기는 끝나고 금융화된 자본주의 역시 날아가 버리게 되겠죠. 둘째,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계속 돈을 찍어서 주입한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면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동력과 윤활유로서 이윤이 가지고 있던 역할은 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놀랍지 않게도 후자였고요. (178~179쪽)
그러면서 금융가들을 위한 사회주의로 인해 클라우드 영주와 겨룰만한 집단이 떠올랐습니다. 금융 초군주(financial uber-lords)가 그 주인공이었죠. 블랙록(BlackRock), 뱅가드(Vanguard), 스테이트 스트리트(State Street)라는 미국의 세 회사가 사모펀드와 모든 기존 자본가들을 뛰어넘는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금융계에서 흔히 ‘빅 쓰리’라 부르는 이 세 회사는 미국 자본주의를 실질적으로 소유한 집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빅 쓰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회사들이 소유한 회사라면 알죠. 아메리칸 에어라인, 델타 항공, 유나이티드 콘티넨탈 같은 미국의 주요 항공사, 제이피모건 체이스, 웰스 파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 시티그룹 같은 월스트리트의 다수 기업들, 그리고 포드나 제너럴 모터스 같은 자동차 제조회사 등을 망라하고 있으니까요. 종합해보면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곳 중 90퍼센트가 넘는 기업의 대주주가 빅 쓰리입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엑슨모빌, 제너럴 일렉트릭, 코카콜라까지 그에 속하죠. 빅 쓰리가 보유한 주식을 달러로 환산해 적어보려면 너무 많은 0이 필요해질 지경이에요. 제가 이 글을 쓰는 현재 블랙록이 관리하는 투자액은 거의 10조 달러, 뱅가드는 8조 달러, 스테이트 스트리트는 4조 달러에 달합니다. 이게 어떤 숫자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어요. 저 숫자의 합계는 미국의 국민 소득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수준입니다. 중국과 미국의 국민소득 총합과도 같고요. 또는 유로존과 영국, 호주, 캐나다, 스위스를 합쳐놓은 숫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5~186쪽)
무엇이 자본주의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을까요?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분명한 답을 가지고 계셨죠. 자본주의는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피조물에 희생당한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큰 산물인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마땅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요. 자본주의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두 부류를 만들어낸다고 아버지는 확신하고 계셨죠. 자본가는 혁신적인 기술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기술이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을 스스로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프롤레타리아는 상선과 철도, 트랙터, 컨베이어 벨트와 산업 로봇 등 다양한 경이로운 기술과 함께, 혹은 그 기술의 일부가 되어 낮이건 밤이건 노동력을 쥐어짜내야 하는 사람들이고요. 여기서 혁명적인 기술은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그 경이로운 기계를 작동시키는 법을 알게 되지요.
세계 경제와 정치의 영역에서 자본이 지배하는 부분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본과 프롤레타리아의 사생결단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결국에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최초로 선이 악을 극복하게 되는 거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었던 인류의 쓰라린 고통이 드디어 회복되는 것입니다. 가치는 이제 더 이상 가격으로 전락하지 않겠지요. 또한 결국 인류는 기술의 노예가 아닌 주인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테고요.
현실적인 용어를 써보자면 아버지의 관점은 제대로 된, 기술적 발전을 동반한 사회적 민주주의의 탄생을 향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본과 토지를 집단 소유함으로써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생산하게끔 압력을 넣는 거죠. 관리자들은 그들을 선출한 피고용인, 고객, 사회 전체에 대해 답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될 테고요. 그곳은 이윤과 임금의 구분이 없는 세상이므로 이윤은 더 이상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없죠. 모든 노동자는 동등한 주주로서 그들의 급료는 기업의 순매출과 동일할 겁니다. 이렇듯 주식시장과 노동시장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은행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종의 공공 인프라 영역 같은 것이 되겠죠. 그에 따라 시장과 집중된 부가 지니고 있는, 공동체를 압도할 수 있는 권력 역시 사라집니다. 건강, 교육, 환경 보호를 제공하는 방법 등을 우리 스스로 집단적으로 정하게 되는 거죠. (198~200쪽)
그러니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희망사항을 담은 이야기 말고,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해 주는 이야기 말이에요. 그 이야기는 자본주의를 봉건주의와 구분해 주는 명백한 경제적 지표인 지대가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가,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일 수밖에 없겠죠.
봉건제의 지대가 뭔지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죠. 태어난 신분이나 왕의 명령 등 어떤 우연적 요소에 의해 봉건 영주는 일정한 땅에서 나오는 것들을 획득할 권리를 지니게 됩니다. 그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농부들이 생산하는 산물들 중 일부를 가져가는 거죠. 자본주의를 봉건주의와 가르는 특징인 이윤은 지대보다 이해하기 조금 어려워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저는 양자의 차이를 파악하지 못해 쩔쩔매는 학생들을 숱하게 봐왔습니다.
산술적으로 볼 때는 차이가 없어요. 지대건 이윤이건 생산 비용을 빼고 남은 돈이니까요. 지대와 이윤의 차이는 더 정교하고, 질적이며, 심지어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윤은 시장에서 벌어지는 경쟁에 취약한 반면 지대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건 이윤과 지대가 서로 다른 기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죠. 지대는 비옥한 토지나 화석 연료를 매장하고 있는 땅 등, 공급이 고정된 무언가에 대한 독점적 접근권에서 나와요.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입하건 그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늘거나 줄거나 하지는 않죠. 반면 이윤은 기업 행위에 투자한 사람의 호주머니로 돌아갑니다. 그 투자와 기업 행위로 인해 마치 에디슨의 전구나 잡스의 아이폰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게 발생하고 그렇게 이윤이 창출되죠. 이런 상품들은 다른 사람의 투자와 기업 활동으로 인해 더 잘 만들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경쟁으로 인해 이윤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소니는 워크맨을 발명했어요. 최초의 휴대용, 개인용 음악 기기였고 소니는 덕분에 막대한 이윤을 누렸습니다. 그러자 모방과 경쟁이 시작되어 소니의 이윤은 점점 줄었고, 결국에는 애플이 아이팟을 만들어내면서 그 시장의 지배권을 가져가 버렸죠. 반면 지대 향유자는 경쟁으로 인해 이득을 보게 되어 있어요. 잭이 어떤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고요. 어떤 업종이 호황을 누리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잭의 건물을 임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요. 이 경우 잭이 받는 임대료는 높아지죠. 잭 본인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난 사이에 더 부자가 되는 겁니다. 잭의 동네에서 더 많은 기업 활동이 벌어질수록, 그 일대에 자본이 더 많이 투입될수록, 잭이 받는 지대도 커지죠.
이윤이 지대를 압도할 때 자본주의는 번창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승리는 생산적인 일과 소유권이 노동시장 및 주식시장을 통해 상품화된 것과 궤적을 함께하는 전환이었죠. 이것은 단지 경제적 영역에서의 승리만이 아니었어요. 야만적인 착취의 냄새를 풍기고 있던 지대에 맞서 이윤은 스스로의 도덕적 우위마저 주장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시장의 불확실성을 뚫고 미지의 항해를 해나간 용감한 기업가에게 주어지는 보상, 그것이 바로 이윤이라는 이야기였죠. 하지만 이윤이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대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에도 생명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마치 오래전 멸종된 고생물과 미생물의 DNA가 인류의 DNA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죠.
포드,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 제너럴 모터스, 티센크루프, 폭스바겐, 도요타, 소니, 그 밖에도 자본주의가 낳은 초거대 기업들은 지대를 압도하는 이윤을 창출하면서 자본주의를 이끌고 그들의 지배력을 유지해 나갔어요. 하지만 빨판상어에게 붙어 기생하는 물고기처럼 일부 지대 추구자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아니, 사실 살아남기만 한 게 아니라 이윤이 창출되고 넉넉하게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먹으며 번성해 나갔죠. 가령 석유회사들은 땅이나 해저의 특정 지역에서 시추할 권리를 확보한 후 막대한 지대를 얻잖아요. 이런 행동이 지구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는 게 분명해도 그들에게는 그 어떤 비용도 청구되지 않죠.
물론 석유회사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약탈을 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윤을 얻고 있다며 그들이 버는 돈을 정당화하려 들죠. 석유회사들 역시 다른 석유회사와 경쟁을 하고 있으며, 기술을 발전시켜서 경쟁사보다 낮은 가격에 시추할 수 있게끔 해야 하며, 그 모든 과정을 위해서는 현명한 투자를 받아야 한다며, 그들의 자본주의적 특성을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동산 개발업자들 역시 그들이 버는 돈을 지대가 아닌 이윤으로 포장하는 경향이 있어요. 혁신적인 건축물이 없다면 지대가 나올 수 있겠냐면서요. 민영화된 전력회사 혹은 수도 공급자 역시 자신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할당된 지대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죠. (202~205쪽) (인용자: 이 문단에서 거론되는 석유회사와 부동산 개발업자는, 공교롭게도, 이를테면 햄버거나 프로야구처럼, ‘미국의 냄새가 풍기는’ 것들을 부지불식간 무의식적으로 연상케 하는 면도 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상점 주인과 그 친척의 독무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특히 죽은 시카고 학파가 지난 40여년 간 세상에 떨친 살아있는 ××(?)는 지대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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