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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국어를 뭐하러 또 배우나?”
    인용 2025. 3. 15. 12:04
    “낱말을 없애는 건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지. 물론 가장 쓸모없는 낱말은 동사와 형용사에 많지만, 없애야 할 명사도 수백 개나 있네. 그리고 동의어 뿐만 아니라 반의어도 없애야 하지. (…) 모든 사상적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네. 사실상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사상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걸세. 정통주의는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걸 뜻하네. 요컨대 정통주의란 무의식 그 자체일세.” - 에릭 아서 블레어

     

     

    ‘에エ’ 음에 대해 이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다시 찾았으니 어디로 사라지기 전에 여기에 적어두어 현명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에’음을 언급한 분은 도쿄의 공립 초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와타나베 에미(渡辺恵美) 씨다.

     

    이런 이야기였다.

     

    우리 학교는 작년부터 학예발표에서 ‘에 단을 쓰지 말자’고 정한 ‘착한 말 쓰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요. ‘데메(이 자식)’라든가 ‘시네(안 해)’ 등 마지막이 ‘에’ 단으로 끝나는 말을 쓰지 말자는 것이지요. 가정이 살벌해져서 부모자식 할 것 없이 막말을 입에 올리는 세상이 된 것 같아요. ‘구에(처먹어)’ 같은 말을 일상적으로 쓰잖아요. 그렇다고 막돼먹은 부모인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런 말은 좁은 세계에서 쓰이는 말이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런 말을 쓰면서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있을까요? 교사 중에서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요. (…)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음에 걸리는 일은 ‘자신의 말을 물리지 않는’ 것이에요. ‘아마도’, ‘그럴 거야’ 같은 말을 맨 나중에 붙여서 아예 반박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지요. 단정해서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이런 일은 가정이 학교처럼 되어버린 아이들에게 많지 않을까 해요.

    (『말을 통해 보는 현대의 어린이』, 일본작문의 모임, 유리百合 출판, 『작문과 교육』 557, 2004, p.8)

     

    나는 교토대학의 집중 강의 도중에 ‘에 단’의 일화를 생각해내고, ‘에 단’이 교실에서 지배적인 음운이 되는 것이 학급 붕괴의 신호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말은 좀 지나치게 앞서나간 발언이고, 와타나베 에미 선생님은 그렇게까지 단정하지는 않았다(본래 ‘남의 말을 자기 말처럼 옮기다 보면’ 강도가 점점 세진다).

     

    여하튼 와타나베 에미 선생님은 매우 날카로운 관찰력을 갖고 계신 분이다. 교원들의 좌담회에서도 그녀의 현장보고에는 ‘따끔’한 지적이 많았다.

     

    좀 더 적어보겠다.

     

    오늘날 학교 아이들이 대개 그렇지만, 특히 저학년 학생들의 어휘력이 부족함을 요즘 부쩍 느낍니다. ‘열 받는군’ 하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이 학년이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단어들이 아이들 전체에게 습득되어 있지 않아요.

    언어에 관해 생각해보면, 단어를 주고받는 생활언어와 학습언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생활언어의 범위가 굉장히 좁아지고 있어요. 생활에 지장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단어 수는 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말은 줄어들고 있어요. 부모자식 관계도 그다지 감정이 없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를테면 학교에서는 다양한 행사들이 많은데, 교사들은 참관한 부모들이 자식에게 이런저런 소감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기대를 하지요.

    그런데 다음 날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거예요. 한때는 부모의 말을 아이들이 잊어버린 것이겠지 했지만 운동회가 끝나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 가정, 부모들이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가정이 존재하더라고요. 감정을 키우는 부분이 생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만큼 그 부분을 어떻게든 회복시킬 수는 없을까 고민입니다. (위 책, p.12)

     

    이것도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아이의 빈곤한 어휘력은 아이가 생활권에서 주고받는 언어의 빈곤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것은 아이의 책임이 아니다.

     

    일본어가 말라비틀어지고 있다는 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 듯한데, ‘현대인은 감정이 메말라서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가 빈곤해진’ 것이 아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가 빈곤하기 때문에 감정이 메말라버린’ 것이다.

     

    순서가 거꾸로다.

     

    언어의 현실 변용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것을 대다수의 일본인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언어에 대한 이해가 늦은 사람들이 현대 일본의 ‘국어’를 관리하고 있다.

     

     

    ー우치다 타츠루,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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