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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유적 존재에 관해인용 2025. 3. 10. 23:42
나는 마르크스가 피력한 종교에 대한 의견(“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에는 상당히 이견을 갖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하기로 하고 우선은 마르크스의 생각을 확인해두기로 하죠.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근대 시민사회가 이룩한 위대한 달성이라고 할 ‘권리 추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야말로 도리어 인간이 이제껏 충분히 해방되지 못한 증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이 명제의 앞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이의가 전혀 없어요.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인간 해방이 실현된 이상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민사회에서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고립의 자유’예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대신 누구도 폐를 끼치지 못하게 할 권리. ‘고립되어 자기 안에 콕 틀어박혀 있는 모나드〔단자〕로서 누리는 인간의 자유’라고나 할까요.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거리를 두는 것에서 더욱 커다란 가치를 찾는 것이 근대 시민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어요. 시민사회의 기초는 “’자신의 재산, 자신의 소득, 자신의 노동 및 노무의 성과를 임의대로 향수하고 처분할’ 권리”에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 제약 없이 그러한 ‘이기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인류가 달성하고자 하는 이상적이고 완성된 사회라는 것이 정말일까요. 모든 사람이 ‘이기적인 인간’이자 “’자기 자신 속에만 틀어박히고 자기 이익과 자기 생각에 갇혀 있으면서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가 열심히 노력해왔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실제로는 미국의 ‘독립 선언’이나 프랑스의 ‘인권 선언’도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동포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과 재산과 자유를 바쳐가면서 정치 투쟁을 벌인 성과로서 얻어낸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이들의 영웅적이고 비이기적인 헌신의 목표가 “이기적인 인간의 권리 승인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납득할 수 없었어요.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시민들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정부에 자신의 권리 일부를 맡기고 법률을 제정하거나 법을 준수하며,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세금을 내고, 징병령이 떨어지면 무기를 들고 조국을 위해 싸우기도 해요. 이런 시민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공민’이라고 부르지요. 이는 공적인 기능이란 측면에서 규정한 시민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시민을 ‘속마음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한다면, 공민은 규칙에 따라 의무를 다하는 ‘원칙에 충실한 시민’이라고 하겠지요. 요컨대 시민은 ‘사인(私人)’과 ‘공민’이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되지요. 사인으로서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공민으로서는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식으로…….
일본어에도 ‘공사(公私)를 혼동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공무원이 자신이 주주로 있는 회사에 공공사업의 수주를 맡긴다든가 하면 ‘공사를 혼동한다’고 하잖아요. 경찰관이 동료의 속도 위반을 눈감아주는 것도 ‘공사를 혼동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자식이 음주 운전으로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경찰에 신고하여 자식을 체포하게 하는 부모를 가리켜 ‘공사를 혼동한다’고는 하지 않아요. 자기 은행 계좌에 있는 돈을 깜빡 잘못해서 시(市)의 계좌로 이체해버렸다고 해서 ‘공사를 혼동했다’고도 안 하지요.
‘공사를 혼동한다’는 것은 사적 이익의 추구를 공익보다 우선시하는 경우에만 해당하며, 그 반대의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사인’이 인간이 본래 지닌 모습이라면, ‘공민’은 부자연스럽다고 할까요, 원칙적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공민을 ‘사실은 그러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맡아서 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요.
“결국 시민사회의 성원인 인간이 본래의 인간으로 간주되어 공민(citoyen)과는 구별된 인간(homme)으로 여겨진다.”
근대 시민사회의 성원들은 ‘사인’과 ‘공민’이란 두 가지 모습으로 분열되어 있고, 사인의 모습이 본래적인 모습이라고 스스로도 굳게 믿고 있어요.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해요. “이봐, 그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이래라 저래라 하니까 할 수 없이 법률에 따를 수밖에’ 하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류가 그렇게 피땀 흘리며 노력해왔단 말이야? 인간이 참으로 해방된다는 것이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어?”
나아가 마르크스가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한 인간이 공과 사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고, 분열된 모습 중에 ‘이기적인 쪽’이 진짜 모습이고 ‘비이기적=공명(公明)한 쪽’이 가짜 모습이라는 것도 이상할 뿐이야. 그게 아니라 참으로 해방된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할 것이 분명해.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인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마르크스는 그러한 인간을 ‘유적(類的; Gattungswesen) 존재’라고 불렀어요. 어쩐지 낯설게 들리는 이 ‘유적 존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유적 존재’란 “현실의 개체적 인간이 추상적인 공민을 자기 안에서 되찾은” 상태를 가리켜요. 시민사회에서는 ‘공사의 혼동’이 어디까지나 ‘공보다 사를 우선한다’는 것임에 비해, 유적 존재는 공과 사를 문자 그대로 일치시킨 상태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공사를 일치시키는 인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상하는 것 자체가 매우 곤란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나는 이런 사고방식(곤란한 목표이기는 한 것 같지만)이 옳다고 봅니다. 스스로도 부족하나마 될 수 있는 한 이런 방향으로 ‘유적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려고 해요(진심으로!).
앞의 편지에서도 ‘공민’과 ‘사인(私人)’의 차이를 논하면서 나온 개념인데요. ‘공민’이 허구적인 존재이고 ‘사인’이 현실적인 존재인 한, 인간은 항상 사적 이익의 추구를 우선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나만 좋으면 나머지는 상관없다’는 본심만 내세우며 살아간다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이용하고 수탈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모든 이의 행복을 배려하는 마음’이 ‘나 혼자만의 행복을 생각하는 마음’과 부딪치다가 결국에는 이기주의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사회 제도를 바꾸거나 법률을 제정하거나 비인도적인 행위를 엄하게 처벌한다 해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이 사회는 불공평함을 막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합법적인 수탈의 방식을 궁리할 것이고 대의명분을 내세운 지배 방식을 발명해내겠지요.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좋아지지 않아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르크스는 이 점을 이렇게 생각했어요.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유적 존재’를 지향하면 바뀐다.” 이것이 제3초고의 제2장 「사적 재산과 코뮌주의」의 중심 논점이에요.
(…) 이러한 코뮌에서도 소유욕은 억누를 수 없으며 질투나 부러움도 활발하게 기능하지요. 당연하잖아요? 이곳에서는 누구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전원이 전원을 대상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재산을 사유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공유해야 할 것을 숨겨놓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의 눈길로 찾아내게 돼요. 결국 원시적이고 조야한 코뮌주의는 ‘질투와 평균화의 완성’에 다름 아니지요. 교양과 문명의 세계 전체를 부정하고 인간을 원시 상태로 돌려놓고 있으니까요.
마르크스가 지향하는 것은 그러한 ‘조야한 코뮌주의’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이고 훨씬 문명적인 코뮌주의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의 코뮌주의”인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인용한 구절을 보고 ‘어라? 어쩐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은 없나요? 네, 그래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하고 닮았지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말이에요.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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