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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월가의 이리떼들인용 2025. 3. 17. 14:56
(...) 일본과 독일의 공장들이 미국 공장들을 양과 질 양쪽에서 앞서기 시작했어요. 미국 정부는 일본과 독일의 제조업 영역을 도우려 했는데 그게 너무도 성공적이었던 겁니다. 자동차 산업이 그 분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죠.
현실을 깨닫자마자 워싱턴은 지체 없이 그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을 스스로 폐기해버렸습니다. 1971년 8월 15일 닉슨 대통령은 유럽과 일본을 달러 존에서 내보낸다고 발표했죠. 브레턴우즈는 죽었습니다. 이제 자본주의는 새롭고, 진실로 우울한 단계로 진화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어요.
2002년, 닉슨 쇼크 이후 30년이 흐른 후, 인류의 총 소득은 약 50조에 달했습니다. 같은 해 전 세계의 금융인들은 70조 달러 가량을 걸고 다양한 종류의 내기를 벌이고 있었죠. 이 어마무시한 숫자를 들었을 때 아버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던 모습이 여전히 기억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아버지 역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죠. 아버지는 강철의 톤 수라던가 아버지가 지었던 병원의 수처럼 말이 되는 숫자의 범위 내에서 돈을 생각하는데 익숙하셨으니까요. 이 지구상에 70조 달러라는 숫자가 들어갈 곳이 있긴 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죠.
2007년, 인류의 총 소득은 50조 달러에서 75조 달러로 높아졌어요. 고작 5년 만에 33퍼센트가 인상된 거죠. 하지만 세계 금융 시장에 걸린 판돈은 70조 달러에서 750조 달러로 커졌어요. 1,000퍼센트 이상 높아진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그 때였죠.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오만을 산술적으로 반영할만큼 숫자가 미친 듯이 솟구쳤던 그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어요.
이런 미친 숫자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기술적인 용어를 써서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옵션(내지 파생상품) 같은 금융 기법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이 옵션들로 말할 것 같으면 워렌 버핏이 '대량 금융 학살 무기'가 될 수 있는 무언가라고 불렀던 것이며, 2008년의 금융 거품 대재앙과 맞물렸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그런 물건들이에요. 옵션이라 불리는 이런 금융 기법들은 브레턴우즈 체제 하에서도 가능하긴 했죠. 하지만 은행가들이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돈을 들고서, 나중에는 사실상 허공에서 빚어낸 돈을 들고서 주식시장에 돈을 걸 수 있게 되었고 막대한 부를 은행으로부터 그들 스스로의 주머니에 이전할 수 있게 된 건, 브레턴우즈의 죽음과 함께 은행가들이 뉴딜 정책의 사슬을 풀고 해방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허공에서 돈을 빚어낸다고요? 분명히 말하건대, 그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이 B의 예금을 받아서 A에게 빌려준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은행이 하는 일은 그런 게 아닙니다. 은행이 A에게 돈을 빌려줄 때, 은행은 금고에 가서 충분한 현금이 있다는 걸 확인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A가 원금에 적절한 이자를 붙인 돈을 상환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면 은행은 그저 A에게 몇 달러를 빌려줬는지 A의 계좌에 적어놓는 거예요. 여기서 필요한 것은 타자기, 아니 요즘 식으로 따지면 키보드 몇 번 치는 것 밖에 없죠.
자, 만약 온 세상의 A들이 사려 깊게 대출을 받아서 원금에 이자까지 덧붙여 잘 갚아나갈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잘 풀리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은행은 그 본성상 너무도 많은 A들이 더 많은 돈을 빌려 점점 더 많은 이자를 내게끔 몰아가게 되는데, 이러다보면 은행은 거대한 폰지 사기 구조 속에서 막대한 이윤을 쌓는 기관이 되어버리고 말아요. 결국 금융이라는 카드로 만든 집은 필연적으로 무너지게 되고, 그럴 때면 보잘것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세계 자본주의의 몰락에 짓눌려버리게 됩니다. 그게 바로 1929년 대공황에서 목격된 바죠. 브레턴우즈는 이렇게 탐욕에 눈이 먼 인류가 또 다른 대공황을 저지르는 걸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어요. 그러다보면 또 다른 세계대전이, 그런 일이 다시 한 번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브레턴우즈가 사라지자 은행가들은 자유롭게, 다시 한 번, 광란의 파티를 벌이기 시작한 거죠.
제가 아는 아버지는 습관적인 위험 회피 성향을 지닌 분이죠. 힘 있는 사람들은 멍청하다고 가차 없이 전제하는 분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아버지께는 이 설명이 썩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듯해요. 금융이라는 이 카드로 만든 집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걸 아버지나 나 같은 사람이 알 정도라면, 훨씬 더 똑똑한 금융가들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게 아니겠어요? 그들이 가진 모든 패가 꽝으로 드러났을 때 벌어질 결과를 마땅히 두려워하고 피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일단 그들은 A에게 빚을 갚을 의지가[의지와]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A에게 대출을 해주면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그 비법은 A가 진 빚을 여러 개의 대출로 쪼개서, 수많은 매우 복잡한 금융 '상품'으로 만든 다음, 그걸 조각조각 내다 파는 거였죠. ("서브프라임 모기지" - 인용주) 그걸 구입한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걸 다시 포장해서 다른 이에게 팔고 있었고요. 이런 식으로 서구의 은행가들은 잘못된 안도감을 품게 되었어요. A의 대출이 잘못되어도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게 된 거죠. 설령 A가 파산해도 A의 대출은 아주 작은 조각으로 나눠져 있으니 한 사람의 은행가가 몽땅 책임질 일 따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유되고 분산된 리스크는 최소화된 리스크다' 이렇게 믿고 있었던 거죠.
이런 믿음을 내재화한 그들은 또 다른 믿음을 내재화할 수 있었어요. 신중한 태도는 찌질이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고, 그들처럼 똑똑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꼭 필요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생각 말이에요. (인용자: 안타깝게도 前 대통령 윤석열X김건희 지근거리에 이런 인사가 있습니다. 저는 실명을 거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빚을 내주고, 그걸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어, 세계 각지에 뿌려대는 그들이 하는 일은 리스크의 최소화가 아니었어요. 리스크를 복리로 부풀리고 있는 거였죠. 재앙의 먹구름이 지평선에 아른거리고 있었지만 금융가들은 그 작은 빚 조각들이 한순간에 서구 금융 시스템 위로 쏟아져 어떤 파국을 일으킬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답니다.
'왜?' 아버지의 머릿속에 이런 질문이 떠오를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도 뻔한 일이라면 그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들이 연쇄 부도의 높은 가능성을, 수많은 A들에게 내어준 빚이 일시에 상환 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냐고요. "견제하는 이 없는 탐욕의 폭풍에 사로잡힌 은행가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했어요"라고 말한다면 이건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바꿔서 다시 말하는 것일 뿐, 대답이 되긴 어렵겠죠.
탐욕이 1980년대에 발명된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닉슨 쇼크가 브레턴우즈 체제를 끝장냈을 때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긴 했습니다. 월스트리트는 도박꾼의 광기 비슷한 무언가에 감염되었어요. 그것이 광기를 키웠고 이 미친 숫자를 늘려나갔죠. 그 무언가가 뭐가 됐건, 그것은 전지구적 여파를 미치는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ー야니스 바루파키스, 『테크노퓨달리즘』, 82~87쪽.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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