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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어떻게 살아얄지 모르는 시대에인용 2025. 3. 31. 09:30
호리에 같은 존재, 즉 트릭스터, 흑막(fixer), 경계면(interface), 누에(ぬえ), 박쥐, 키메라, 전달자(communicator), 가교 등과 같은 것의 질이나 세련도가 떨어진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우리 사회는 규범이나 가치관을 달리하는 여러 하위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집단과 집단의 경계에는 차이가 있거나 이질감이 있으며 어느 쪽 가치관도 통하지 않는 ‘무인지대(no man’s land)’가 펼쳐져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가친코에서 꼼짝없이 마주치면 불화(friction)가 일어난다. 그래서 정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단일한 도량형밖에 갖고 있지 못한 인간은 ‘저쪽이 일어서면 이쪽은 일어서지 않고, 이쪽이 일어서면 저쪽이 일어서지 않는’ 상황을 조정할 수 없다. 단일한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최적의,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사이’ 영역에서는 쓸모없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무도는 ‘생(生)과 사(死)의 사이’에 놓인 기술이다. 생사의 경계란 산 자가 속한 세계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다(물론 ‘죽은 자가 속한 세계의 법칙’도 통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적절하게 헤쳐 나가지 못하면 살아남는 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산 자가 속한 세계의 법칙’을 일시적으로 장롱 안에 모셔두는 한 차원 높은 대처가 필요하다. 자신이 지닌 규범과 가치관과 도량형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어떤 이치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
비합리적인 말이기는 한데,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모르는, 즉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을 때,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규범 상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잠정적인 규범’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가 우리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적인 성숙을 재는 지표로 여겨져 왔다.
야마오카 뎃슈(山岡鉄舟)는 ‘막말 삼주(幕末三舟)’라 불리는 공신이면서도 유신 후에는 메이지 천황의 시종으로 중용되었다. 지우(知友)로는 기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 마쓰오카 요로즈(松岡万), 시미즈노 지로초(清水次郎長), 산유테 엔초(三遊亭円朝),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団十郎) 등 실로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나는 야마오카 뎃슈야말로 근대 일본의 롤 모델이 되는 ‘트릭스터’란 생각이 든다. 그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의뢰를 받아 에도를 넘겨주는 담판을 짓기 위해 마스미쓰 규노스케(益満休之助) 혼자만 데리고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내려갔다.
로쿠고가와(六郷川)를 건너자마자 그는 시노하라 구니모토(篠原国幹)가 이끄는 사쓰마(薩摩) 번의 총포부대와 마주쳤다. 그는 그대로 홀연히 적진으로 들어가 “조정의 적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신하 야마오카 데쓰타로(山岡鉄太郎)가 대총독부에 전하오”라고 일갈한다.
시노하라는 야마오카의 사나운 얼굴에 압도당해 팔도 제대로 못 펴보고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홍해를 건넌 모세처럼 관군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나가와(神奈川) 역에 있는 사이고(西郷)에게 돌아갔다.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의 세계다. 다마가와(多摩川)의 서쪽은 ‘관군’의 세계다.
두 개의 세계는 서로 다른 논리, 다른 원리로 움직이고 있다. 그 ‘사이’에서 적절히 행동하려면 막부의 신하로만 충실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관군의 위세에 눌려도 안 된다. 그때 그는 어느 쪽도 아닌 논리를 기반으로 행동했다.
‘조적가래(朝敵家来)’, 즉 조정의 적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신하라는 그의 정체는 그가 막부의 신하라는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는 한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것은 관군이 그를 볼 때 그가 서 있는 위치다. 그는 ‘조적가래’라는 ‘관군의 규정’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논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조적가래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관군 장병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부정한다는 큰 뜻을 펼쳐 보이고 있다.
사이고와 나눈 회담에서도 그는 트릭스터라는 천분을 발휘했다.
그는 사이고가 제시한 평화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조약 중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비젠 번에 맡긴다는 조항만큼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군신의 정’으로 볼 때 견디기 어렵다는 말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처벌을 요구하는 사이고에게 그는 “서로 입장을 바꾸어 논해보자”며 말을 꺼낸다.
“지금 만약 당신의 주군인 시마즈(島津) 공이 잘못하여 조적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관군의 공격을 받는다면, 그래서 당신도 나처럼 여기에 서서 주군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면, 명령이라 하여 자신의 주군을 순순히 내어주며 태평히 방관할 수 있겠는가?”라고 힐문한다(오구라 테쓰주, 『나의 스승』, 시마즈 쇼보, 2001, pp.142~143).
그는 ‘왕의 스승이 걸어야 할 길’로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고 ‘군신의 정’으로 일단 도리가 아닌 것을 위해 죽을 각오를 설파했던 것이다.
같은 문제도 복수의 관점으로 보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그는 ‘왕의 스승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고 ‘군신의 정’을 논하며 막부 신하의 입장과 사이고의 입장을 모두 대변한다. 그렇게 자유자재로 관점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 모순을 모순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트릭스터가 지닌 앎의 양상이다.
우리 시대의 불행은 이러한 ‘무규범 상태 속에서 살아남는 규범’에 대한 탐구를 인간적 성숙의 지표로 삼는 관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에 등장하고 있는 글로벌 트릭스터는 ‘왕의 스승이 걸어야 할 길’도 ‘군신의 정’도 모조리 ‘돈’이라는 통일적 도량형으로 측량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가치관을 달리하는 복수 세계의 경계(interface)에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인간적인 물음은 ‘세계 어디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전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범람함으로써 사라져버렸다.
호리에 다카후미의 라이브도어 기업 사건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냉혹한 교훈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ー우치다 타츠루,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오길비: 오해하실까 봐 한마디 덧붙입니다. 제가 얼마 먹었다고 이런 소리 하겠습니까마는, 다만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평소 나는 중립이요 하고 귀따갑게 자처하는 사람 가운데 신용할 만한 사람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더군요. 달리 말하면 교언영색하는 행태겠습니다. 하여튼, 누가 그동안 벌거벗고 헤엄쳤는지 2024년 12월 3일 썰물 이래로 대강은 눈치챘습니다. 아, 그 사람들의 대부분이 또 돈을 밝히긴 하더라고요. (유◯준 씨라든가, 전◯재 씨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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