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원점」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2. 4. 19:18
지난여름 『학등』이라는 매체에 ‘나의 원점’이라는 주제로 기고를 요청받았다. 다다 선생님의 제자가 된 것이 나의 원점이다. 그런 내용을 썼다. 연말에 『학등』의 편집자로부터 전자우편을 받았다. 뭘 썼는지 잊어버린 통에, 찾아내는 데 한참 걸렸다.
내가 인생의 기로에 섰던 것은 1975년 12월 말 어느 날의 일이다(정확한 날짜는 안타깝게도 기억이 안 난다). 이에 약간 앞서 아이키도 지유가오카 도장에 입문한 참이었는데, 그날부로 다다 히로시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 사람을 일생의 스승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이 나의 원점이다.
그해 3월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취업 준비라는 것도 하지 않았거니와, 시험공부를 안 하고 쳤던 대학원 입시도 떨어졌으므로, 졸업과 동시에 룸펜이 되었다.
다행히도, 70년대 중엽 일본 사회는 고도성장기가 한창이었던 바, 나 같은 인간한테도 알게 모르게 일감 의뢰가 들어왔다. 번역회사 아르바이트 주 2회, 과외를 주 1회. 아동서 전문 출판사에서 거의 매달 일을 주기적으로 줬기에, 그럭저럭 쾌적한 독신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도 매일 서너 시간 정도는 두꺼운 프랑스 문학사 책을 읽으며 ‘시험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그러고 나서는 할 일이 없다. 방 안에서 록과 재즈를 듣는 한편, 저녁이 되면 친구 가게에 술을 마시러 갔으며, 마작을 치곤 했다. 시간 때우기 면에서는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만 같았다. 20대의 반환점에 접어드는 무렵이었으니만큼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삶의 자세를 고쳐먹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삶의 자세에 ‘갈피’가 한 갈래로 잡혀있지 않은 것이다. 대학 다니던 동안에는 정치적 구조체 내부에 선 위치로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자각도 있었고, 외부평가도 있었다(‘소 부르주아 급진주의자’일지라도 표찰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나음이다). 졸업하고 나서는 그런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한 ‘한량’*이다. (원문은 遊民. 소세키의 조어이다. - 옮긴이)
스스로 어떤 면이 안 좋은지는 알고 있었다. 묘하게 언변이 있고 달필이었으므로, 주절주절 주위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궤변을 농하며, 솜씨 좋게 치고 빠지고는 해왔는데, 이런 행각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우직하니’ 무언가를 진중하게 붙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입시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한대도 ‘우직하니’라는 부사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그건 ‘바보처럼’ 하는 것이니까).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우직하게’ 살아왔던 적이 없었다. 그리 느꼈다. 무언가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스승 밑에서 배우는’ 일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건 대학교건 나는 ‘스승’이라 부를 만한 사람과 만나본 적이 없었다(친절한 선생님이나 박식한 선생님은 있었지만). 내게 필요했던 것은, 스승을 모시고, 담박하게, 어떠한 의혹의 염도 없이, 마음을 열고, 오로지 스승이 전하는 기술과 지견을 영(0)에서부터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직감했다. 어느 분야든 상관없었다. 기술인이 되는 것도 좋았고, 산중에 들어가는 것도 좋았으며, 무도를 수행한다 해도 좋았다. 불문곡직 스승을 따르고자 했다. 하지만 스승이라는 존재를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을지 그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멍하니 보내는 가운데, 12월의 어느 날, 석양이 내려앉은 뒤, 여느 때처럼 지유가오카 역 남쪽 출구 인근의 인적 드문 길을, ‘피트인’이라는 재즈 카페에 맥주를 마시러 걸어가고 있었다. 개찰구 옆 헌책방 앞, 평소 같았으면 깜깜했을 유도장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낮 동안에는 백발노인이 거기서 아이들에게 유도를 가르치는 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하카마를 입은 사람이 있었으므로 유도가 아님을 알아챘다. 나는 대학 시절 한때 가라테부였는데 선배를 치려고 했다가 퇴부하고 말았다. 이건 가라테가 아니다. 유도도 아니거니와 가라테도 아닌 것. 이것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호기심이 동해 유도장 현관에 있는 유리문 앞에 쪼그려 앉아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니 안에서 수련하고 있던 청년이 나를 눈치채고서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여기 안으로 들어오셔서 보세요” 하고 나를 들여보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평범한 도장이란 데는, 견학자를 맞이할 때 이런 식으로 살갑게 대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도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주는 건 꽤 온건한 축에 속하는데 ‘몰래 훔쳐보다니 제정신이냐’ 하고 소리를 지르는 수도 있다.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하고 내가 물으니, 그 청년은 “아이키도라는 것입니다” 하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입문 안내지를 보여주며, 아이키도가 어떠한 것인가를 살뜰히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 청년의 예의 바른 태도에 감격한 나머지, 설명을 채 다 듣기도 전에 “입문하겠습니다” 했다.
아이키도 지유가오카 도장은 다다 선생님이 사범을 하고 계시는 도장이다. 수련은 매일 있다. 다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에서 두 번 뵙게 될 터인데, 나머지는 유단자 문인이 지도하고 있다, 그런 설명을 들었다. 월사금은 파격적으로 낮았다. 수련복을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내일부터 나오겠습니다’라고 일러둔 채, 도장을 나서서, 예정대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생각도 못 했던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지라, 기분이 고양되었다.
다다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던 것은 입문하고 나서 며칠 뒤의 일이다. 그날은 현관을 열었더니,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선배들은 어째선지 굳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고 해서 옆을 보니, 마치 고대 무사처럼 엄한 용모를 한 사람이 묵연히 마룻바닥에 앉아 있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상대임을 단박에 눈치챘다. 문인들은 긴장감으로 팽배해 있었다. 당일 선생님의 수련이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초심자에게는 선생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손을 내밀면, 문인이 그것을 잡으려 하는데, 그 순간 문인이 허공을 날아간다. 언제, 무엇을 했는지, 기억 안 난다. 이건 정말이지, 엄청난 선생님 같다는 점만은 알 수 있었다.
그날 수련을 마쳤을 때, 애당초 나를 도장으로 들여보내 준 청년 (故 사사모토 다케시라는 분이었다) 이 “연말에 송년회가 있는데 우치다 군 올래요?”라고 물어봐 주었다. 막 입문한 처지인 나에게 말을 붙여준 게 참 고마워서, ‘예 갈게요.’라고 즉답했다.
송년회는 다마가와엔 앞에 위치한 쇼라이소라는 ‘갓포 료칸’ 2층에서 행해졌다. 내가 처음 보는 선배들도 포함해 스무 명 정도가 참석했다. 시간이 좀 지나 다다 선생님 계신 곳을 보니, 선생님은 상석에서 홀로 오도카니 정좌하고 계신다. 선생님 옆자리는 선배들 몫인데도, 선배들은 모두 딴 데에 모여 담소하고 있다.
선생님이 혼자 계시는 것을 보고서, 맥주병을 들고 그 곁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번에 입문하게 된 우치다입니다” 하고 인사드린 뒤, 선생님의 유리잔에 맥주를 따랐다. 선생님은 “어어, 그러냐” 하고 미소 짓고서는, “우치다는 어떤 동기로 아이키도를 시작하려 했나 궁금한데?”라고 물어보셨다. 즉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저도 모르게 그만 “예, 이거 배우고 앞으로 길거리에서 시비 붙었다 하면 아주 그 자리에서 작살을 내버리려고요”라고 말해버렸다.
어리석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놈’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있는 힘껏 호랑이 꼬리를 밟아서(출전은 『주역』 - 옮긴이), 상대가 어떤 리액션을 취하는지를 살펴본 뒤, 그 인간의 근수를 떠보고는 했다.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었던 것이다. 그런 못돼 먹은 성격을 두들겨 패다시피 바로잡고자 입문한 것이었음에도, 본성이 어디 안 가고 이때다 싶어 ‘정말 별로다 싶은’ 언동을, 초면이나 다름없는 스승에다 대고 내뱉은 셈이다.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아뿔싸’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 자식. 그딴 이유로 수련하려거든 당장 때려치워라’ 하고 일갈하셔도 할 말이 없는 지경이라 공포감이 엄습했다. 한데 보니 선생님은 뜻밖에도 파안대소하며 “그런 이유 갖고 시작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상황은 진정으로 놀라웠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의도가 너무나 자연스레 터득이 되었다. ‘그런 이유여도 된다’는 말은 곧 ‘그런 이유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크나큰 무례를 눈감아 주셨다.
그때 선생님이 전하신 언외(言外)의 메시지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는 점은 나중에 비로소 깨달았다. “너의 어떠한 이유든 아이키도를 막 시작하는 데 구애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네가 나에게 앞으로 배울 것들은 네가 아직 그 존재를 모르는 지(知)와 기(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지금 너는 ‘입문 이유로 타당할 정답’을 들 수가 없는 것이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이를 생애의 스승으로 따르자’고 결단했다. 나는 일생 큰 결단을 적지 않게 내렸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대한 결단이었음을 자부한다. 이를 계기로 나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Tigersprung” “기요미즈데라의 무대에서 뛰어내림”이라고도 선생님은 표현하심 - 옮긴이)
그로부터 48년, 나는 각고의 노력을 다해 (원문 鈍根に鞭打ち - 옮긴이) 수행에 매진해 왔다. 다다 선생께서는 올해로 94세가 되신바, 여전히 늠름히 도장 바닥 위에 서신다. 스승을 모시는 일이 어찌나 복된 경험인지를, 다다 선생님으로부터 나는 몸소 배웠다.
(2024-12-26 15:1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무지의 즐거움』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 그러나 체육 동아리에서는 선배의 뜻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맞은편 방에 있는 주장들도 그 졸업생의 ‘기합’은 못 본 척 했습니다.
밤중에 술에 취한 그 선배가 방에 들어와 잠을 깨우면 1학년들은 진절머리를 쳤습니다.
그런 일이 몇 달 동안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 아마도 토요일 오후 연습 때인데 그 선배가 체육관으로 선물을 들고 왔습니다. 맥주 한 상자와 일본주였습니다.
아직 더울 때였기 때문에 체육관 밖에 오랜 시간 내버려둔 맥주와 일본주는 미지근해져서 도저히 마실 만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선배들은 “졸업생이 사 들고 오신 것이니까 고마운 마음으로 마시자” 하고 연습 후 체육관에 빙 둘러앉아 술판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1학년 십여 명이 인내심을 발휘해 미지근한 맥주를 종이컵에 부어 다 마셨더니, 이번에는 선배가 친히 1학년에게 일본주를 따라서 돌렸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는 “자, 마셔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1학년은 기껏해야 열여덟, 열아홉 살이니까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내 옆에 있던 왜소한 학생은 전혀 술을 못 마시는 아이였기 때문에 선배가 “마셔라~!” 하고 호통치자 겁을 먹고 종이컵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이놈 것은 제가 마실게요” 하고 이인분을 한꺼번에 마셨습니다. 그리고 내 종이컵을 선배에게 내밀며 “선배님도 한잔 하세요” 하고 찰랑찰랑 술을 부어 “마셔라~!” 하고 위협적인 저음으로 말했습니다.
그 선배는 분통이 터지는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종이컵에 든 술을 단숨에 마시더니, “우치다, 일어서라! 대련하자!”고 말했습니다.
상대는 가라테 2단이고 나는 흰 띠입니다. 제대로 대련을 벌였다가는 당연히 승산이 없지요. 그래서 일어서는 동시에 상대의 관자놀이를 노려 갑자기 돌려차기를 날렸습니다. 하지만 낮술을 마신 다음이라 다리가 흔들려 헛발질이 되고 말았지요. 다음 순간은 이미 옴팡지게 두들겨 맞아서 코뼈가 부러지고 정신을 잃고 피투성이가 되어 방으로 실려 왔습니다.
그날 주장은 내게 동아리에서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우치다, 너는 퇴출이야. 그 선배가 심했다는 건 우리도 알아. 하지만 장난으로라도 선배에게 한 방 날린 이상 가라테 동아리에는 적을 둘 수 없어.”
✳︎
몇 년 전 이사할 때 이때 쓴 졸업논문이 나왔기에 읽어보았습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은 좀 쑥스럽지만, 참 성실하게 제대로 쓴 괜찮은 논문이었습니다.
40년 전에 쓴 논문이지만 그때 다룬 주제는 현재도 내 연구 주제와 거의 다를 바 없습니다.
주제는 ‘신체론’ 입니다.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알기 쉽게 써나가다가 막히는 곳이 있으면 막히는 과정도 그대로 썼습니다. 대강 얼버무리거나 아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젊었던 내가 집필한 글이지만 ‘꽤 괜찮은 방식으로 썼구나’ 하고 느껴졌습니다.
그 무렵부터도 교수에게 좋은 점수를 받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이 제기한 문제의식에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답을 얻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따라서 모르는 대목을 ‘아는 척 한다든지’ 어려운 대목은 건너뛰고 아는 곳만 이어붙이는 등 ‘옹졸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아시는 바와 같이, 니체의 ‘초인’은 실체가 있다거나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옆에 있는 인간이 ‘원숭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정신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초인’은 ‘비웃음 당해도 싼 원숭이’, ‘노예’의 속성을 갖고 있는 ‘천민’을 가까이 두고서, 끊임 없는 조롱과 매도를 일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격하게 증오하면서, 그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니체는 ‘거리距離의 파토스’라고 불렀다. 이 혐오감만이 인간 ‘자기 초극의 열정’을 공여한다. 그래서, ‘초인’을 향한 의지를 북돋기 위해, 추악한 ‘원숭이’가 항상 곁에 대기해 있으면서, 혐오감을 휘몰아치게 해주는 일이 꼭 필요하다.”
“Y 염색체도 존재를 통치하던 젠더의 압박도 지난 세기의 것이야. 누군가의 자아ー성별, 국적, 인종, 지위, 종교ー로 그를 소외시키는 위협적인 사회에서 제대로 된 남자라면 여자가 사회적 지능, 대화의 방법, 도덕적 권위, 차분한 집중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 거야. 그러니까 (문학적 암시가 아닌) 말 그대로 차이에 대한 존중을 보여줘야 해. 아니면 조용히 딴 데 가서 죽거나.” (이충걸)
나도 또한 젊었을 때 ‘현대 사상의 깊은 숲’에서 숨이 끊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마지막 남은 사력을 다해서 그 ‘숲’으로부터 빠져나오긴 했지만 ‘조난’의 고통을 사무치게 느꼈다. 지천명을 지난 어느 날 나는 문득 자신의 ‘조난 경험’과 거기서부터의 ‘탈출 경험’을 젊은 독서인들에게 내레이터로서 전하는 것이 혹여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일을 통해서 새로운 ‘조난자’의 출현을 미리 방지하는 것과 동시에 ‘현대 사상의 PTSD’로 고통받는 30, 40대의 독서인들에 대한 구호 활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현대사상의 조난 구조 활동’. 우와 이거 멋지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나에게는 조난자들을 등에 업고 하산할 만큼의 체력은 없다. 그래서 일단 나의 임무를 그들을 ‘격려’하는 것에 한정하기로 했다. 눈 덮인 산을 달려서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조난자’들의 콧등을 핥고, 브랜디를 먹이고, ‘그 다음은 자력으로 일어서기를’이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떠난다. ‘현대사상의 세인트 버나드’. 이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도 좋아하고.
문제는 ‘브랜디’에 상응하는 ‘어떠한 조난도 한 모금만 마시면 일단은 숨통이 트이는’ 구조의 논리를 세우는 것이다. 조금 생각한 후에 나는 묘수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모른다’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이다’라는 역전의 발상이다.
… ‘모른다’는 것은 패배의 선언이 아니라 ‘지자(智者)’에 대한 욕망이 기동하고 있는 징후이다. 그것이야말로 독자가 지적으로 뭔가를 돌파하는 것의 징조다. 그래서 모른다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조심스러움이야말로 위대한 사상가에 대한 경의의 표명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나의 구명용 ‘브랜디’다. ‘몰라도 괜찮아’라는 이 논리를 목에 걸고 나는 오늘도 ‘현대 사상의 조난자’들의 지적 소생을 위해서 눈 덮인 산을 질주하고 있다. 멍멍 (『망설임의 윤리학』)
오길비: 제가 처음에 선생님 곁을 기웃기웃한 이유가, ‘시끄러운(喧しい) 페미니스트들 논파하려고’라는 점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오나 ‘지적 필살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에노 치즈코’ 교수와 어쩌면, 저는 사고 방향이 동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에노 교수님은 (적어도 저에게는) ‘일생의 스승’과는 거리가 멀(不向き) 겁니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의 낙망과 광기 (0) 2025.02.11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싶은 것 (0) 2025.02.10 환대하는 학교 (0) 2025.01.25 상식에 다시 한번 힘을 (0) 2025.01.25 티비 드라마로 보는 선망 직업 (0) 2025.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