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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설과 민주정의 성숙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1. 14. 15:10
하루하루 정치적 사건이 줄 잇는 현실 속에서 칼럼을 쓴다는 건 여간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전화위복’일 것이다. 그만큼 정치적 상황이 유동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인으로서의 자질 문제로 실직한 바 있는 효고현 지사가, 어떻게 SNS에서 압도적인 지지세를 얻어 재당선되었는지 의문이었는데, 일련의 SNS 전략을 수주한 홍보업체 대표가 그 내막을 공개해 버리는 바람에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이 제기되는 등의 전개가 펼쳐지고 있다.
‘정치에 수반되는 고름’이 이렇게 터져 나온 덕분에 ‘옳다거니, 선거 제도가 이런 식으로 썩어 가는 것이로군’ 하는 점이 가시화되었다. 이 또한 ‘다행인 일’로 꼽아도 좋을 것이다.
지난여름 도쿄도지사 때나 이번 고베현 선거에서도 보듯이, 어떤 후보자는 공직선거법이 미처 상정하지 못한 협잡질만 쏙쏙 골라 행함으로써 선거를 대혼란에 빠뜨리기는 했으되, 공직선거법이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설계되었다는 엄숙한 사실을 다시금 전경화했다는 점만큼은 공적이 있다 할 것이다.
우리의 사회제도 대다수는 성선설에 근거해 설계되었다. 빗대어 표현하자면 시골 국도에 있는 무인 판매소와 같다. ‘사과 5개에 300 엔’이라고 간판이 내걸려 있으면 평범한 사람은 사과를 가져간 뒤 물건값을 놓아둔다. 하지만, 가끔은 ‘시스템의 구멍을 찾아내 악용하는 인간(해킹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있는 대로 사과를 절취하고, 결국에는 거기에 있던 물건 대금도 훔쳐 간다. 해커들은 ‘성선설을 믿는 게 바보다’ 하며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그 뒤 사과 농가가 이를 교훈 삼아 점원을 둔다든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다든지 하는 비용이 상품 가격으로 전가되어, 결국 ‘사과 5개 당 500 엔’하는 식으로 값을 올리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해커가 가져간 몫을 양민이 분담하는 셈이다. 따라서, 제도의 구멍을 찾아내 자기 이익을 늘리는 인간을 보고서 ‘영리하다, 뭘 좀 안다’는 식으로 호들갑 떠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 또한 그들에게 도둑맞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맨날 도둑맞기만 하면 분통이 터질 법도 하므로 ‘나도 오늘부터 해커가 되지 않을쏘냐’ 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제도의 구멍을 사람들이 찾아다니게 되면, 이번에는 사회제도를 전부 성악설로 고쳐 쓸 수밖에 없다. ‘모든 시민이 잠재적인 도둑’ 취급을 받으며 살게 되면 굉장히 침울해진다. 무엇보다 그 어떤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방범 비용’을 전 인원이 부담해야만 된다는 게 심각한 문제다.
이렇듯 생산성이 낮고, 기분 나쁜 사회에 필자는 살고 싶지 않다.
갖가지 제도는 성선설로 설계되어 있어야 압도적으로 효율이 높으며, 또한 생산성도 높다 . 무엇보다 성선설에 의거해 만들어진 제도는 이용자들에게 ‘그대 선할지어다’라는 수행적인 부르심*을 행하여 온다. ‘나는 당신이 선량한 인간이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제도 측에서 개인에게 보내오는 것이다.
(*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목소리. 이 개념이 서양에서는 라틴어의 voco, 독일어의 rufen, 영어의 calling 등으로 분화되었다. - 옮긴이)
이를 볼 때 ‘민주정에는 무수한 결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제도보다는 낫다’는 처칠의 이로(理路)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민주정은 만족스럽지 못한 제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권자의 상당수가 시민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과반수가 ‘어린애’일 경우 민주정은 파탄한다. 따라서, 민주정은 시민의 소맷부리를 붙잡고서 ‘부탁이니 어른이 되어 주게’하고 간청한다.
그런 친절한 제도는 흔치 않다. 제정이나 왕정, 귀족정 등은 하나같이 시민을 보고서 ‘계속 바보로 남아있거라’ 하는 말밖에는 하지 않는다. 통치자 한 명만 현자이고 나머지는 전부 우민이어야지 통치 효율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자는 거의 ‘시스터매틱’하게 (조직적・체계적으로 - 역주) 후계자 지명에 실패한다. 그리고, 독재제는 어떤 형태로든 ‘통치자도 바보지만, 나머지 전원도 바보’가 되는 카오스 속에서 붕락(崩落)한다.
통치기구의 복원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의 현자가 사회적인 층위의 어디에든 반드시 존재하여, 통치자가 부적절한 경우에 교대시킬 수 있는 구조’가 가장 적절하다는 점은 누구든지 알 수 있다.
민주정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적절한 제도’이기는 하지만, 불완전한 제도이다. ‘일정 수의 현자’를 특정 장소에 특정 방법으로 육성해 놓고 풀로 만들어두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강요나 협박 또는 이익유도를 통해 사람을 성숙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숙한 시민은 ‘조달’할 수 없으며, ‘간청’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불러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불완전’하다 할 때의 소이인 것이다.
우리네 사회 제도의 상당수가 성선설에 의거해 설계된 이유는, 제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그대 본성이여, 선할지어다’하고 간청해 오기 때문이다. 그 수행적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사악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미숙한 것에 불과하다.
제도란 살아있는 생물이다. 그것이 인간을 어떻게 성숙시키고, 세상을 어떻게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등장했는지, 가끔은 사량(思量)해 볼 일이다. (12월 16일)
(2024-12-16 14:5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무지의 즐거움』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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