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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도: 데이비드 린치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5. 1. 17. 16:07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무척이나 좋아하던 영화제작자였다. 그래서 내가 데이비드 린치 감독 필모그래피 중 가장 좋아하는 두 작품에 대해 써놓았던 것을 채록한다. 아마 20년 전쯤에 아시야 역 앞으로 이사 가서 살았던 무렵의 글이다.

    (아시야 시내 ‘라포르테’ 근처에 사셨던 이때가 또 마침 『망설임의 윤리학』, 『여자는 무엇을~』 등 길이 남을 명저를 잇달아 집필하셨던 시절이었답니다. 여기 이곳 역시 AI 번역을 통해서라도 부디 💁 읽어보시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옮긴이)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by David Lynch: Bill Pullman, Patricia Arquette, Balthazar Getty, Robert Blake, Natasha Gregson Wagner, Gary Busey, Robert Loggia)

     

    처음 봤던 건 벌써 3, 4년 전이다.

     

    ‘오오오오오’ 하고 소리를 지르게 하는, 게으른 해석을 허용치 않는 그 압도적인 영화적 리얼리티 앞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나온 데이비드 린치의 신작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있고 해서, 두 작품을 같이 봐야지만 뭔가 납득할 수 있는 점이 보이는 바, 그 점을 써둔다.

     

    어떤 ‘거대한 서사’가 있고 그것의 일부분밖에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때, 그 단편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상상하고 전율하는, 그런 일은 우리가 이야기를 향유할 때의 하나의 전형이다.

     

    그것은 ‘신의 시점’에서 일망부감적으로 이야기 세계를 일람하며 서사를 향유하는 경우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고로, ‘일종의 정형’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보통 그저 그런 영화제작자는 ‘일방 부감적’인 서사를 고집하는 반면에, 총명한 영화제작자는 ‘한 조각의 단편을 통해 전체를 상상케 하는’ 이야기 구조에 집착하며 공을 들인다.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주어진 단편을 통해 관객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는’ 향유 형식을 취하는 경우, 이때 ‘보이지 않는 세계’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쌓아두고 있는 ‘악몽’ 창고를 헤집어내, 제 손으로 지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이란 게 ‘다른 이가 해주는 말’은 도통 믿지 않지만, ‘자기가 만든 이야기’는 아무리 터무니없더라도 속속들이 굳게 믿는다.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악몽’은 자신의 ‘악몽’만큼 두렵지는 않다.

     

    가장 무서운 상황은, 그것이 ‘무섭다’는 점을 타자에게는 공감받지 못하는 종류의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의 것이다(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여럿이서’ 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공유된 공포’는, 단독으로 경험한 ‘전달 불능의 공포’에 비하면 농담 같아 보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영리한 영화제작자는 일부러 설명을 삼가고, 시간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키며, 관객이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만들도록 유도한다(쿠엔틴 타란티노나 기타노 다케시가 바로 그렇다).

     

    데이비드 린치 또한 관객이 ‘이야기 전체를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한 상황’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공황은 으레 ‘정보가 부족’할 때에, 사람들이 결국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버리는 것에서 비롯된다).

     

    린치는 관객을 패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선 초장부터 영화 등장인물들을 패닉에 끌어들인다.

     

    추리 소설 역시 마찬가지이듯이, 관객은 (똑같이 ‘정보의 부족’으로 고달파하고 있는) ‘탐정’ 역할의 등장인물에 초점을 두고, 그가 지닌 ‘정보에의 갈망’을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아, 이야기 속을 그와 동일한 보폭으로 걸어나간다.

     

    <로스트 하이웨이><멀홀랜드 드라이브> 모두, 어떤 중요 인물의 ‘아이덴티피케이션(동일성 확인 / 정체 밝히기 - 역주)’이 이야기의 날실이라는 점은 변함 없다. 그리고, 그 ‘신원 조회’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탐정 역할’을 맡은 등장인물 그 자신이 ‘실종’되어 버리는 서스펜스 구조도 아주 많이 닮았다.

     

    나는 린치의 TV 드라마 <트윈 픽스>를 아직 보지 않았지만, 만약 그 특유의 설화 구조를 린치가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고집하고 있는 게 맞다면, 당연히 ‘트윈 픽스’에서는 FBI 수사관을 맡은 카일 맥라클란이 범인을 검거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실종’한다는 화형이 채용되었을 것이라 본다. (, 상당히 기대가 된다. 오늘 밤 츠타야에 가서 빌려 와야겠다)

     

    관객을 어떤 인물에 동조시켜 영화적 서사 속에 발을 들이게 한 뒤, 그 인물을 ‘없애고서’, 종착점 없이 부유시킨다. 린치가 채용하고 있는 서스펜스 법칙은 아마 그런 것일 테다.

     

    이러한 서스펜스 유발은 ‘소설’로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화자’가 ‘사라지는’ 사태는 소설에서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자’가 차례로 딴사람이 된다는 그런 형식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나 다자이 오사무 등 전례가 상당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 같은 경우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화자’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누가 보고 있는지 모를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겉돌며’ 나가다가, ‘화자 그 자체’, 이야기의 질서를 유지하는 최후의 근원을 ‘없애는’ 대업을 영화는 구사할 수 있다.

     

    아이디어만 놓고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오락 영화’로서 실현시키는 일은 거의 절망적으로 어렵다. 데이비드 린치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현시켜버린다.

     

    엄청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 by David Lynch : Naomi Watts, Laura Elena Harring, Justin Theroux)

     

     

    <로스트 하이웨이>를 ‘일간에 완벽히 해석하겠다’고 예고해놓은 뒤에 시간은 속절 없이 흘러가, 이러구러 하는 사이에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나왔다.

     

    이 영화 역시 <로스트 하이웨이>와 마찬가지로, 시종일관 숨막히는 긴장감이 있고, 서사성이 풍부하며, 오락 작품으로서 완성도가 있는 한편, 무엇보다, 일체의 해석을 단호히 거절하고 있다.

     

    이대로 영화가 끝나버리지 않기를, 1초라도 더 영화가 계속되기를 기원했건만, ‘어떤 내용의 영화였어?’라는 질문을 혹시 받는다면, 말문이 막혀서, 할 말이 없어진다.

     

    내용이 하나도 없는 영화에서도 ‘교훈’을 끄집어내는, 말하자면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조리의 영역으로 회수하는 게 나의 지적인 ‘지병’이기는 하지만, 그런 우치다 표 병적 해설벽을 갖고서도, 데이비드 린치한테는 어림 없다.

     

    걸출하다.

     

    그럼에도 딱 한 가지는 말할 거리가 있다. (옴팡지군)

     

    그건 바로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점이다.

     

    인간의 숙명에 대한 영화라든가 욕망에 대한 영화, 사랑에 관한 영화, 혁명에 관한 영화, 전쟁에 관한 영화 등등…. 그러한 ‘…에 관한 영화’일 경우, 나는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영화’는 상당히 버겁다.

     

    영화는 그 기원부터 ‘메타 영화’로 향하는 회로를 지니고 있다.

     

    야심찬 영화제작자는 바로 그런 이유로 ‘영화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은 유혹에 저항하기가 어렵다.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 페데리코 펠리니의 <81/2>, <인터뷰>,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브라이언 드 팔마 <침실의 표적>,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쿠엔틴 타란티노 <저수지의 개들>,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 존 워터스의 <세실 B. 디멘티드> 등….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나 마티외 카소비츠, 가이 리치, 브렛 래트너가 ‘영화에 대한 영화’를 찍게 될 것이다.

     

    영화에는 19세기 말이라는 ‘생일’이 있다.

     

    그것은 본디 ‘현실에 관한 영화’였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홈 드라마 장르에서 출발했다. 이 작품들은 ‘이미 확고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뤼미에르 공장, 루이 뤼미에르 일가, 라 시오타 역을 걷는 뤼미에르 부인… 그리고 기사들이 찍은 세상의 광경)에 대한 증언이며 기록이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는 세월동안 영화 그 자체가 ‘확고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화해 버렸다.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 레퍼런스에 의해 지지받는 일 없이 자립하는 기호가 된 것이다.

     

    어떠한 ‘리얼리티’에도 근거하지 않지만 ‘리얼’을 자처하는 것.

     

    그것이 ‘영화에 대한 영화’가 비추어 내는 것이다.

     

    그것에 가장 근접한 것이 ‘꿈’이다.

     

    영화는 꿈이다, 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할리우드는 ‘꿈 공장’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그럼에도, ‘꿈’이란 것은 영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일본어에서도 이중 의미를 가진 어휘다.

     

    이 말인 즉 우리가 자고 있을 때는 ‘이건 현실’이라고 여기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깨어 있을 때는 ‘이건 비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이른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영화에서 ‘꿈’을 다룰 때, 우리는 주로 두 번째 말뜻을 빌어다 쓰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찍는 영화 제작자들은, 그 어휘가 가진 전자의 뜻을 탈환하려고 하는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악몽 같은 영화’다.

     

    영화 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의’ 사건인지의 여부는 다름 아닌 ‘<멀홀랜드 드라이브> 속에서’ 의문시된다.

     

    우리는 ‘영화 속’이 비현실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비현실이어야 했던 영화’ 속에서 ‘현실성을 부정당한 것’을 수납할 그 카테고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잘 생각해 보시라.

     

    ‘비현실 세계’ 에서 ‘그 현실성을 부정당한 것’은, 우리가 ‘현실/비현실’이라는 이분법에 익숙해 있는 한, ‘현실’ 말고는 달리 그것이 소재할 장소를 갖고 있지 않다.

     

    데이비드 린치가 시도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데이비드 린치는 우선 영화 속에서 마음껏 사실적인 《현실》을 그린다.

     

    그 묘사가 너무나 실감나므로, 우리는 영화 감상자가 늘 그러듯이 ‘이 영화를 《현실》이라고 쳐 두자. 그러면 영화가 더 재미날 테니’ 하는 익숙한 약속 사항에 금세 적응해버린다.

     

    허나 린치는, 그러고 난 뒤 ‘영화 내적 《현실》’이 서서히 ‘영화 내적으로’라는 조건을 잃어버리고, 윤곽이 무너지며, 점차 그 《현실》성을 잃는 과정을 우리에게 경험케 한다. 집요하게, 괴로울 정도로 집요하게.

     

    그러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영화 내적으로 《현실》이었던 것’, 그것이 ‘비현실’이라는 점을 우리는 숙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 안에서 ‘비현실’이었다는 점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어디로 향하면 될까?

     

    ‘영화 속에서 《비현실》로 단죄된 것’은 우리의 《현실》 세계에 ‘불법 존재’하는 것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어처구니 없는 교지(狡知).

     

    ‘영화 속’은 어떠한 황당무계라 할지라도 허용되는 ‘무정부적인 세계’여야만 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유열하고 향수해 왔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아까 그 ‘무정부적인 세상’에서, ‘무언가’가 ‘꿈 속 세상에서의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면’, 그러한 ‘꿈 난민’을 수용할 수 있는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입장은, 감상자인 우리밖에 없는 셈이다.

     

    영화는 당돌히 막을 내린다.

     

    영화 속에서 ‘무언가’가 추방된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 내적 세상’은 그 고유한 질서를 회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 ‘무언가’는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데이비드 린치는 악몽의 구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로스트 하이웨이><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반드시 봐야 한다.

     

    (2025-01-17 09:1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무지의 즐거움』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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