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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인정하지만 친절한 사람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2. 30. 22:05

    사단법인 호보쿠의 ‘희망의 마을’ 프로젝트를 위한 크라우드 펀딩이 곧 마감된다. 11월 현재 달성도는 40%를 넘은 상황으로 역부족이다. 이러한 가운데 응원 메시지를 부탁받았으므로, 썼다.

     

     

    어려운 사람을 선뜻 도와줄 수 있는 이란 대체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물론, ‘정이 많은 사람’이다. ‘다정한 사람’, ‘공감력이 높은 사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아마 그런 식으로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중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박정하고, 배려심이 없고, 공감력이 부족하며, 상상력이 결여되었다. 일부러 겸손을 차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한두 번 들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다양한 지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예 사재를 털어서 도장과 학숙을 세우고, 이를 지역 사회의 거점으로 만들어 나갔던 인간이므로, 나를 까딱 잘못 보다가는 ‘사회활동가’인 줄로 아는 사람도 혹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금 말해두는데, 나는 ‘인정 많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다른 이의 마음속을 도무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속’은 잘 모르겠지만, ‘배가 고프다’든가 ‘춥다’, ‘아프다’든가 하는 건 안다. 이것은 실감 나게, 절실히 안다. 정말 고통스러울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뭐라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철학적 스승은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사람이다. 레비나스 선생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로써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 하룻밤 잘 곳을 내어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줄 것’에 온 힘을 다하라고 썼다. 분명히 ‘이 이상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까지는 쓰여 있지 않다. 하지만 상담을 들어준다든가, 트라우마적 체험을 치유해 준다든가, 세계에 수리적 질서*를 구현한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 레비나스 선생은 긴급성을 두지 않았던 듯싶다.

     

    나는 레비나스 선생의 책을 30대 초엽에 처음으로 접하였는데, 읽고서 정말 뭔가 희망의 서광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과잉된 공감과 동질성을 요구하는 일본 사회에서 주야장천 ‘우치다, 내 기분도 한 번만 이해해 줘라’ 하고 소맷부리를 붙잡고서 애처롭게 간원하는 이들을 받아주는 데에 완전히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비인정하지만 친절한 사람’으로 남기로 했다. 물론 ‘인정이 많으면서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게 훨씬 낫지만, 그만 해도 감지덕지다.

     

    ‘희망의 마을’ 프로젝트를 오쿠다 씨로부터 소개받았을 때, 몹시 기뻤다. 오쿠다 씨는 인간에 관한 통찰력이 있으니만큼 나를 한눈에 보고서는, ‘이 사람, 공감능력이 아예 없구나’ 하는 걸 알아챘을 터이다. 그럼에도 ‘아무렴 어때’ 하고 넘겼다. 오쿠다 씨는 아주 현실적인 인물인지라, 나 같은 사람을 참가시켜서 몇 명은 굶주림에서 벗어난다든가, 몇 명이 하룻밤 잠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별문제는 없겠거니, 했던 것이다.

     

    나는 타인에게서 선의를 기대받는 게 괴롭다(가지고 있는 선의가 없으니까). 하지만, ‘좋은 사람’은 못 되어도,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오쿠다 씨의 일을 거들어줄 수는 있다.

     

    오쿠다 씨가 일본의 사회지원 사업 분야에서 개척한 가장 커다란 공적은 ‘꼭 좋은 사람만이 지원 참가 조건에 들 수 있는 건 아니다’라는 지견을 가르쳐 준 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24-11-11 19:0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무지의 즐거움』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옮긴이 노트】

     

    *mathematical order; 인간의 설계로 말미암아 세상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제 정의(올바름)를 실현하려는 시도를 명명하기 위해 우치다 선생이 지어낸 말. 비근한 예로 공산주의 혁명 등이 있다. 한편, 기획적・계산적 지능을 실제 신체 감각보다 우위에 두는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사용된다고도 할 수 있음.

     

    **‘비인정(非人情)’은 일본의 근대문학가 나쓰메 소세키가 지어낸 말이라고 하는데, 우치다 선생님께서 주목하여 많이 쓰시는 말씀입니다. 비정하다거나 몰인정한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참고자료입니다)

    더보기

    ‘비인정’(非人情)이라는 말이 나쓰메 소세키의 조어라는 사실이 침상에서 떠올랐다.

     

    소설 『풀베개』는 ‘비인정’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철학적 고찰을 담은 내용이다.

     

    책머리의 잘 알려진 문장을 인용하겠다.

     

    “괴로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떠들어 대기도 하고 울어 대기도 하는 것은 인간 세상에 으레 있는 일이다. 나도 30년간 줄곧 그렇게 해 와서 이제 아주 신물이 난다. 신물이 나는데도 또 연극이나 소설로 같은 자극을 되풀이해서는 큰일이다. 내가 바라는 시는 그런 세속적인 인정을 고무하는 것이 아니다. 속된 생각을 버리고 잠시라도 속세를 떠난 마음이 될 수 있는 시다. 아무리 걸작이라도 인정을 벗어난 연극은 없고, 시비를 초월한 소설은 드물 것이다. 어디까지나 속세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그것들의 특색이다. 특히 서양의 시는 인간사가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른바 순수한 시가도 그 지경을 해탈할 줄 모른다. 어디까지나 동정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정의라든가 자유라든가 속세의 상점에 있는 것만으로 일을 처리한다. 아무리 시적이라 해도 땅 위를 뛰어다니고 돈 계산을 잊어버릴 틈이 없다. 셸리가 종달새 소리를 듣고 탄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쁘게도 동양의 시가에는 이를 해탈한 것이 있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노라니

    한가로이 남산이 들어오네.

     

    단지 이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한 광경이 나타난다. 울타리 너머로 이웃집 처자가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남산에 친구가 봉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가로이 속세를 벗어나 이해득실의 땀을 씻어낸 마음이 될 수 있다.

     

    獨坐幽篁里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홀로 그윽한 대숲에 앉아

    거문고 타다 다시 길게 휘파람 부네

    깊은 숲이라 남들은 알지 못하고

    밝은 달만 찾아와 서로를 비추네

     

    단 스무 글자 안에 족히 별천지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 천지의 공덕은 『호토토기스』나 『곤지키야샤』의 공덕이 아니다. 기선, 기차, 권리, 의무, 도덕, 예의로 기진맥진한 뒤 모든 것을 망각하고 푹 잠든 것 같은 공덕이다.”

     

    이런 문장을 국어 교과서에 실어서 중학생에게 읽도록 하는 것이 너무하지 않은가 싶지만, 중학생 때 이 글을 읽고 ‘속세의 상점’이라는 한 단어에 무심결에 가슴이 찌르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한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 글의 영향일 것이다. 『풀베개』의 화자인 ‘나’는 그림 도구를 챙겨서 비트적비트적 산속 온천에 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잠시 이 여행 중에 일어난 일과 여행 중에 만난 사람을 노의 구조와 그 배우의 연기로 가정해 보면 어떨까. 완전히 인정을 버릴 수야 없겠지만, 원래가 시적으로 이루어진 여행이니 비인정을 하는 김에 되도록 절약하여 거기까지는 이르고 싶다. (……) 나도 앞으로 만나는 사람을, 농사꾼이든 장사꾼이든 면서기든 할아범이든 할멈이든 모두 대자연의 점경(點景)으로 그려진 것이라 가정하고 보려고 한다. 하긴 그림 속의 인물과 달리 그들은 각자 멋대로 행동할 것이다. 보통의 소설가들처럼 멋대로 된 행동의 근본을 캐고 들어 심리작용에 간섭하거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따지고 들어서는 속된 일이 된다. 움직여도 상관없다. 그림 속의 인간이 움직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소세키의 비인정은 말을 바꾸면 ‘미적 생활’을 의미하는데 그때의 ‘미적’을 ‘속세의 상점’의 잣대로 재어서는 속되게 된다. 여기서 ‘미적’은 ‘초연’이라는 의미이다. 소세키는 『풀베개』를 쓰기 전에 『초사』를 탐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풀베개』에 넘쳐흐르는 무수한 한시적 어구 중 많은 것이 『초사』에서 유래했다. 소세키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메이지 시대 일본의 풍경을 기술하기 위해 기원전 4세기 문인의 어법을 먼저 배웠다. 이 ‘거리감’이 아마도 소세키의 ‘미적’인 것의 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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