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스 레터) 어차피 A..인용 2024. 10. 31. 14:51
結婚しなくても幸せになれるこの時代に、私は、あなたと結婚したいのです。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되어라
대통령 스피치라이터의 조건은 무엇일까? 거두절미하고 얘기하면, 고스트라이터(Ghost Writer)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인수위원회를 거쳐 참여정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건 내 연설문이 아니야.”
너무나 치명적인 지적이었다. 스피치라이터에게는 ‘나’가 없다. 자기를 버려야 한다. 언젠가 어느 고위 공무원이 ‘공무원에겐 영혼이 없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스피치라이터야말로 자기 영혼이 있어선 안 된다. 대신, 연설하는 사람에 빠져 살아야 한다. 그 사람에게 빙의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아바타가 되어야 한다. 연설 현장에 가면 그분은 어떤 생각, 무슨 말을 할까? 그것만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의 논리 전개 방식과 고유의 표현 방식, 어투나 호흡, 즐겨 쓰는 용어와 농담까지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 그래서 특유의 개성과 색깔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누가 봐도 이 연설문은 그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하는 것이다.
스피치라이터의 두 번째 조건은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귀를 알아먹어야 한다. 알아듣는 게 쉬운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대통령의 구술을 함께 들어도 열이면 열 모두 해석이 다르다. 그중에 분명 답이 있기는 한데, 아무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대통령은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거야.” “이 말을 꺼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도는 이것이야.” 십인십색이다.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대충 깔아뭉개고 앉아서 쓸 일이 아니다. 필요하면 다시 구술을 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그 밖에 스피치라이터로서 조건이 한두 가지 더 있을 수 있다. 몸이 튼튼해야 하고, 약간의 순발력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간혹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연설문을 써야 하는 때도 있어서 그렇다. … 아울러 스피치라이터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설사 미진하다 싶더라도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최선을 다해 초안을 준비했다, 다 찾아봤고 더 이상 나올 새로운 내용은 없다, 우려되는 것도 다 챙겼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대통령은 최상의 서비스를 받고 있다.’ 대통령에게 그런 자신감을 보이고, 대통령은 그런 스피치라이터를 신뢰해야만 함께 일할 수 있다. 스피치라이터는 단순히 연설문만 쓰는 사람이 아니다. 연설문을 쓰는 과정에서 대통령에게 들은 내용 가운데 다른 비서실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해당 부문에 알려주는 통로 역할도 해야 한다. 연설문에서 ‘무엇을 하겠다’고 대통령이 언급했는데, 해당 부처에서 액션플랜을 갖고 있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스피치라이터가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얻는 것도 많다. 무엇보다 ‘대통령’이라는 시대의 거인에게 배울 수 있다. 연설문 쓸 때처럼 대통령의 생각을 제대로 배울 기회는 없다. 자부심도 크다. 대통령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자부심이다. 연설비서관실은 늘 대통령의 최근 생각을 좇는다. 각종 행사나 회의 혹은 식사 자리에서 대통령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챙겨서 좇아야 한다. 연설문을 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잘하면 연설문은 거저 써진다. … 이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 생각이 뛰어난 사람은 많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매일매일 이분들의 생각을 좇아간 사람만 쓸 수 있다. 그러니 스피치라이터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글쓰기』 2판 221~226쪽.
“청와대 근무를 해 보면 정말 새벽부터 나가서, 일주일 내내 쉬는 날은 토요일 오후밖에 없어요. 그거를 계속 최소한 1년 동안은 뺑뺑이를 도는 건데. 그걸 지탱하는 힘이 뭐냐면 내가, 앞에 서 있는 대통령을 모시고 뭔가 이 나라로 하여금 조금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데 동참하고 있다라고 하는 나름의 사명감과 자부심에서 오는 흥분이 있거든. 그, 마라톤 뛰는 분들이 정말 힘들 때 러너스 하이라는 게 온다고 그러잖아요, 어느 순간이 넘어가면. 도파민이 미친 듯이 나오고 미친 듯이 일하는 거야, 대통령실에 있으면서. 그게 없으면 정말 너무 힘들어요.”
(19:56 ~ 20:33)
어떻게 '새 연주법'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불평할 수 있는가? 그게 무언데? 돈이 가득 든 지갑이라도 되는가? 길을 걸어가다가 '새 연주법'을 주울 수 있는가? 누군가가 떨어뜨린 것을 줍기만 하면 되는가? 그 피아니스트는 알레이쳄(Sholom Aleichem)의 농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아시다시피, 알레이쳄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재능이란 돈 같은 거야. 그게 있든가 아니면 없든가, 둘 중의 하나지." 나는 이 위대한 만담가가 여기에서는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돈이란 왔다 갔다 하는 것이어서, 오늘은 없지만 내일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재능이 없다면 그 상황은 심각하고 오래 지속된다.
그러니 당신이 새 연주법을 찾을 게 아니라, 그것이 당신에게 찾아와야 한다. 어떤 음악 작품을 위한 새 연주법은 대개 인생의 다른 측면들이나 인생 일반에 대하여 새로운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게 마련이다. 나는 그런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유디나라든가 소프로니츠키처럼 말이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무릇 연주가란 하나의 실행자다. 작곡가의 의지를 정확하게 실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 이미 있는 것만 들려줄 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재능이 있는 연주가는 작품의 참모습을 언뜻언뜻 보게 해 준다. 그 자체로 천재적인 작품의 진실이 그를 통해 반영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연주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로 변화가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지 어느 때부턴가 내 연주가 한결 자유로워진 점은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생활의 속박과 일체의 군더더기, 본질에서 마음을 돌리게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안에 가둠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그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시바타 선생에게 무심결에 말한 ‘장어’설을 내가 몇 번이나 여기저기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다. 그 시바타 선생과 번역과 문학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 두근두근할밖에.
내가 ‘문학연구자’나 ‘철학연구자’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경력 사기인데 ‘번역가’라고 불리는 것에는 천하에 부끄러운 점이 없다(아무도 불러 주지 않겠지만).
번역을 너무 좋아해서 대학 졸업과 동시에 히라카와 가쓰미와 번역회사를 차렸을 정도이다.
기술번역과 저렴한 추리극과 아동서를 콧노래를 부르면서 막 번역하였던 나의 ‘happy go lucky’ 번역가 인생은 레비나스 스승의 책을 번역하면서 확 바뀌었다. 레비나스를 번역하는 일이 얼마큼 놀랄만한 경험이었는지 지금까지 제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역자 자신이 지적 성장을 이루는 놀랄만한 체험은 아마도 번역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만 이해할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있다면 현대 일본에서 시바타 모토유키 선생 이상의 사람은 없다.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덕에 시바타 모토유키 선생과 번역이 가져오는 기쁨과 놀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진행한 대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말았다.
청중석에서 재미있는 질문이 많이 나와서 즐거웠다(“우치다 선생님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라든지).
'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려읽기) AI, 도시, 서울 (0) 2024.11.09 (가려읽기) 얼마면 돼? (0) 2024.11.05 (가려읽기) 선과 곱셈기계 관리술 (0) 2024.10.30 (유인물) 슈퍼 선거의 해 리와인드 (0) 2024.10.28 (유인물) Yours Truly, 2027 (0) 202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