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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얼마면 돼?
    인용 2024. 11. 5. 13:31

     

    축재의 충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렇게 보면 화폐의 축적이라는 행동 양식은 이 선택권 다발을 끌어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화폐가 선택권의 다발인 이상 그 축적은 ‘선택의 자유’를 확대한다. 화폐가 가진 선택권은 사람들이 그 화폐에 대해 주는 것이므로 화폐를 많이 소유하면 사람들의 갈망과 호의를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화폐를 소유하는 것으로, 자아를 더 보강하고 허영을 채우는 천박한 행위를 ‘선택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훌륭한 행위로 바꿔치기하는, 자기기만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 행동 양식은 수험생과 똑같은 결점을 가진다. 자아를 상실하고 자신이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아니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을 모으면 모을수록 그 선택의 자유를 잃을까 두려워 모은 돈을 쓸 수도 없게 된다.

     

    그래서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려고 모아 둔 돈 때문에 오히려 선택의 자유를 잃게 된다. 이 지경에 빠진 사람을 ‘수전노’라고 한다. 현금만 쌓는 것으로 안심하는 단순한 수전노는 많지 않지만, 현금화가 가능한 금융 자산이나 가처분성이 높은 재산을 축적하는 것까지로 범위를 넓히면 수전노적 행위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아니 적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장래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모아 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런 대비가 전혀 없이 생활하는 것도 위험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약을 위해서 축적한다는 행동의 논리는 ‘도대체 얼마나 축적해야 만약을 위해 충분할까’와 같은 문제를 만난다. 100만 엔을 모으니 200만 엔이 없으면 불안하고 200만 엔을 모으니 400만 엔이 없으면 불안하고 400만 엔을 모으니 800만 엔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충분히 축적해서 내 인생은 이제 괜찮다 싶어지면 이번에는 내 아이의 인생이 걱정되고, 아이의 인생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손자의 인생이 걱정된다.

     

    결국 ‘얼마를 모으면 충분할까’에 대한 해답은 ‘그 사람의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이다. 하지만 아무리 모아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으면 모을수록, 여유가 생기면 생길수록, 걱정되는(신경이 쓰이는) 범위도 덩달아 늘어나 불안은 더 커진다. 모으는 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은 불안이 줄었을 때이지 모은 금액이 충분하게 되어서가 아니다. 불안이 가시지 않으면 모으는 것도 멈출 수 없다.

     

    이처럼 불안이 있는 한 단순히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어도 돈을 축적해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려는 욕구는 끝이 없다. 그렇다면 이 행동 양식 또한 자신에게서 발현된 행동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재물 축재에 마음을 빼앗겨서 자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인과의 순서는 아마도 반대일 것이다. 자신을 잃지 않은 사람은 축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있으면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도까지만 모으면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애당초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재물을 쌓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끝이 없는 걱정거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상황에서 돈을 축적하려는 욕구도 결국은 선택권의 다발을 모으는 화폐 소유로 자아를 보강하겠다는 천박한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서 이기심은 어디를 가나 자기혐오를 은폐하기 위해 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쟁취하려고 쟁탈전을 벌인다.

     

    야스토미 아유미, 단단한 경제학 공부: ‘선택의 자유’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250~253.

     


    한번 읽고서 알 수 있듯이, 페미니즘에서의 가장 새로운 견해는, 내 세대로서는 매우 ‘그리운’ 어법으로 적혀 있다. 크리스틴 델피는 페미니즘 본질주의의 이데올로기성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자연계와의 관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끼리의 관계를 사물들끼리의 관계 혹은 사물과의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명백한 특징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각 개인이 그들의 생활을 표출하는 방식은, 즉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들이 누구인가는 그들의 생산에, 즉 그들이 무엇을(was) 생산하는가, 아울러 또한 어떻게(wie) 생산하는가에 합치한다.

     

    이 문장의 ‘그들이 누구인가’를 ‘그들의 젠더가 무엇인가’로 바꾸면, 마르크스의 명제는 그대로 델피의 명제가 된다.

     

    혹은 ‘분업과 함께, 정신적 활동과 물질적 활동이ー향유와 노동이, 생산과 소비가ー각기 다른 개인의 일이 될 가능성, 아니 현실성이 부여되어(……) 그리고 그것들이 모순에 빠지지 않아도 될 가능성은 오직 분업을 다시 한 번 포기하는 것 안에만 존재한다’라는 구절의 ‘개인’을 ‘젠더’로 고쳐 써도 마찬가지다.

     

    델피에게 있어서, 페미니즘은 말하자면 150년 걸려 마르크스로 회귀한 것이다. 델피의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에 의하면, 젠더는 계급 사회에 기인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젠더 철폐는 계급 사회의 철폐와 동시적으로 달성된다(레닌을 믿는다면, 그것은 ‘부르주아의 폭력 장치인 국가의 철폐’도 의미할 것이다). 실제로 델피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가부장제적 생산, 재생산 시스템이 철폐되지 않는 한, 여성은 해방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어떤 식으로 생겨났든 간에) 현재 알려져 있는 모든 사회의 중핵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현재 알려져 있는 사회 전부의 기초를 완전히 뒤집어엎을 필요가 있다. 이 전복은 혁명 없이는, 즉, 현재 다른 인간들이 쥐고 있는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정치적 권력을 탈취하는 것 없이는 실현할 수 없다.

     

    아름다울 정도로 명쾌하다. 여기에는 더 이상 여성성이나 모성에 관한 환상은 흔적조차 없다. 성에 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가상은 사라지고, 주인과 노예 간의 적나라한 권력 투쟁이라고 하는 사회 관계만이 남는다.

     

     

    페미니즘은 ‘부권제의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부권제에 가담해 수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원리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행동한다’고 하는 신빙성 위에 성립하고 있다. 따라서 그 집단 속에서 가장 올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장 무자비하게 억압되어 있는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페미니즘적인 사회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사회에서, 그 판단과 행동의 올바름을 담보하는 것은 ‘실제로 억압받고 있다’고 하는 사회적 조건뿐이고, 그 이외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생득적으로 높은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 사회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판단을 내리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면, ‘부권제의 가담자이고 또한 수익자이기도 한 상당히 머리 좋은 사람’이 부권제의 구조와 기능에 관하여 페미니스트 이상으로 깊이 이해하고, 부권제를 ‘개량’하는 것이 가능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에 엄청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 화 내는 이유를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년이 지난 뒤에, ‘페미니즘 진영이 총체적으로 붕괴했을 때, 그때까지는 아군처럼 행동하는 작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 뒤집듯이 배신했지만, 처음부터 줄곧 페미니즘에 대해 악담을 하던 우치다 같은 작자는 마지막에는 상당히 페미니즘 옹호로 돌아섰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변변치도 않은 예언이지만, 이러한 변변치도 않은 예언은 사실 잘 맞는 경우가 많다.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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