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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Mon corps, mon choix, mon avis인용 2024. 11. 11. 14:50
미래의 제국은 마음의 제국이다. - 윈스턴 처칠
삼촌이 보낸 사춘기라는 호기심 많은 시절의 한 편린이 고스란히 폐기돼 있는 그 벽장 속에는 이른바 고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보다는 무협지나 통속소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많은 무협지와 통속소설에 꽤 재미를 붙였으며 삼촌의 의협심과 감수성도 바로 그 책들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독서가 취미라고 말은 해도 이모에게는 책이 그다지 없었다. 여고 시절 하얀 책상보로 덮여 있던 앉은뱅이 책상의 책꽂이에 『부활』과 『좁은 문』 『적과 흑』 등이 꽂혀 있긴 했지만 책 임자가 그 책을 얼마나 열심히 봤나 알아보기 위해 꼭 책의 밑바닥을 뒤집어서 책두께의 더럽혀진 선이 어디까지인가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는 나는 그 책들의 책장이 결코 20페이지 이상은 넘겨진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 그 책을 읽은 뒤 며칠 동안 나는 여자의 음모가 불에 타는 영상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여자들을 무심히 보아넘겼는데 그 뒤부터는 자꾸만 ‘음모를 불태워라!’는 소설이 연상되었다. 목욕탕에 갔다가 마침 그때 내 눈에 띄었다는 이유만으로 음모를 불태우는 가학적 영상에 출연하게 된 낯선 음모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일도 많아졌다. 그 죄책감이 절정에 이른 것은 내가 마침내 나와 관련있는 한 특정한 음모를 만나 상상 속에서 자행해버린 그 대담한 화형식 이후였다.
그 음모는 삼 년 전 담임 선생님이었던 노처녀의 것이었다. 그는 신경질과 히스테리라는 야만적인 방법으로 2학년밖에 안 된 아이들의 공포심을 완전히 장악했다. 늘 대나무자를 갖고 다니면서 아무때나 그것을 세워서 아이들의 손등을 때리는 것을 ‘편달’의 실천으로 여겼던 그녀는 단지 자기가 우아하게 풍금을 칠 때 무감동하게도 창밖을 보았다는 이유 하나로 백묵 두 개를 씹어서 삼키게 했으며 “너희들 그러면 시험본다, 부모님 부른다. 운동장 서른 바퀴다” 하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는가 하면 “너희들은 다 도둑놈이야, 미친 새끼들이야, 개자식이야” 하는 말은 수백 번씩 했다.
나는 볕이 들지 않는 뒷마루로 가서 고전읽기 경시대회에 대비하여 단테의 『신곡』을 읽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외국 이름이 페이지마다 새로 나오고 주석이 너무 많아서 내용이 쉽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따분한 책이었다. 몇 장 읽기도 전에 하품이 나왔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아홉 가지 지옥이며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 외어야 하는데 주인공은 외울 것이 많아지면 아이들이 더욱 괴로워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없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자기 견문만 넓히고 있다. 졸음이 밀려들었지만 추석이 지나자마자 곧바로 고전읽기 경시대회가 있으므로 꾹 참고 읽어야만 했다.
아이들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명절이나 휴일이 오면 아이들이 휴일의 마지막날을 바로 그 다음날 닥칠 시험이나 숙제검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망쳐버리도록 머리를 짜낸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마지막날 저녁을 제외하고는 휴일 내내 마음껏 놀아버림으로써 과중한 숙제를 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실력 향상을 위해서라는 선생님의 명분을 매번 실패로 만든다. 그것을 알면서도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노는 것을 막을 순 없어도 노는 동안 불안하게는 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다음 명절 때에도 시험과 숙제에 대한 부담을 지우고서야 아이들을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는 휴일 속으로 놓아보내주며 그것이 선생님들로서는 아이들을 향한 일종의 존재증명이다.
그런 선생님들의 존재증명이 나에게는 필요가 없다. 엘리트라고 하는 집단은 지금 보초병처럼 졸고 있는 장군이 같은 아이와는 처지가 다른 것이,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끊임없이 긴장하며 예지의 칼날을 벼려놓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비록 단테가 『신곡』을 이것보다 열 배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썼다 해도 나는 엘리트의 소명에 의해 자발적으로 고전읽기 시험준비를 할 것이다.
그러나 졸음은 엘리트에게도 쏟아졌다. 천하장사라도 자기의 눈꺼풀은 들어올릴 수 없다던 할머니 말씀에 다시 공감하며 나는 졸음을 쫓기에 바쁘다. 그동안 『신곡』을 얼마나 읽었는지 분량을 헤아리기 위해 책을 세워서 책바닥의 새까매진 부분을 재어도 보지만 그 까만 줄은 아직 면보다는 선에 가깝다. 감나무 밑으로 내려가서 바람이라도 쐬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책 위에 엎드려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나는 마루를 내려가 신발을 신었다.
감나무 아래로 걸어간 나는 가지 끝에 매달린 삼촌의 샌드백을 한번 건드려보았다. 샌드백은 생각보다 무거워서 내 주먹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그 샌드백을 제대로 맞혀서 샌드백으로 하여금 자기가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는 것은 물론 나의 첫 주먹에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먼저 정신집중이 필요하리라고 여겨졌으므로 샌드백을 두 손으로 잡고 잠시 그것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내게는 샌드백이 높았기 때문에 그 팔모양은 마치 슛을 하기 직전의 농구선수 같기도 했다.
정신집중의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집중하기 전까지는 듣지 못했던 어떤 소리가 불현듯 내 귓가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 소리를 아기가 칭얼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집중된 정신이고 해서 조금 더 집중해 들어보니 그것은 고양이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 『새의 선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음유 시인들이 우크라이나 지역에 떠돌아다녔다. 그들은 그 지역에서 리르니키 또는 반두리스티라고 불렸다. 어느 지방에서나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장님이었다. 왜 그런지는 또 다른 문제이고 여기에서 그 문제를 파고 들어가지는 않겠다. 간단히 말하면 그게 전통이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요지는 그들은 언제나 장님이고 자기 방어력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장님을 괴롭히는 것, 이보다 더 비열한 짓이 또 있을까?
그런데 1930년대 중반, 제1차 전(全) 우크라이나 리르니키-반두리스티 집회가 열린다는 공고가 나왔다. 모든 음유 시인들이 함께 모여 장래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스탈린이 말했다. “인생은 더 좋아지고 더 즐거워지리라.” 장님들은 이 말을 믿었다. 그들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역으로부터, 작고 잊힌 마을로부터 모여들었다. 집회에 모인 장님의 수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한다. 집회는 러시아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었고 이 나라의 산 역사였다. 모든 노래와 음악과 시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거의 모두 총살되었다. 불쌍한 장님들이 거의 다 살해되었다.
왜 그랬을까? 장님을 죽이다니, 왜 그렇게 잔혹한 일을 벌이는가? 그들이 발에 거치적거려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위대한 사업이 진행 중이고 완벽한 집단화가 이뤄지고 있으며 제정 시대의 부농 계급도 이미 파괴되었는데, 이 장님들은 내용이 수상한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 노래들은 검열에 통과된 것도 아니다.
이런 장님들에게 무슨 종류의 검열을 갖다 붙일 수 있을까? 장님이니까 수정되고 검열받은 교본을 쥐어줄 수도 없고 명령서를 글로 써줄 수도 없다. 장님에게는 모든 것을 말로 해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또 서류 한 장으로 정리해둘 수도 없다. 어차피 시간은 없다. 집단화, 기계화, 총살해버리는 편이 더 쉽다. 그래서 죽였다.
이 일은 비슷비슷한 사건 가운데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역사가가 아니니까 그저 내가 잘 아는, 너무나 잘 아는 일을 놓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필요한 모든 조사가 끝나고 모든 증거가 수집되면, 또 필요한 모든 서류로 확증되면, 이런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피해자들의 후손 앞에서라도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리라는 절대적 확신이 없다면 인생은 살 가치가 없을 것이다. 아까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떠나서 변방 지역으로 달아난 작곡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 그들은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공포에 떨면서 살았다.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친구들이나 친척들처럼 영원히 잡혀가게 될까봐 마음을 졸이면서 말이다.
(…) 작곡이 언제나 잘 풀리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장애를 겪는다 해서 여기저기 어슬렁거리고 하늘이나 쳐다보면서 영감이 섬광처럼 와주기를 기대하는 것에는 결단코 반대한다. 차이콥스키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서로 상대방을 싫어했고 의견이 일치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한 가지 문제에서는 생각이 같았다. 끝없이 작품을 써라. 큰 작품의 작곡이 잘 안 될 때에는 소품을 써라. 전혀 작곡을 할 수 없다면 무언가를 오케스트레이션하라.* 스트라빈스키도 이같이 느꼈을 것이다.
(* 제자인 에디슨 데니소프가 회상하기를, 쇼스타코비치는 작곡이 잘되지 않을 때에도 항상 무언가를 악보에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데니소프가 어느 날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쇼스타코비치가 책상에서 정신 없이 악보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데니소프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계속 써나갔다. 그러더니 다 쓴 악보를 모아서 북북 찢어버렸다. 데니소프가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곡은 도무지 되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기는 더 불편하다네. 그래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로망스 전곡을 오케스트레이션하기로 작정했지. 로망스 전집을 갖다 놓고 한 곡씩 편곡해나가면서 다 되기만 하면 찢어버리곤 한다네.” 이런 예에서 보듯이 그가 작곡을 하지 않는 순간에도 두뇌의 작곡 기능은 항상 작동 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내적 신경 흥분 상태는 그에게 흔한 경우였다. - 김병화)
스승인 오타키 에이이치의 「좌(座) 독서」라는 명곡이 있다. 이것은 독서에 수반하는 ‘앉아서 페이지를 넘기는’ 동작을 ‘댄스’로 해석한 것이다.
자자 댄스의 뉴모드
앉아서 춤추는
이름하여
좌 독서
리듬에 맞추어서
페이지를 넘기는
동작 훌훌
간단
좌 독서매우 경쾌하고 ‘전대미문 전무후무’한 댄스곡이다.
오타키 선생은 이때 독서가 교양, 정보, 문화 자본과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하셨다(역시 우리 스승님이시다). 그런데 『나이아가라 캘린더』 발매 당시, 스승의 혜안을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책을 펼치고 팔락팔락 페이지를 넘기면 그것은 이미 독서이다. 독서에는 적어도 두 가지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문자를 화상 정보로 입력하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입력한 화상을 의미로 해독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인습적으로 독서라 부르는 것은 두 번째 공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상 정보가 뇌 안에 입력되지 않으면 우리는 문자를 읽을 수 없다.
007이 두 번 죽듯이 우리는 언어기호를 두 번 읽는다. 첫 번째는 화상으로, 두 번째는 언어기호로. 각각의 공정을 ‘스캔’(scan)과 ‘리드’(read)로 바꾸어 말해도 된다.
신문을 펼쳐서 대각선 읽기를 하는 것은 스캔이다. 문득 관심이 가는 문장이 눈에 들어와서 눈을 돌려 기사를 처음부터 읽는 것은 리드이다.
학교의 국어교육은 오로지 리드에 초점을 맞추고 교육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작가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여기서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魑魅魍魎을 어떻게 읽는지 쓰라’ 같은 물음에 대답하는 힘을 가리켜 국어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그보다 먼저 갖추어야 하는 스캔하는 힘의 육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본의 국어교육자들은 자각하고 있을까?
스캔이란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저 문자를 응시하는’ 것이다. 타자수가 손으로 쓴 원고를 의미도 모른 채 빠른 속도로 타이핑하듯이 문자 화상을 대량으로 그리고 고속으로 뇌 안에 입력한다. 스캔이라는 예비 공정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음의 리드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침 독서운동’은 아주 적절한 프로그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문자를 보는 것이다. 의미 같은 건 아무렴 어떻든 상관없다. 종이에 쓰인 문자를 화상으로 받아들이는 뇌 안의 신경 회로 속도를 올리는 것뿐이다. 이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교육 프로그램에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까지 국어교육의 기본은 ‘사서오경의 소독(素讀)’이었다. 소독이란 ‘오로지 한문을 음독하는’ 것이다. 의미 따위 어떻든 상관없다. 옛날 사람은 경험적으로 이 작업을 경유해야 ‘언어의 의미’를 해독하는 다음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음을 숙지하고 있었다.
재작년 오타키 에이이치와 함께 하는 첫 번째 세션(히라카와 가쓰미, 이시카와 시게키와 함께) 때 오타키 선생이 나루세 미키오의 『가을이 오다』와 『긴자 화장품』 두 작품을 먼저 보라며 건네주었다.
그때는 그것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오타키 선생의 영화 연구의 입구임을 알 길이 없었다. 왜 오타키 선생이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분석에 이토록 깊이 들어가게 되었는가. 그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120분에 걸쳐 라디오를 녹음했는데 아마 이 방송을 들은 여러분은 매우 놀랐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놀라움인지는 듣지 않으면 모른다.
오타키 선생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기성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곤란(거의 불가능)하다. 녹음이 끝난 후 대기실에서 오타키 선생이 ‘먼저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요미우리 자이언츠 프로야구팀의 미야자키 캠프 이야기를 인용하며 시작해서 한 개 음을 듣는 것만으로 오케스트라의 악기 구성을 안다는 이야기를 하셨을 때, 이것이 아침에 신칸센을 타고 오면서 생각한 스캔과 리드의 차이와 절묘하게 부합한다는 것을 깨닫고 경탄했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85~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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