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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인용 2024. 11. 21. 23:51
‘당신이 단 한 번도 나를 억압한 적이 없다는 것, 나에 대해 한 번도 우위에 서려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말해두지 않으면 안 돼요’라는 보부아르가 자신을 평가한 말에 대해 사르트르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자신을 당신보다도 뛰어난 인간이라고도, 당신보다도 더 지성적이라고도, 당신보다 행동적이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같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대등한 존재였어요. (……) 우리 사이의 대등성은 두 인간 사이의 사실상의 대등성이 아니라, 양성 간의 근원적인 대등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실제로 여기에 존재하는 두 사람 사이에 성차별 구조가 선구적으로 해체된 이상, 그것이 사회 전체로 보급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그렇게 믿었다. ‘사회주의 혁명이 필연적으로 여성해방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하는 두 사람의 예상이 현실의 정치 과정 속에서 파산한 뒤에도, 두 사람은 자신들과 같은 ‘근원적으로 대등한’ 양성 간의 관계가 언젠가는 만인에 의해 표준이 되리라는 점에 관해서는 마지막까지 낙관적이었다.
역사는 그런 면에서 잔혹하다. 실존주의의 지도자 커플이 예상했던 미래에 대한 예측은 대부분 빗나갔다.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여성의 해방이 실현되리라는 예측은(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반유대주의는 소멸하리라고 본 예측과 같을 정도로 극적으로) 빗나갔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같은 ‘근원적으로 대등한 커플’이 다수파가 될 때 우리의 세계는 더 이상 성차별적인 세계가 아닐 것이라고 본 예측도 빗나갔다. 분명히 ‘대등한 커플’은 많이 존재하지만, 그 대등성이 반드시 파트너의 지성이나 품격에 대해서 각자가 대등한 경의를 보임으로써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때 보부아르가 채택했던 ‘(1)단기적으로 남성적 가치관을 내면화함으로써 사회적 자산의 쟁탈전에서 살아남는다 (2)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남성적 가치관을 폐기한다’고 하는 2단계 전략은 첫 번째 단계만이 실현되었고, 두 번째 단계는 실현되지 않았다.
길게 여기까지 보부아르의 사상을 서술해 온 것은, 80년 전쯤 실존주의적 페미니즘의 단계에서 받아들인 코제브의 ‘주인과 노예 책략’이 그 이후에도 페미니즘에는 지하수맥처럼 흐르고 있고, 이 독성이 강한 책략의 무해화에 성공한 페미니즘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해 놓기 위해서이다.
‘남녀 동권’과 ‘모든 성차별의 철폐’의 사이에 있는 단계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적 가치를 잴 때, 복수의 도량형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단일 도량형으로 인간의 가치를 재는 사회’로의 전환이다. 내가 196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197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에는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이 단계의 차이의 의미를 그녀들이 그다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자니까”라는 이유로, 그 사회적 기능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회적 능력의 차이는 성차에 우선한다’고 바꿔 읽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회적 능력’이라고 불리는 익숙해진 단어는, 단적으로 ‘돈을 버는 능력’을 말하고, 그것이 만인에게 있어서 우선적으로 개발되어야 하는 인간적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은, 극히 한정된 역사적 조건하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페미니즘에 관한 논고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대략 ‘그런 것’이다. 나는 성차, 성 질서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능한 한 타인이 욕망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것이 인류학적으로 필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고 하는 프로이트적 질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질문이 성립하는 것은, ‘여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남자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남자는 알고 싶어 한다’고 하는 두 개의 전 단계가 구비되어 있는 경우에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적 무지와 그것에 활력을 주는 욕망은 결단코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욕망은 무지의 효과이고, 무지는 욕망의 효과이다. ‘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무지와 욕망은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서로의 꼬리를 집어삼키고 있다.
프로이트가 ‘여자의 수수께끼’라는 말을 쓴 것을 페미니스트들은 ‘젠더 블라인드니스’의 증거라고 간주한다. 하지만 이 프로이트의 구조적 무지야말로 욕망의 소재(所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욕망의 소재를 보여주는 능력’을 ‘예지’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이 사실에서 중요한 명제를 이끌어낼 수가 있다. 그것은, 인간은 무지라는 것에 의해서만 예지적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 속에서 ‘나는 어떻게 이 정도로 똑똑한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니체는 자신이 어째서 똑똑한지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다(읽어보면 바로 안다).
페미니즘의 치명상은 그것이 ‘뭔가를 설명할 수 없었던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고 말았다는 것’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똑똑한가?’라는 질문에, 만약 페미니스트들 중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그것은 내가 천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해주었다면, 사정은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들 중에 누구 하나 그렇게 내세운 사람은 없었다. ‘천재이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대신에,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이 무류하다는 것의 근거를 ‘그것은 내가 부권제 사회의 피해자, 피억압자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페미니스트들은 천재들이 그 앞에서 멈추었던 선을 밟고 넘어가 버린 것이다.
페미니즘은 과도하게 올바를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 사상사적 수명을 스스로 축소시키고 말았다.
페미니즘에 국한되지 않고, 과학적인 이론을 어느 정도 이상 기간 살아남게 하고 싶다고 한다면, ‘내가 신봉하는 이 이론은 올바르지만, 어째서 이 이론이 올바른지, 그 이유를 나 자신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하는 ‘무능의 고백’에 의해 ‘올바름이 분비하는 독’을 중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올바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는 선언은 ‘나는 (혹시)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불안 속에 있는 이론, 단언하는 것이 왠지 꺼려지는 이론,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는 이론, 그러한 이론 쪽이 대개의 경우, 사회 이론으로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있고, 이 세계에 얼마 안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좋은 것’을 쌓고 늘릴 수 있다. 나는 페미니즘의 성장과 소멸을 관찰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배웠다. (우치다 타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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