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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요즘 애들은 투표를 안 해인용 2024. 11. 28. 18:30
근대 시민사회는 자신이 마법으로 불러온 지하의 마력을 더는 제어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닮았다.
무지야말로 맹신의 어머니인 동시에 산업의 어머니다.
어떠한 주식 투자에서도 벼락은 언젠가 떨어짐이 틀림없다는 것은 전원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전원이 벼락은 자신이 황금비를 듬뿍 맞고 안전히 도망간 후에 옆 사람 머리 위에 낙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쪽 극단에서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그 대극, 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해서 생산하는 계급 측에서의 궁핍, 노동고, 노예 상태, 무지, 잔인화와 도덕적 퇴폐의 축적이다.그때 생각했어. 이 자식들 모두 엉터리라고. 적당히 그럴듯한 말이나 늘어놓고 의기양양해하면서 신입생 여자애 눈길을 끌어서는 스커트 안에 손이나 집어넣을 생각밖에 안 해, 그 사람들. 그러다 4학년이 되면 머리를 짧게 깎고 미쓰비시 상사니 TBS니 IBM이니 후지 은행이니 하는 좋은 기업에 들어가서는 마르크스 같은 거 읽어 보지도 않은 귀여운 마누라를 얻어서 아이한테 폼 나는 이름을 지어 주는 거야. 산학 협동 분쇄는 무슨.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다른 신입생들은 또 어떻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안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 그리고 나중에 내게 이렇게 말하지. 너 바보냐, 모르더라도 그냥 알았다고 예예, 하면 그만이라고.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룸펜프롤레타리아의 두목”, “군주(풍) 룸펜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습니다. 대통령이나 황제라고 해도 ‘룸펜프롤레타리아’와 똑같은 카테고리에 포함한 것은 ‘룸펜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은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일종의 심성이라는 것이죠.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 그 하나로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이 ‘룸펜프롤레타리아’라는 정의가 모호한 말을 사용하였다는 사실 속에서 마르크스 계급의식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느낍니다. 같은 계급에 속하고 같은 가혹한 수탈의 피해자이면서, 어떤 이는 계급의식에 각성해서 혁명을 지향하고, 어떤 이는 반동화해서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 그럼에도 이 두 범주를 나누는 외재적인 역사적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엥겔스의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론의 문제》
이것과 비슷한 정의가 모호한 말의 사용은 엥겔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영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화되었다”고 썼습니다. 이 충격적인 말을 레닌은 『제국주의』에 인용하였습니다.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실상 점점 부르주아화되어서, 그 결과 모든 국민 중에서도 가장 부르주아적인 이 국민은 급기야는 부르주아와 나란히 부르주아적 귀족과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트까지 일을 진행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식민주의의 음덕을 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사명을 잊고 제국주의・식민주의에 갈채를 보내는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트”로 추락한 것은 아마도 역사적 사실로서는 말 그대로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화법은 자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화법을 허용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본인의 기분에 따라 ‘룸펜’도 될 수 있고 역사적 조건에 따라 ‘부르주아’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수탈을 당하면서도 계급의식에 눈뜨지 못하는 노동자입니다.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의 국물을 얻어먹는 바람에 계급의식에 눈뜨지 못하는 노동자입니다.
즉 프롤레타리아로서 계급의식을 형성할지 말지는 필경 개인의 결의에 달려 있다는 것이 됩니다. 자본주의의 부조리함과 무도함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것에 견디지 못해 일어서는 ‘제대로 된 인간’과, 그것을 굳이 감수하고 무위로 지내는 ‘변변치 않은 인간’이 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되면, 이래서는 더는 계급의식으로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자본주의 제도를 분석하기보다도 사람은 어떤 조건에 의해 ‘제대로 된 인간’이 되거나 ‘변변치 않은 인간’이 되는지와 같은 인성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이야기가 빨라집니다.
저는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의 약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은 젊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룸펜프롤레타리아트’라든지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로 편의적으로 사태를 설명해 버리면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늘어날 뿐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생명선에서 본다면》
학생운동에 관여하였을 무렵에 ‘프롤레타리아적 자기형성’이라는 말을 때때로 들었습니다. 물론 “우치다는 프롤레타리아적 자기형성이 되지 않았다”라는 비판의 맥락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저는 ‘프티부르주아적 급진주의자’에 지나지 않아서, 제가 말하는 정치에 관한 논의에는 ‘프티부르주아’라는 출신이 덕지덕지 각인되어 있으며, 반성하지 않고서는 그 한계를 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는 계급적 전위에 대해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뇌에는 결코 떠오를 일이 없는 의문과 불신을 품는다”라고 질책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적 자기형성’이란 딱히 대학을 중퇴하고 노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학생 신분을 유지하면서 ‘마음가짐을 바꾸는’ 정도의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의 전환’을 두고 ‘계급의식에 각성하였다’라고 불러도 좋은 것인가… 하고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소수의 혁명가에 의한 음모적인 정체(政體) 전복이라는 정치기술주의*를 마르크스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점에서는 마르크스를 지지합니다. 혁명적 대중은 어딘가 어둠 속에 숨어서 음모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저자(author)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직감에 따라서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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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기술주의政治的技術主義’라는 것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같은 마르크스 이전의 혁명가들이 채용한 ‘정치 수법’을 묘사하기 위해서 우치다 선생님이 만든 조어로, ‘소수의 비밀결사・지하조직에 의한 테러와 파괴 공작을 통해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대중의 봉기를 기대하는’ 일점돌파 전면전개주의이다. 자신들은 ‘혁명의 불쏘시개’가 되어 체포당하거나 죽어 가면서 “다음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정치적 스탠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런 무책임한 태도를 좋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노동자계급이 일제히 일어설 때까지 조직하고 지도할 수 있는 정치적 전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역주)
그래서 마르크스는 공황이든 자본주의 발전이든, 노동자계급의 전원이 함께 거기에 던져진 역사적 여건 안에서 계급적 이해를 생생하게 자각해서 일제히 일어서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잘 알 수 있습니다. 역사의 전철기(轉轍機)를 돌리는 것은 영웅 개인이 아니라 계급 전체여야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생명선입니다.
역사적 여건과 관계없이 ‘제대로 된 노동자’는 혁명에 일어서고, 변변치 않은 노동자’는 일어서지 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역사 과정을 개인의 책임에 귀속하게 된다. 이시카와 선생님이 인용한 대로 『자본론』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확실히 그렇게 단정하였습니다.
내 입장은 경제적・사회적 구성의 발전을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다루려고 하는 생각이나 다른 어떠한 입장과 비교해도 관계들의 책임을 개인에게 씌우려고 하는 발상과는 멀다. 아무리 개인이 주관적으로는 여러 관계를 넘어선 존재라고 느끼고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그야말로 관계들로 만들어진 피조물로 계속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개인은 경제적・사회적 관계들의 ‘피조물’이며, 결코 ‘관계들을 넘어선 존재’일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치다는 프롤레타리아적 자기형성이 되지 않았다”라고 저를 질책한 활동가는 아무래도 부분적이긴 하지만 “관계들의 책임을 개인에게 씌우려고” 한 것 같았습니다.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적 관계들의 피조물’이라서 개인에게는 어떠한 계급적 입장을 취할 것인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르주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부르주아이고, 프롤레타리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프롤레타리아이다. 자기 노력으로는 자신의 계급성으로부터 일탈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자기결정에 의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개인이라는 생각》
그런데 저와 같은 ‘프티부르주아’는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어느 쪽 계급에 귀속할지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가 ‘관계들의 피조물’의 본성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프티부르주아라는 것은 부르주아적으로 살 것인지, 프롤레타리아적으로 살 것인지의 선택이 개인의 책임에 귀속되는 사회적 신분입니다.
제가 이 문제에 직면한 것은 60-70년대의 ‘1억 총중류’, 즉 ‘1억 총프티부르주아’ 시절의 일본 사회 이야기입니다. 즉 거의 모든 국민이 자신은 부르주아로서 살 것인가, 프롤레타리아로 살 것인가를 주관적 결의에 따라 선택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아주 기묘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만, 저와 같은 프티부르주아는 자신이 ‘관계들을 넘어선 존재’라고 느끼는 것을 ‘관계들로 규정된’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당시 저의 실감이었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관계들의 자연사적 귀결’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결정’에 의해 ‘관계들의 책임을 떠맡을 수 있는 개인으로 자기형성할 수 있다’는 개방적인 아이디어는 저의 ‘프티부르주아적 감성’과 아주 친화적이었습니다.
사실,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듯이, 동포들이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기를 바라며 용감하게 싸운 혁명가 중 많은 수는 그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은 모든 시민이 사리사욕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는 기도였습니다만, 그 싸움에 몸을 바친 사람들은 종종 사리사욕보다도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켰습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많은 사회적 책임이 있다.’ ‘가장 곤란한 임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떠맡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혁명 투쟁의 길잡이였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영웅적 개인이 일어선 사례는 무수히 들 수 있습니다만, 계급 전체가 동시에 일어섰다는 사례는 과거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 유형의 ‘영웅주의’를 비밀결사가 주도하는 ‘정치기술주의’와 똑같이 물리쳤습니다. 그것은 ‘관계들의 책임을 개인에게 씌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영웅적 행동이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의 결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의 각성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당연합니다.
만약 개인의 뇌에 문득 떠오른 관념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면, 그것은 “현실적인 것은 사유 과정의 외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헤겔주의로 퇴행하고 맙니다. 마르크스로서는 그런 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전이되어 번역된 물질적인 것에 다름없다”라는 것이 유물론의 의심할 수 없는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대홍수’에 희망을 맡긴 이유》
그런데 역시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눈앞에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비영웅적인 노동자가 무리를 이루어 존재하고, 솔선해서 반동적 정책을 지지하며, 혁명의 탄압에 가담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 점에 관해서는 정말로 곤혹스러워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반동적이고 무위의 ‘가짜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과연 이대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경우에 증대할 “빈곤, 억압, 종속, 추락, 착취”에 의해 언젠가 그 정치적 태도를 반전시켜서 계급적으로 “훈련받고 결합되며 조직되어” 혁명 투쟁에 일어설까요?
그런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러한 ‘가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마르크스가 지금 당장은 계급의식이 미성숙한 것뿐이며, 앞으로 적절히 계몽되면 올바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열에 가담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을 묘사할 때 “방랑자, 몰락한 부르주아지, 노숙자, 흐트러진 군대, 전과자, 탈주범, 사기꾼, 약파는 사람, 소매치기, 마술사, 사당패, 노름꾼, 뚜쟁이, 넝마주이, 땜장이, 얼치기 선비, 거지…”와 같은 경멸적인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리는 그 사회적 신분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무권리적이라도, 실제로 수탈을 당해도 동정할 가치가 없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르크스의 심각한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역사적 필연으로서 자멸한다. 마르크스는 그렇게 예측하였습니다만, 그 예측은 현재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자는 자연사적 과정으로서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로 자기형성하고 국제적인 연대를 형태 짓는다. 그런데 그 예측은 현재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197~207쪽.
인구 감소 국면에 있는 지금의 일본에서도 고령화・과소 지역화되어 있는 토지로 이주하여, 새로운 생업을 창출하고 세계 표준의 생산물을 내보내려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도대체 어떤 공동체를 형성할 생각일까요?
이주자들은 거기에 원래 있던 지연・혈연 공동체의 멤버도 아니고, 밖에서 와서 그 땅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이익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모종의 공동체 창건을 목표로 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것은 지연・혈연 공동체(Gemeinschaft)도 이익집단(Gesellschaft)도 아닙니다. 그 중간에 있는 ‘공유지(Common)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지금 마땅한 표현이 없습니다.
이 코먼의 멤버들은 숙명적인 방식으로 그 공동체에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사로 참여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로 거기에서 빠지는 것도 물론 가능합니다. 그리고 공동체 활동의 목적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가 아니라 ‘구성원 전원이 평화롭게 생업을 영위하며 건강하고 문화적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꽤 막연한 것입니다. 상세한 사업 계획도 없고 투자자에 대한 배당 약속도 없습니다.
이 ‘코먼’의 창설 목적은 따지고 보면 ‘거기서라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라는 것을 참가한 사람들에게 보증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코먼’에게 최우선 사항은 그 공동체가 안정적이고 항상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회원들은 그 사재의 일부를 공공에 공탁하고, 개인적인 권리의 일부를 공공에 이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공공을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코먼’ 멤버들은 부족한 비용은 자신이 부담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규칙’이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이익’에 의해 유도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장소’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가이후칸과 같은 도장 공동체도 ‘게노센샤프트(Genossenschaft)’중 하나로 꼽아도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협동조합과 다른 점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도장 공동체는 지금 이곳의 구체적인 생활상의 편의를 위해 멤버끼리 서로 의지하는 상호부조 조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장 공동체는 시대를 초월해 도통과 학통을 패스한다는 미션을 갖고 있습니다. 선인으로부터 받은 예지와 기능을 후세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시간적인 세로축을 중심으로 도장 공동체는 통합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멤버의 구체적인 생활상의 이익은 반드시 최우선으로 배려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얼마간 희생하더라도 패스는 연결돼야 합니다.
그 회로는 축구나 럭비 같은 공놀이를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레이어들은 공을 연결해 주고, 그것을 받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에게 증여합니다. 공놀이의 본질은 ‘패스’와 ‘증여’에 있습니다.
이 글 첫머리에 ‘전도(傳道)’에 대해 썼는데요. 복음의 패스를 연결하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의 소매를 붙잡고 간청하여 복음을 받게 하는 전도의 행동은, 자세히 보면 공놀이와 동형적입니다. 그보다는 공놀이 자체가 ‘패스’와 ‘증여’를 통해 인간은 그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환상적인 플레이를 발상해 낸다는 태곳적 지혜를 가르치기 위한 장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놀이에서의 ‘팀’도 일종의 ‘게노센샤프트’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고 자신의 의사로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이지만, 멤버인 한 자신의 기능을 높이는 것(증여를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신체적・지적・영적 성숙 및 성장을 의미한다 – 인용자), ‘패스’와 ‘증여’ 일에 헌신할 것을 요구받는 것이죠.
저는 이 태곳적 기원을 가진 ‘게노센샤프트’가 ‘대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대에서 앞당겨 맞이하는 미래 사회의 맹아적 형태’의 기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책, 215~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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