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려읽기) 트럼피스트 라이징인용 2024. 11. 14. 18:01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 맹자 양혜왕 상
설사 이 의심이 완전히 사실무근으로 밝혀지더라도 한 가지 문제는 피할 수 없다. 그런 노동 구도가 증오와 원망으로 뒤덮인 정치 지형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직장도 없이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은 직업이 있는 사람들을 원망한다. 반면 고용된 사람들은 빈곤하고 일자리 없는 사람들을 원망하도록 부추김을 당한다. 그런 사람들이 얻어먹기만 하고 공짜를 바란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불쉿 직업의 덫에 걸린 사람들은 진짜 생산적이거나 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원망한다. 낮은 보수를 받거나 굴욕당하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서 진짜 생산적이거나 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 뭔가 유용하고 고상하고 화려한 일을 하면서도 잘살 수 있는 극소수 직업을 독점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보 엘리트’라 불리는 자들을 점점 더 원망한다. 이들 모두는 부패해 보이는 정치 계급(옳은 추측이다.)에 대한 증오로 단합하지만, 그 정치 계급은 또 이런 공허한 증오가 자신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켜 주므로 아주 편리하다고 여긴다.
유용하거나 고상한 일을 추구하면서도 안정적인 보수와 혜택을 원하는 사람이 당연히 원망의 대상이 된다는 규칙에는 중대한 예외가 하나 있다. 군인, 혹은 군대에 직접 연결된 일을 하는 사람은 이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정반대로, 군인들은 절대로 원망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비판을 초월한 존재다. 이 이상한 예외에 대해 예전에 쓴 글이 있는데, 여기서 그 논지를 잠시 불러오는 것이 좋겠다. 그런 논의 없이는 우익 포퓰리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제일 친숙한 나라니, 이번에도 미국을 예로 들어 보자(비록 브라질에서 일본까지 어느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특히 우익 포퓰리스트들에게 최고의 영웅은 군인이다. ‘군대를 지지’해야 한다. 이것은 절대명령이다. 이를 두고 어떤 식으로든 타협하려는 사람은 간단명료하게 배신자다. 이와 반대로 궁극적인 적은 지식인들이다. 예를 들면 거의 모든 보수파 노동계급은 기업 경영진에게는 별 쓸모가 없지만, 노동계급이 자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대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들의 진정한 증오는 무엇보다 ‘진보 엘리트’(‘할리우드 엘리트’, ‘언론계 엘리트’, ‘대학교 엘리트’, ‘멋쟁이 변호사들’, ‘주류 의학계’ 등 종류는 다양하다.)를 향해 있다. 그러니까 해안 대도시에 살면서 공영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도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 말이다.
이 원망의 배후에는 다음 두 가지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 엘리트층 멤버들은 일상의 노동자들을 주먹이나 휘두르는 야만인 수준으로 본다는 인식. 둘째, 이 엘리트층이 점점 더 폐쇄된 신분제 사회를 구성한다는 인식. 그런 신분제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실제 자본가 계급보다 장벽을 뚫고 나가는 데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둘 다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선출된 사실에 대한 반응을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첫째 인식은 매우 자명하게 진실이다. 특히 백인 노동자 계급은 다른 집단이라면 편협한 인간이라고 즉각 비난받을 만한 발언들(예를 들면 특정 계급이 못생기고 폭력적이고 멍청하다는 등)이 점잖은 그룹에서도 별말 없이 받아들여지는 미국에서 유일한 세력 집단이다.
두 번째 인식 역시 제대로 생각해 보면 옳다. 또다시 할리우드에서 실례를 찾아보겠다. 1930년대나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할리우드’라는 이름조차도 마법 같은 사회 진보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순진한 시골 소녀가 대도시에 가서 가치가 발견되고 스타가 된다. 현재 목적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문제되지 않는다.(분명히 예나 지금이나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요지는 당시 사람들은 그 우화를 원천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즘 중요 영화의 주연배우들 가계도를 보면 할리우드 배우, 작가, 프로듀서, 감독을 적어도 2대 이상 하지 않은 경우를 찾기 힘들다. 영화 산업은 근친혼 신분제도에 지배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저명인사들이 평등주의 정치를 지지하는 듯한 시늉이 대다수 미국 노동계급의 귀에 공허하게 들릴까? 할리우드 역시 이 측면에서 예외가 아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모든 자유주의 전문직들에 일어났던 일을 상징한다(조금은 더 발전한 형태지만).
내가 보건대 보수파 유권자들은 대체로 부자들보다 지식인들을 더 원망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자녀들이 부자가 되는 시나리오는 꿈꿀 수 있지만, 문화적 엘리트층의 멤버가 되는 시나리오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판단은 부당한 평가가 아니다. 네브래스카주 출신 트럭 운전수의 딸이 백만장자가 될 확률은 아주 낮지만(요즘 미국은 아마 선진국 가운데 사회적 유동성이 가장 낮은 나라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그 딸이 국제 인권 변호사가 되거나 《뉴욕 타임스》 연극 평론가가 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설사 그녀가 알맞은 학교에 갈 수 있더라도 학교를 졸업한 다음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그 분야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무급 인턴 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방도는 분명 없다. 설사 유리 직공의 아들이 자리가 좋은 불쉿 직업에 발끝을 담그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십중팔구 에릭처럼 자기 직업을 필요한 인맥을 쌓는 토대로 바꾸지 못하거나 그렇게 하기를 꺼릴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수천 개는 있다.
‘군대를 지지하라’는 요구와 ‘진보 엘리트’에 대한 비난을 병치함으로써 우파는 사실상 좌파를 위선자라 부르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1960년대의 급진파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누구나 물질적 번영을 누리며 행복한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고 노력하며,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가치와 가치들 사이의 구분이 없어질 것이고, 모든 사람은 공동의 선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실제로 한 것이라고는 일한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직업을 자신의 응석받이 아이들을 위해 따로 떼어 둔 것뿐이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본성에 관한 아주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더 일반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사회가 탐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존재는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이런 종류의 행동을 정착시키고, 이타적으로 처신할 권리를 은밀하게 상품으로 내걸기도 한다. 자신의 이기적 기질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기적이지 않을 권리를 허용받는다. 혹은 게임이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당신이 고생을 하고 머리를 굴려 충분한 경제적 가치를 축적하는 데 성공했다면, 현금을 손에 넣고 거액을 써서 고유하고, 더 높고,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즉 ‘가치’를 ‘가치들’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모으거나 경주용 클래식 자동차를 수집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재단을 설립해 여생을 자선에 바칠 수도 있다. 종착점으로 곧바로 건너뛰는 것은 명백히 사기다.
우리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본 중세 생활 주기 서비스 버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측하건대, 지금은 우리 중 절대다수가 은퇴하기 전에는 완전한 성인기의 경험을 기대할 수 없다. 군인들은 그들 나라에 ‘봉사’하기 때문에, 그리고 짐작건대 대개 장기적으로는 얻는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합법적인 예외다. 이것이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복무 중인 군인은 무조건 지지하지만 대다수 군인이 퇴역 후 여생 동안 집도 직장도 없고 가난해지며 약에 중독되거나 장애자로 살면서도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가난한 집 아이는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얻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한다고 스스로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껏해야 도박이다. 그가 바치는 희생이라는 것의 본질이 원래 그렇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고귀함이라는 것도 그렇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 405~418쪽.
(…) 다른 말로, 링컨이 정확히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급속한 경제적, 영토적 확장 덕분에 옛날 중세 시스템과 비슷한 것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에서는 모든 사람이 처음에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임금노동의 보수로 상점이나 농토(원주민에게서 빼앗은)를 구매하며, 결국은 그들 스스로 자본가가 되어 젊은이들을 노동자로 고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이 남북전쟁 이전 미국에서의 이상형이었다. 링컨이 개척 지대에서 별로 멀지 않은 일리노이주 출신이었는데도 말이다. 동부 해안가 오래된 도시에서 노동자 조합(association)은 이미 이 같은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링컨이 노동가치이론을 논의의 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모두가 그랬다. 적어도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노동가치이론(그동안 ‘한계혁명’에 의해 경제학 이론의 영토 밖으로 쫓겨난)이 대중 상식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 요즘은 대학원생이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소모임에나 가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의 생산자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이는 대중의 의식에서 어마어마한 변동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내게는 주된 이유가 원래 노동가치이론 자체가 가진 결함, 즉 ‘생산’에 집중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노동가치이론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이며, 깊은 가부장적 편견이 담긴 개념이었다. 중세에도 기독교적 신은 기술자, 장인으로 간주되었고, 인간의 작업(항상 일차적으로 남자의 것으로 인식된)은 물건을 만들고 짓거나 흙으로부터 다듬어 내는 문제로 여겨진 반면, 여성의 ‘노동’은 일차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아기를 만들어 내는 문제로 여겨졌다.
진짜 여성 노동은 거의 대부분 대화 속으로 사라졌다. 산업혁명 이후 나타난 놀랍고도 전례 없는 생산성 증가는 분명히 여기서도 역할을 담당했다. 그것은 기계의 상대적 중요성에 관한, 또 그것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중요성에 관한 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논의는 19세기 내내 정치적, 경제적 토론의 중심에 있었다.
같은 책, 377~383쪽.
현재 사용되는 영어에서는 대체로 금, 돼지 뱃살, 골동품, 금융 파생물 따위의 가치를 지칭하는 단수형 ‘가치(value)’와, 가족적 가치들, 종교적 도덕성, 정치적 이념, 미, 진리, 성실성 등을 말할 때의 복수형 ‘가치들(values)’을 구분해서 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경제문제를 이야기할 때 ‘가치’를 말한다. 그것은 대개 사람들이 노고에 대해 보수를 받는, 혹은 행동이 돈을 버는 방향을 지향하는 모든 인간적 노력이다. ‘가치들’은 그 외 경우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집안일과 자녀 양육은 분명히 무급 노동의 가장 흔한 형태다. 따라서 우리는 ‘가족적 가치들’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끝없이 듣게 된다. 하지만 교회 활동, 자선 활동, 정치적 자원봉사, 거의 모든 예술적, 과학적 탐구도 보수를 받지 못하는 일이다. 설사 어느 조각가가 아주 부유해져서 포르노 스타와 결혼하거나, 정신적 지도자가 롤스로이스를 여러 대 소유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부가 원래 활동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결과일 때만 합법적인 것으로 볼 것이다. 적어도 원래는 그들이 돈만 노리고 활동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은 정확한 수량적 비교를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가져왔다. 돈은 이만큼의 무쇠가 과일 음료 몇 병이나 페디큐어 이용권이나 글래스턴배리 페스티벌 입장권 몇 장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뻔한 일 같지만 아주 깊은 함의를 담고 있다. 그것은 어떤 상품의 시장가치란 엄밀히 말해 다른 것들과 비교될 수 있는(따라서 교환될 수 있는) 정도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가치들’ 영역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가끔 어떤 예술 작품이 더 아름답다거나 한 신도가 다른 신도보다 더 독실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얼마나 많이 독실한지 묻는다거나, 이 승려가 저 승려보다 다섯 배는 더 독실하다고 말한다거나, 이 렘브란트 그림이 저 모네 그림보다 두 배는 더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게 들린다. 또 예술을 추구하느라 자기 가족을 소홀히 하거나 사회정의를 위해 법을 어기는 것이 얼마나 적법한지 계산하는 수학 공식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다. 사람들이 늘상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의상으로는 그런 결정이 수량화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바로 ‘가치들’의 핵심 가치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상품이 다른 상품과 정확하게 비교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를 갖는 것처럼, ‘가치들’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귀중하다. 그것들은 각자 고유하고 환원 불가능한, 한마디로 말해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333~335쪽.
'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려읽기) 요즘 애들은 투표를 안 해 (0) 2024.11.28 (유인물)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0) 2024.11.21 (유인물) Mon corps, mon choix, mon avis (0) 2024.11.11 (가려읽기) AI, 도시, 서울 (0) 2024.11.09 (가려읽기) 얼마면 돼? (0) 2024.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