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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선과 곱셈기계 관리술
    인용 2024. 10. 30. 00:52

     

    그리고 저 문을 열면 바로 세라의 연구실이 나온다. 세라! 이제 모든 것이 기억에서 되살아난다! 세라가 복도에서 들어와 자기 연구실로 가기 위해 지금 내가 있는 쪽을 지나가면서, 그러니까 물뿌리개를 들고 잰걸음으로 두 문 사이를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 학생들한테 ‘질()’을 교육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에요.” 이것이 은퇴하기 전 마지막 한 해를 보내고 있던 여교수가 자기 방에 있는 식물에 막 물을 주러 가면서 점잔 뺀 단조로운 어조로 그에게 던진 말이었다. 그때가 바로 모든 것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때가 바로 결정체 형성을 위한 씨눈, 바로 그 씨눈에 해당하는 순간이었다.

     

    결정체 형성을 위한 씨눈이라. 선명한 기억의 한 단편이 이제 되살아난다. 실험실에 대한 기억이다. 유기 화학 실험실이었다. 무언가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던 것은 그가 극도로 과포화(過飽和) 상태인 용액을 가지고 작업을 할 때였다.

     

    과포화 상태의 용액이란 물질이 용해될 수 있는 한계인 포화점을 넘긴 상태의 용액을 말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용액의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포화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높은 온도에서 물질을 용해한 다음 용액의 온도를 낮추면, 때때로 용해된 물질이 결정화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물질의 분자들이 결정화할 방도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정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이를 결정체 형성을 위한 씨눈이라고 한다. 이때의 씨눈 역할을 하는 것은 먼지 한 알갱이일 수도 있고, 심지어 무언가로 갑작스럽게 용액의 표면을 한번 스치거나 용액이 담긴 유리그릇을 무언가로 한번 탁 치는 일이 씨눈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는 용액을 냉각하기 위해 수돗가로 가지만, 수돗가까지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다. 수돗가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의 눈앞에서 별 모양의 물질 결정체가 용액 안에 하나 나타나고, 그러면 곧 갑작스럽게 방사상(放射狀)으로 결정체가 커지다가 마침내 용기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을 보게 마련이었다. 그는 결정체가 커져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곤 했던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던 곳에 이제는 너무도 단단한 물질이 들어차 있게 되어, 용기를 거꾸로 뒤집더라도 흘러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께서 학생들한테 ‘질()’을 교육해줬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에요”라는 말 한마디가 그에게 던져졌을 뿐이다. 그런데, 채 몇 달이 안 되어, 성장하는 모습을 거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너무도 빠른 속도로 그 말이 성장을 거듭하더니, 거대하고 복잡하며 고도로 조직화된 하나의 사유 체계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마치 마법이 작용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325~327)

     

     

    그는 체계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기계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면, 이는 그의 생각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피스톤, 톱니바퀴, 동력 전달 장치 등등이 한꺼번에 엄청난 규모로 조화롭게 움직이듯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 대신 언뜻 레이저 광선의 이미지가 내 마음에 떠오른다. 말하자면, 극한 지점에 이르기까지 압축을 해 놓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할 정도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한 줄기의 섬광이 움직이듯, 달을 향해 쏘는 경우 달의 표면에 반사되는 그 빛을 지구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섬광이 움직이듯, 그의 생각은 움직였다. 이 탁월한 능력을 파이드로스는 대상에 대한 일반적 조명에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특정 목표를 하나 찾아내어 이를 겨냥해 섬광과도 같은 그의 생각을 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섬광과도 같은 그의 생각이 지향했던 목표물에 대한 일반적 조명은 이제 내 몫으로 남겨진 것처럼 보인다.

     

    그의 지능이 뛰어난 만큼 그가 처한 고립의 상황도 엄청난 것이었다. 어떤 기록을 들춰보아도 그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혼자 여행을 했다. 항상 그러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그는 항상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 점을 느끼고는 그가 자신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파이드로스는 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여기까지 밀고 갔는데, 직접적인 강의실 체험과 관련이 없는 것들에는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상황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보다 더 높은 곳까지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다”라는 올리버 크롬웰의 진술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생각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는 그것이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그 개념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방법이 모두 악취를 풍기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마당에 어찌해서 비합리적인 방법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일까. 직감적으로 그는 그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가 결코 사소한 수법 차원의 것이 아님을 느꼈고, 그런 느낌은 급속도로 커져갔다.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멀리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것인지를 그는 알지 못했다.

     

    앞서 내가 이야기한 결정화(結晶化)의 과정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품었다. “그가 왜 ‘질’에 대해 그처럼 흥분해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단지 “질”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의 수사학적 맥락뿐이었다. 그들은 좌절 속에서 그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추상적 질문들 때문에, 말하자면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추상적 질문들 때문에, 그가 과거에 경험했던 절망감을 꿰뚫어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이 “질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이 물음을 던지는 당사자에게 그 물음은 많은 물음 가운데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파이드로스가 이 물음을 던졌을 때, 그의 과거 때문에, 이 물음은 그를 구심점으로 하여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마치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계층적 구조를 따라 퍼져나간 것이 아니라 동심원적 구조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 중심부에서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질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같은 사유의 파도들이 퍼져나갔을 때, 내 지금 확신컨대, 그는 각각의 물결이 기존의 사유 패턴들이 형성하고 있는 해변에 도달하기를, 그리하여 그가 그와 같은 사유 구조들과 일종의 조화로운 관계를 획득할 수 있기를 마음 하나 가득 기대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유의 물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해변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해변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끝없이 확장을 거듭하는 결정화의 물결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 (373~375)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으면 그 일에 대해 결코 온몸을 바치지 않는다. 누구라도 태양이 내일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미친 듯이 외치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내일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믿음에, 또는 그 밖에 다른 종류의 교리나 목표에 대해 광적으로 몸을 바치고 있다면, 이는 항상 이 같은 교리나 목표가 의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어느 정도 닮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예수회 교단의 구성원들이 보였던 호전성이 적절한 예가 된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열정은 가톨릭 교회의 힘이 강력했기에 이를 바탕으로 해서 분출된 것이 아니라, 종교 개혁에 직면하여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이를 계기로 하여 싹튼 것이다. 파이드로스를 그처럼 광적인 선생이 되도록 한 것은 바로 이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 앞뒤가 맞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어진 사건들을 놓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한결 더 앞뒤가 맞는 설명이다.

     

    그것이 아마도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수많은 낙제생들과 그가 깊은 유대감을 느낀 이유였을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담긴 경멸의 표정은 파이드로스 자신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유 과정 전체에 대해 갖고 있던 것과 똑같은 경멸의 느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그 과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멸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뿐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강조는 원문의 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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