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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못 먹어도 고!인용 2024. 7. 3. 07:12
학습은 뇌에 입력하는 것이다. 테스트는 뇌의 출력이다. 뇌의 기능은 출력을 기준으로 퍼포먼스가 달라진다. 풀어서 말하자면 ‘머리에 담기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사용한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다.
서재에 틀어박혀 만 권의 책을 읽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얼마 안 되는 지식을 재탕 삼탕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 후자가 뇌의 퍼포먼스가 높다는 말이다. 퍼포먼스란 단적으로 아는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출력하지 않는 사람은 아는 지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없는 것과 똑같다.
학자들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입력 과잉, 출력 과소인 학자는 얼마 안 되는 출력을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입력했는지, 얼마나 똑똑한지를 과시하려고 배타적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애써 얻은 귀중한 지식을 ‘나는 똑똑하다’를 증명하는 데 투입하는 것은 꽤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실을 자각할 정도로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마도 출력 과소의 병증일 것이다.
자전거 타기도 똑같다.
자전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며칠 아니 몇 주 동안 자전거 부품을 손질하거나 설계도를 면밀히 검토하거나 자전거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자전거가 이러한 형태를 갖추게 된 역사적 진화 과정을 공부한다고 해도 자전거가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도 먼저 자전거를 타 보아야 한다. 올라타서 달려 보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면 핸들, 체인, 브레이크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해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입게 된 무릎의 상처 수와 함께 늘어 간다.
레비나스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머릿속에 들어와 마구 속을 헤집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때 이 세상에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습득하는 장치를 바꾸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책의 ‘출력성’이다. 그 후 나는 출력성을 기준으로 책의 가치를 헤아린다. 소설 또한 그러하다.
읽고 나서 ‘배가 고파 파스타를 삶고 싶어졌다’라든지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라든지 ‘변비가 나아졌다’라든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라고 느낀다면 출력성이 큰 책이다. 그 기준으로 작품의 질을 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오랫동안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이케가야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납득했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뾰족하게 독해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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