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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망설임의 러브 어페어인용 2024. 6. 22. 17:44
우라와 레즈를 응원하게 된 것은 1998년 오노 신지가 영입되고부터다. 그런 의미에서 서포터 사이에서 나는 공식적으로 '철새'라는 인종으로 분류된다. 가장 천한 계급이다. 약소 시절에는 눈길도 안 주다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무렵 몰려든 팬으로, 우라와 레즈 팬 계층 안에서는 최하위다. 하긴 그런 취급을 받는 나도 J2 시절을 모르는 팬들한테는 가끔 설교를 한다.(웃음)
글쓰기와 관련해서도 "아아, 자네는 손으로 원고를 써본 적이 없군"처럼 말하면서 젊은 작가에게 압력을 가할 때가 있다. "처음부터 컴퓨터였지, 자네들은?" 이런 식이다.(웃음) 디자이너의 세계 같은 곳은 분명 더 노골적일 것이다. "나때는 사진 식자라든가 포지티브 필름을 들고 뛰었어"처럼, 옛날에만 겪을 수 있는 거짓말 같은 고생담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꼭 그 포지티브 필름을 전철 그물 선반에 놓고 내렸다는 사람의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바람직한 디자이너 혼의 형성 과정에 필요한 통과의례 같은 신화로서.
술을 마시는 인구는 줄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별로 마시지 않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다. 알코올중독자의 수도 아마 줄고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것은 세상이 좋아졌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나라의 많은 부분이 다양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젊은이들의 ◯◯ 기피 현상'이라는 태그에 한데 묶이는 것 중 하나로 '술 기피 현상'을 들 수 있다.
확실히 내가 20대였을 때 젊은이들이 휴일을 보내는 선택지는 기껏해야 네 가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술과 마작, 독서, 영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대충 스무 가지 정도로 늘었다. 뭐, 스무 가지라는 숫자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시대가 다양화됨에 따라 원래 하던 네 가지 오락을 즐기는 인구는 전부 줄어들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알코올 의존보다 '커뮤니케이션 의존'이 더 많은 것 같다. 뭐랄까, LINE이나 SNS 등 스마트폰을 경유한 의사소통에 시간과 가처분 소득을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
요즘 20대는 휴대폰 통화료나 인터넷 요금, 각종 회원 수수료 등 온라인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해 매달 2만 엔 정도의 고정비를 지출한다. 이는 우리가 20대였던 시절 1엔도 들지 않았던 돈이다. 물론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별로 생산성도 없는 의사소통에 소비하는 시간과 정신적인 노력이 너무 터무니없지 않나 싶다.
우리 시대에는 집을 나오면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불편한 면도 있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으니 서로 시간을 때워야 할 일도 없었다.*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상대가 오지 않으면 그냥 포기했으니까.(웃음) 대여섯 명 정도가 약속하면 꼭 한 명이나 두 명 정도 오지 않는 녀석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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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번역문 원문대조 하였습니다. ... 근데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휴대폰이 없었는데, "나는 약속을 하면 상대가 나타나지 않아도 몇 시간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고!"라고 말하던 친구가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현구야, 잘 지내니?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휴대폰이 없었거든요. 웃음)
지금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할까. "어딘데?" 하고 금세 전화가 걸려온다. 그전에 애당초 그런 조잡한 약속은 잡지 않을지도 모른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로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니까. LINE이라면 한 번에 모든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전화 이상으로 서로의 행방을 모두 알 수 있지 않은가? 친구들과 한껏 어울리다 보면 이러니저러니 하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흘러, 혼자서 때워야 할 지루한 시간은 사라진다.
그러니까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찻집에서 반나절 동안 시간을 때워야 하는 상황 자체가 있을 수 없다. 이러면 찻집도 유지해나가기 어렵다.
내가 젊었을 때, 하숙생들의 한가함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온종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말할 상대도 없었으니까. 방학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학생들 모두 너무 한가해서 항상 누군가의 하숙집에 떼로 몰려가 술판을 벌이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다. 이는 정말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시간을 때우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마작을 했는데, 그러다 술의 길로 빠져드는 인간이 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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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끽연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겠네요. 군대라든가요.)
지금은 반대로 술이나 홀짝거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들 한다. 지나칠 정도로 연락을 주고받고 별 의미 없이 '지금 ◯◯에 있음' 같은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 어느샌가 시간은 흘러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정말로 괜찮은 건지 걱정된다.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들 그렇게 하니까 혼자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인간관계를 새로 구축하는 세대가 아니니까 의사소통에 의존한다 해도 별다른 폐해가 없겠지만, 내가 만약 현재 학생이었다면 나 역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옛날에는 여자친구한테 2주 동안 연락하지 않는 일이 흔히 있었는데, 요즘은 2주 동안 연락하지 않으면 이미 헤어진 사이라 여긴다고 한다.(웃음) 상대가 어지간히 관심이 없지 않는 한 연락은 되니까 말이다.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2018년 당시 - 인용)인 오늘날, 사나흘 연락이 되지 않는 상대에게는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을까?(웃음)
그렇다면 남녀가 사귀는 것도 조금 거북한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젊은 사람들 중 연애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는 현상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차피 2주에 한 번 '잘 지내?' 하고 연락하는 깊지 않은 관계는 불가능할 테니까. 게다가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나 상대를 속박하는 무기를 손에 넣은 셈이다.
삐삐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삐삐를 소지하고 있던 자들은 대부분 엘리트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증권사 직원이나 방송국 사람들, 다음은 야쿠자 정도일까. 하지만 당시 내가 친하게 지내던 방송국 사원은 "이거, 개 목줄 같은 거예요"라고 말했다. 삐삐라는 녀석이 울리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근처 공중전화를 찾아 이쪽에서 먼저 상대에게 전화해야 했으니까. 이는 호루라기 소리에 훈련된 사냥개가 피리 소리를 듣고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과 완전히 일치한다.
얼마 전 화가 친구가 우에노에 있는 도쿄도미술관에서 현대 미술 전시회의 총괄역을 담당했을 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출품자 중 나이가 서른 정도 되는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는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휴대폰 같은 건 적어도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하는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며, 영혼이 해방된 상태로 그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작품은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이 없으니 작품을 며칠에 반입할지 연락을 취할 수 없었고, 관계자들은 스케줄이나 일과 관련된 연락을 전부 편지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답장이 없는데 편지가 잘 도착한 걸까?"라며 주최 측에서 계속 속을 썩였다는 이야기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휴대폰이 없는 사람이 조직 안에 한 사람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이 꽤 고생한다.
옛날에는 대체로 연락이 잘 되지 않았으니까 많은 일을 비교적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명부를 만들어도 꼭 주소가 틀린 사람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책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당시는 소설가인 고마쓰 사쿄가 팩스로 원고를 보낸다는 이야기가 신문기사로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1992년 참조 - 인용) 팩스로 원고를 주고받으니까 자신은 도쿄에 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으스대며 본인의 원고에 실었다.(웃음)
커뮤니케이션은 불가역적이므로, 커뮤니케이션이 점점 늘어가는 현상은 상당히 무서운 일이다. 옛날로 돌아갈 수 없으니 말이다.
한번 손에 넣으면 되돌릴 수 없지 않은가?
1986년 암스테르담에서, 전화를 무료로 거는 비합법적 기계 개발자들과 컴퓨터 개조 마니아들이 전 세계에서 한자리에 모이는 '세계 해커 회의'라는 모임이 개최되었다. <주간 플레이보이>에서 그 기사의 번역 의뢰를 받아 기억하고 있는데, 그 '세계 해커 회의'는 '해커 선언'이라는 매니페스토를 채택했다. 그 문면이 꽤 괜찮은 내용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수단 및 도구는 전면적·포괄적으로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전면적·포괄적'이라는 말이 정말 좋지 않은가? 요컨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중개하는 매개체로부터는 요금을 징수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근거는 커뮤니케이션이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생명줄(라이프라인)이기 때문이다.
해커는 원래 전화를 무료로 거는 기술과 방법을 개발하고 그 정보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사람들로, 그 시점에서는 스티브 잡스를 포함해 반 정도가 범죄자였다. (1972년 경 참조 - 인용) 그리고 컴퓨터라는 기계가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기 이전부터 AT&T나 IBM 등 거대 기업과 맞서 싸워왔는데, 그들은 정보산업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986년에 이미 '미래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유통량이 확대됨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기업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그 후 커뮤니케이션 도구와 플랫폼을 장악한 기업은 21세기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도구인 컴퓨터 자체를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마치 매춘 업소의 포주처럼(강조는 - 인용) 커뮤니케이션을 중개하는 기업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큰일이다.
알코올 의존을 대신할 새로운 위협은, 바로 커뮤니케이션 의존이다.
SNS는 간 같은 신체 부위가 아니라, 젊은 세대의 기본적인 생활 습관이나 세계관 등 인간의 뇌 깊숙한 OS에 해당하는 부분을 좀먹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아마 알코올이 알코올중독자들의 뇌 안에 알코올 전용 회로를 만드는 과정과 유사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병에 든 알코올처럼 실체로서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깨닫기 어려운데, 나는 확실히 의존하고 있음을 느낀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나왔을 때 느끼는 초조함은 술에 젖은 생활을 하던 당시 알코올을 섭취하지 못했을 때 느꼈던 초조함과 체감상 매우 흡사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틀 내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하지 못하면 실무상의 불편함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마치 팬티를 안 입은 것 같은 허전함과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가? 이는 틀림없는 의존이다.
전철 안에서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우리는 딱히 이유는 없지만 자투리 시간이 생겼을 때 무언가 볼 것이 없으면 안정되지 않는 단계에 도달했다. 옛날에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전철 승객 대부분은 창밖 풍경을 바라보거나 혹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면서 30분 정도는 활자나 신문 없이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 시간을 모두 그 스마트폰이라는 자그마한 판 모양 기계에 빼앗기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의존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의존하는 대상이 스마트폰이라는 기계 그 자체가 아니라 기계가 이어주는 남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이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 보이는 지인이 트위터에 쓴 내용을 들여다보면서, "어라, 히라카와 씨 지금 야마가타에 있네"라는 식으로 우리는 개인의 소식에 의존한다.
뭐 의존이라고는 해도 간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자신이 의존의 정도를 적절히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인생에 큰 지장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큰일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전철에 혼자 있을 때 전혀 바깥 경치를 보지 않는다. 경치를 볼 필요가 있느냐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사실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1, 2분 정도 주어지는 자투리 시간에 스마트폰을 보는 것 말고는 선택이 불가능해진 상황은, 경험상 술꾼이 술에 모든 여가를 빼앗기는 현상과 비슷해 보인다.
술은 몸을 해친다는 문제도 있지만, 사실 일하지 않는 시간 전부를 술에 빼앗긴다는 점이 가장 큰 손해다. 그렇다면 이건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간은 나빠지지 않지만 뇌가 조금씩 병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역시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여가니까 어떤 식으로 보내든 개인의 자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아카바네에서 신주쿠까지 전철을 타고 가는 15분 동안 SNS를 하거나 스마트폰 뉴스만 보고 있으면, 자신의 시간을 전부 정보 수집에 소비하게 되고 결국 개인의 정체성은 위기에 처한다. 왜냐하면 정보 수집을 하는 동안 인간은 머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스마트폰을 보는 것은 자발적인 사색을 중단한 상태를 말하며, 외부에 정보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트위터 통계 분석을 보면 목요일만 극단적으로 글 수가 적다. 원인은 목요일에 원고를 쓰기 때문이다. 원고를 쓸 때는 SNS도 그렇지만 애초부터 인터넷에서 별로 정보 수집을 하지 않기로 정했다. 왜냐하면 정보 수집만 하다 보면 머리 회전이 잘 되지 않아 원고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컴퓨터를 통해 수집한 정보로 원고를 쓰면 베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요컨대 짜깁기한 형편없는 원고가 된다. 그래서 되도록 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써야 한다는 의미에서, 원고를 쓸 때는 특히나 더 컴퓨터를 원고 작성으로만 이용하고 인터넷에는 접속하지 않는다.
나는 원고를 써서 먹고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보를 차단하는 시간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전원을 끄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칼럼을 쓸 때 나는 자주 책상에서 멀어져 메모를 하는데, 왜 책상에서 멀어지느냐 하면 컴퓨터를 보지 않기 위해서다. "그게 뭐였더라?!" 하면서 검색을 시작하면 검색 결과에 내 정신을 온통 빼앗긴다. 내 머리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검색하지 않는 것이 어쨌든 중요하다.
이 이야기는 사실 알코올중독의 형성 과정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어떤 모임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기 거북할 때 일단 술을 마시고 본다든가 생각하기 귀찮은 사태에 직면했을 때 갑자기 술을 찾는다든가 하는 도피성 음주와, 글을 쓸 소재를 발견하지 못해 인터넷을 전전하는 행위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오래된 술꾼이 매번 비슷하게 만취 상태에 빠지다 보면, 마치 로봇 같이 변한다. 그러면 가공의 인격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그 인격에게 모든 걸 맡기면 되는 상태가 된다. 자신이라는 주체를 버리고 사는 편이 본인으로서도 편하니까 그들은 계속 술을 마신다.
그렇다면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사실로부터 벗어나려는 현상이므로, 도피라는 행위 자체로 보면 스마트폰이나 술이나 비슷비슷하다.
하긴 스마트폰 의존이라는 말을 써가며 스마트폰의 폐해에 대해 설명하면 "아, 또 꼰대가 나타났다!"라고 생각할 게 뻔하겠지만. 하지만 이건 스마트폰의 문제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딱 한 잔만 더 하고 갈까요: 매일, 오늘까지만 마시겠다고 다짐하는 당신들의 변명
오다지마 다카시, 『호움 퍼스컴 시리즈: MSX 게임 프로그래밍 入門』, 機電硏究社, 1984.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메뚜기 몸속으로 들어가 배 속 전체가 그 벌레로 가득 찬다는 기분 나쁜 기생충이 있지 않은가? 뭐였더라, '연가시'였던가? 그 기생충은 결국 배 속을 잠식할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뇌에 들어가 뇌를 지배해서 메뚜기가 물가를 달리도록 만든다. 배 속이 연가시로 가득해진 메뚜기는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는다. 메뚜기가 들판 근처에서 죽어버리면 연가시도 같이 말라 죽게 되니까 숙주인 주체를 물가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연가시는 물속에서 전부 밖으로 나와 다음 숙주에게로 옮겨간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컨트롤 능력을 갖춘 셈이다.
알코올에도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다. 알코올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나는 알코올중독이 아니야'라는 생각에 지배된다. 객관적인 증거가 산적해 있는데도 자신은 알코올중독이 아니라고 굳게 믿어버린다. 술을 많이 마시면 그런 독자적인 컨트롤 회로가 발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음모론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분명 천 번이나 문자를 주고받았음에도, 서로의 마음만큼은 아마 1센티 정도밖에 가까워지지 못했어요."
좀 된 영화기는 합니다만 휴대폰이 막 보급되던 시절 사람들의 마음 모양을 함뿍 담아낸 영화 중 하나는 <초속 5센티미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주의 영화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국문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각본, 대사 자체만으로도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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