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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경제 체제를 상상해본다는 것: 다른 시대, 다른 관념에서
    인용 2024. 7. 14. 22:51

     

     

    이 세기들 동안에 인도 전역에서 융성했던 불교 조직들이 어떤 식으로 시주를 거뒀는지를 살펴 보면 의문이 금방 풀린다. 초기의 승려들은 돌아다니는 탁발승이었다. 탁발용 발우 정도만 소유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중세의 불교 수도원들은 거대한 기금까지 둔 장엄한 공간이었다. 그 운영은 원칙적으로 거의 전적으로 신용 시스템을 통해 이뤄졌다.

     

    중요한 혁신이 바로 “영원한 시주” 또는 “마르지 않는 금고”라 불린 것이었다. 이런 식이었다. 어떤 평범한 후원자가 자신이 사는 곳 근처의 수도원에 시주하길 원했다. 특별한 의식에 필요한 초를 제공하거나 수도원의 잡일을 거들 하인들을 보내기보다 상당한 금액의 돈이나 물건을 내놓고 싶어 했다. 그러면 연리 15%로 돈이나 물건을 수도원의 이름으로 융자해 주었을 것이다. 그 융자에 따른 이자는 언제나 정해진 목적에 쓰였을 것이다.

     

    (…)

     

    이런 융자들 일부는 아마 개인들에게 갔을 것이고, 다른 것들은 상업융자로 “죽세공이나 놋갓장이, 도공들의 조합”, 아니면 마을의 단체로 갔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화폐를 회계 단위로 가정해야 한다. 실제로 거래된 것은 동물이나 밀, 비단, 버터, 과일 등이었다. 당시의 법전을 보면, 이런 것들에 대한 적정 이자율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럼에도, 큰 덩어리의 금이 최종적으로 수도원 금고로 들어갔다. 주화가 통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금속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세에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일어난 현상인 것 같은데, 금속 중 상당 부분이 종교 단체와 교회, 수도원, 신전 등으로 흘러들어가 그곳의 금고에 보관되거나 제단과 성소, 성물을 제작하고 도금하는 데 쓰였다. 특히 금은 신상을 제작하는 데 쓰였다.

     

    (…)

     

    정말, 인도는 노동 인구 중 상당히 큰 비중이 사실상 지주나 다른 채권자의 부채 노예 상태에서 노동을 하는 나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 여기에 특이한 긴장이 있다. 일종의 역설이다. 부채와 신용 거래가 인도의 마을 제도의 창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 있지만 그 제도의 진정한 바탕은 결코 될 수 없었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브라만 계급이 신들에게 빚을 져야 했듯이,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그런 사상은 계급 제도 자체를 완전히 뒤엎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프랑스 인류학자 루이 뒤몽(Louis Dumont)은 인도의 계급 제도에 대해서는 “불평등”조차 논할 수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폈다. 이유는 그런 용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평등해야 하거나 평등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힌두 사람들의 관념에는 그런 생각 자체가 철저히 낯설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

     

    정치적으로 보면, 사람들에게 먼저 서로 평등한 존재라고 말해놓고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거나 격하시키는 것은 절대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 채무 노예가 불평등을 바탕으로 한 시스템보다 분노와 집단 행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더 큰 것 같다.

    (이상 데이비드 그레이버, <부채, 5,000년의 역사>, 459~465)

     

     

    그 희생과 무욕은 무엇보다 젖을 먹이는 행위로 구현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머니들이 자신의 살점과 피를 젖으로 바꾼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자신의 육신을 먹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들은 자신의 무한한 사랑의 양을 정확히 잴 수 있도록 한다. 어느 저자는 아기가 세 살까지 자기 어머니에게서 빠는 젖의 양을 정확히 180(peck: 1펙은 8쿼터이고 1쿼트는 0.946리터이다 - 원주)으로 계산했다. 이것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 지게 되는 빚이다. 그 숫자는 곧 법처럼 되었다. 이 젖 부채를,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자기 부모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교 신자인 어느 저자는 이렇게 썼다. “보석들을 땅에서부터 스물여덟 번째 하늘까지 쌓는다 하더라도, 당신 부모가 당신을 길러준 은혜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 또 다른 저자는 이렇게 안타까워 했다. “당신의 살점을 떼어 40억 년 동안 하루에 세 번씩 어머니에게 올린다 해도 당신 어머니의 단 하루치 사랑에도 보답하지 못하리.”

     

    그러나 해결책은 똑같다. ‘마르지 않는 금고’에 돈을 기부하는 것이다. 그 결과, 부채와 구원의 형식들이 정교한 사이클을 이루게 되었다. 사람은 상환 불가능한 젖 부채로 삶을 시작한다. 그 부채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교의 진리인 ‘법’뿐이다. 사람은 자기 부모를 불교에 귀의하게 함으로써 부모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다. 정말로, 부모가 죽은 뒤에도 이런 보답은 가능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굶주린 귀신이 되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만일 자식이 어머니의 이름으로 ‘마르지 않는 금고’에 기부를 한다면, 어머니를 위해 경전이 낭송될 것이고, 그리하여 그녀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한편, 그 돈의 일부는 자비로, 순수한 선물로 쓰일 것이다. 또 다른 일부는 인도에서처럼 이자를 받는 융자로 나갈 것이다. 이자를 승려들의 교육이나 의식 또는 수도원 생활의 지원 등 구체적인 목적에 쓰도록 정했던 그 융자처럼.

     

    중국의 불교 신자가 자비를 행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했다. 축제가 종종 열리면 시주가 많이 들어왔다. 돈 많은 신자들은 시주의 규모를 놓고 서로 경쟁을 벌였다. 현금 꾸러미를 달구지에 실어오는 식으로 전 재산을 수도원에 바치는 사람도 종종 나타났다. 수도원에서 장엄하게 치러지던 소신공양에 비할 수 있는 일종의 경제적 자기 희생이었다. 그들의 시주가 ‘마르지 않는 금고’를 가득 채웠다. 그 중 일부는 특히 고난의 시기에 궁핍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또 일부는 융자로 나갔을 것이다. 자비와 사업 사이를 오가던 수도원은 농민들에게 지방 대금업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관행이었다. 배부분의 수도원들이 전당포를 두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중한 소유물을, 이를 테면 옷이나 침상, 거울 같은 것을 맡기고 저리 융자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수도원 자체의 사업이 있었다. ‘마르지 않는 금고’의 상당 부분을 평신도들에게 넘겨 투자를 하거나 융자를 하도록 했다. 승려들에게는 자기 밭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서 나는 과일이나 채소는 시장에 내다 팔아야 했다. 이것이 수도원의 수입을 더욱 키워주었다. 대부분의 수도원들은 상업적인 농장뿐만 아니라 기름 짜는 집과 제분소, 가게, 여관 등으로 이뤄진 일종의 산업 단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근로자들이 수천 명이나 딸린 수도원도 더러 있었다. 동시에 금고 자체가, 자크 제르네가 아마 그걸 처음 지적한 전문가인 것 같은데, 세계 최초로 순수한 형태의 금융 자본이 되었다. 여하튼, 금고들은 부가 집중되었던 곳이며, 사실상 돈 될 만한 투자의 기회를 끊임없이 찾던 수도원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금고들은 심지어 지속적 성장이라는 자본가의 핵심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금고는 확장되어야 했다. 대승(大乘)의 원칙에 따르면, 온 세상이 ‘법’을 수용할 때 까지는 진정한 해방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476~478)

     

    당시에 대중에 뿌리를 내렸던 상인들의 종교인 중국 불교가 이런 방향으로, 그러니까 부채의 신학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절대적인 자기 희생의 관행, 그러니까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 한마디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관행조차도 집단적으로 관리되는 금융 자본을 낳았다. 이 같은 결과가 매우 기묘한 역설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다시 교환의 논리를 불멸의 문제에 적용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책 초반에 소개한 사상을 하나 떠올려 보자. 즉시적인 현금 이동이 수반되지 않는 교환은 부채를 창조한다고 했다. 부채는 오랫동안 남는다. 만약에 모든 인간관계를 교환으로 상상한다면, 사람들이 서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그들의 관계에는 부채와 죄의식이 얽히게 되어 있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부채를 무효로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사회적 관계들이 사라져 버린다. 이것은 불교와 꽤 일치한다. 불교의 최종 목적은 “공”(), 즉 절대적 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적 및 물질적 애착의 끈을 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애착의 끈들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신자들에겐 누구도 혼자 독립된 상태에서는 절대로 해탈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각자의 해탈은 다른 모든 것들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문제는 어떻게 보면 늘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 사이에, 교환이 지배한다. “상업적 거래에서와 똑같이, 사람은 복을 사고 죄를 판다.” 자비와 자기 희생의 행위도 순수한 관용이 아니다. 그것도 보살들로부터 “공덕”을 사는 행위이다. 이 논리가 “절대적인 것”과, 더 쉽게 말해 교환의 논리를 완강히 거부하는 무언가와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낼 때, 그때 무한한 빚이라는 개념이 끼어든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에 어울리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불현듯 자기 어머니의 가슴에서 빤 젖의 양을 처음으로 정확히 재어보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을 느끼다가 그 은혜를 갚을 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도 이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교환은 동등한 존재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암시한다. 어떻게 보면, 당신의 어머니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살점으로 당신을 만들었다. 베다 시대 인도 저자들이 말한 신들에 대한 “부채”에 대해 논할 때 내가 강조하고자 한 것이 정확히 바로 이것이었다. 당연히, 당신은 “우주에 진 빚”을 진정으로 갚지 못한다. 우주에 진 부채는 (1) 당신과 (2) (당신을 포함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동등한 실체들이라는 점을 암시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행위 중에서 부채 상환과 가장 가까운 것은 단순히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인정이 희생의 진정한 의미이다. 로스파베가 말한 ‘원초적 화폐’처럼, 제물을 공물로 바치는 행위는 부채를 갚는 행위가 아니고 상환이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사람은 똑같이 무한한 이 ‘속죄의 바다’를 통해서만 자신의 무한한 업보나 무한한 젖 부채를 갚을 수 있다. 이때 ‘속죄의 바다’는 수도원의 물질적 기금의 바탕이 된다. 똑같이 영원한 수도원은 사실 실용적인 형태의 공산주의이다. 집단적으로 소유되고 관리되는 부()의 거대한 바다이고, 또 영원할 것 같은 인간 협동의 거대한 프로젝트의 중심이 수도원이다. 여기서 나는 제르네가 옳았다고 생각하는데, 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아주 많이 닮은 무엇인가의 토대가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확장의 필요성이었다. 모든 것, 심지어 자비까지도 개종시킬 기회였으며,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을 구원하기 위해선, ‘법’()도 종국적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해야 했다.

     

    (같은 책, 480~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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