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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의 숲 (『미야자키 월드』)인용 2024. 7. 15. 17:32
이하 수전 네이피어, 『미야자키 월드: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둠과 빛』, 하인해 옮김, 로크미디어.
【시간에 관하여】
“인류의 목을 조르는 사회제도에 대한 분노가 영혼 아래에서 소용돌이치고 마음의 오점들을 지우기 위해 끝없이 움직인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싸우고 그 싸움에서 자신을 이끌 누군가를 열망한다.”
인간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장면과 동시에 덧없는 상실의 장면을 연출하는 이야기는 미야자키 세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은 <잔해도착증(Ruinophilia)>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잔해는 말 그대로 무너진 것들이지만, 남아 있는 것이자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 우리는 잔해를 보면서 일어났을 수 있던 과거와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면서 시간을 되돌린다면 만들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미야자키가 어린 시절 전쟁 동안 파괴된 시골집의 잔해를 본 기억을 떠올리면서 한 말은 보임의 주장을 소름 돋을 만큼 그대로 재현한다. “어렸을 때 수풀 사이에서 본 건 전쟁 전 사람들이 추구했던 문명적 삶의 잔해였다. (…) 모두 녹슬고 쓰러지고 썩고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칼리오스트로 성의 시계탑이 상징하는 시간과 운명의 가혹함은 서른여덟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제작한 내성적 성향의 감독에게 특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118쪽)
<토토로>는 많은 면에서 스베틀라나 보임이 말한 “세계 보편적이면서도 지역 특수적인 회복의 향수”를 구현한다. 보임이 정의한 향수는 “처음 봤을 때는 (…) 장소에 대한 동경이지만, 실제로는 (…) 지금과 다른 시대, 다시 말해 유년기에 대한 열망”이다. 보임은 “향수에 젖은 사람은 역사를 지우고 그것을 개인이나 공동의 신화로 바꾸고 싶어 한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야자키 영화는 역사를 ‘지우지’ 않는다. 대신 이상화한 풍경들과 유년기의 순수함을 통해 개인적, 문화적 차원 모두에서 역사를 ‘더 나은’ 방식으로 복원하려고 한다. 어린 관객은 <토토로>의 유머, 소소하지만 짜릿한 공포, 판타지 주인공들에 몰입하지만, 현대화가 사회에 안긴 고통스러운 상실을 잘 아는 성인 관객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향수의 렌즈를 통해 영화를 감상한다. <토토로> 포스터의 캐치프레이즈 역시 “잊고 있던 것을 돌려줍니다.”였다.
(195쪽)
위아래로 돌아가는 톱니의 더 오래된 모티프는 중세 유럽 예술가들이 자주 그린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다. 운명의 여신이 영주와 농민 그리고 성직자와 직공이 매달린 수레바퀴를 끊임없이 돌리는 신화는 인류를 괴롭히는 신분제도를 풍자한다. 궁극적으로 수레바퀴는 인간의 삶이 시대와 운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애니메이터로서 중대한 시기를 맞고 있던 미야자키 역시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절감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기계문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시계는 시간의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시계탑은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펼쳐지는 무대다.
(133쪽)
영화는 성장 과정 같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전통과 현대의 대립, 전통적 시공간과 현대적 시공간의 충돌 같은 당시 일본 문화 전반을 휩쓴 문제들도 이야기한다. 비평가 무라세 마나부는 <키키>에서 흐르는 시간이 두 가지, 좀 더 세밀하게는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고 분석한다. 첫 번째는 키키가 엄마에게 물려받은 전통적 시간인 ‘마녀의 시간’이고, 두 번째는 키키가 정착한 부산한 도시 세계에서 흐르는 ‘사회의 시간’이다. 세 번째는 우르술라가 사는 숲속 자연의 박자인 ‘숲의 시간’이다. 미야자키는 메이와 사츠키가 오래된 녹나무에 인사를 올리는 <토토로>처럼 이전 작품들에서도 여러 형태의 시간을 대비시켰다. 하지만 <토토로>에서는 도시의 역동적인 시간이 부재해 짐작만 할 수 있었지만, <키키>에서는 전면에 등장한다.
서로 다른 시간 사이의 긴장은 키키가 아름다운 해안 도시 코리코에 정착하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된다. 미야자키가 도시를 배경으로 삼은 건 여러 이유에서 중요하다. 풍성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자본주의 도시에서 키키가 마주치는 역경들은 ‘마녀의 시간’과 ‘사회의 시간’의 격차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며 현대 동화의 주인공이 겪는 소외감을 증폭한다. 키키는 자신의 엄마 같은 전통적인 마녀와 달리 존재 이유(그리고 경제적 풍요)를 대대손손 내려오는 전통이나 유산이 아닌 바쁜 도시의 삶에서 찾으려고 한다.
(232~233쪽)
우르술라와 까마귀의 친밀함은 키키와의 적대적인 관계와 대비를 이룬다. 젊은 화가는 새들을 감탄과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며 “미인”이라고 부른다. 키키가 무서워하던 까마귀와 교감하는 모습은 우르술라가 자연뿐 아니라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고독과 은둔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우르술라는 동아시아 문학과 미술의 은둔자들과 닮았다. 거의 남성인 그들은 그림, 수필, 시에 등장한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은둔 시인이자 음악가이며 수필가인 가모노 초메이는 12세기에 일찌감치 궁정 관리직을 내려놓고 속세를 떠나 1제곱미터의 오두막에서 고독하게 지냈다. 오랫동안 초메이의 작품을 좋아한 미야자키는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천부적인 예술가의 여자 버전을 만들고 싶었던 듯하다. 스기타는 미야자키가 키키의 조언가 역할을 하는 우르술라에게 자신의 “자아”를 투영했다고 추측한다. 우르술라는 ‘숲’과 ‘자연의 시간’ 속에 살지만, 키키를 만나러 대도시 코리코에 왔을때도 낯설어하지 않는다.
(243쪽)
(…) 달 이야기를 독특하게 각색해 미남 청년 마르코와 중년 돼지 사이를 오가는 미야자키의 이야기는 미야자키 자신의 “분열된” 정체성을 암시한다.
쉰한 살이 된 미야자키는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미래를 구상하며 겪은 내면의 혼란을 마르코가 구름 평원 위를 나는 장면을 비롯해 영화 전반에 투영했다. 애니메이션의 마법으로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돼지로 만든 미야자키는 생존자의 죄의식, 이념적 환멸, 욕망(피오의 입맞춤과 그에 대한 마르코의 반응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나이 듦과 같은 문제를 파고든다. 특히 노화는 달의 단편 제목과 달리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영화를 만들 당시의 미야자키보다 불과 몇 살 어린 마르코는 잃어버린 젊음, 이념적 희망의 상실, 중년이 되면서 찾아오는 조급함, 환멸과 타협하려는 상처 입은 남자다.
(273쪽)
【문명과 기술】
“어떤 세계에 살겠는가? 피라미드가 있는 세계? 아니면 없는 세계?”
진주만공격에 사용된 전투기는 미야자키 가족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 미야자키 감독은 제로센의 팬벨트를 만드는 공장이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소유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전쟁 동안 미야자키 가문은 호화스러운 저택에 살았고 구하기 힘든 휘발유도 어렵지 않게 사용했다. 미야자키 가족이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휘발유와 자동차 덕분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가족이 전쟁으로 재산을 늘린 사실에 부채감을 느끼지만, 부를 안겨준 비행기와 전쟁 시대에 대한 태도는 양가적이다. 양날의 검을 휘두르는 기술 진보는 미야자키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다. 그는 제로센의 첨단 기술이야말로 일본이 서구를 한순간에 따라잡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일본뿐 아니라 미야자키 가문에도 중요한 시기였던 1920~1930년대는 기술 혁신, 정치 소요, 군국주의의 부상과 함께 자연재해로도 어수선했다. <바람이 분다>에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건물들을 흔든 1923년 도쿄 지진은 미야자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몸소 경험했다.
(30~31쪽)
<칼리오스트로>의 액션 시퀀스는 역동성뿐 아니라 감정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루팡과 지겐이 자신들의 은신처와 백작의 방을 연결하는 고대 로마 수도관에 잠입하는 장면이 좋은 예다. 물속을 헤엄치던 루팡은 어느 순간 거센 수문으로 빨려 들어가고 송수로의 거대한 톱니에 끼인다. 물속에서 루팡이 톱니바퀴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장면은 <모던 타임즈>에서 주인공 찰리 채플린이 산업사회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려 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칼리오스트로>의 톱니 역시 기술의 구속성을 비판한다.
(131쪽)
개봉 당시 많은 비평가가 <라퓨타>를 전례 없는 걸작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 막바지에 미야자키는 관객에게 인류가 기술과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원대하고 심오한 질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던진다. <라퓨타>는 답을 주지 않는다. 두 아이와 해적은 반짝이는 성이 초록 나무뿌리에 휘감긴 채 더 높은 허공으로 떠오르는 광경을 그저 지켜본다.
<나우시카>는 인간과 자연이 연결돼 있다는 분명한 결론을 제시하며 막을 내렸다. 한편 공상과학과 판타지를 조합해 성을 멀리 날려 보낸 <라퓨타>는 인류가 세상의 한 부분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물으며 끝난다. 인류를 잠재적인 유토피아의 터전에서 쫓겨난 떠돌이 고아로 그린 비전은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가노가 지적하듯이 “<라퓨타>의 운명은 씁쓸한 사실주의와 시대적 감성이 지탱하는 판타지”다.
(…)
에덴동산 같은 정원과 우아한 건축물 그리고 작은 생명체들을 사랑하는 착한 로봇이 있는 라퓨타는 잃어버린 유토피아의 고전적 비전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친화적인 로봇은 기술 진보로 이룩한 유토피아에 매력을 더한다. 어린 소녀와 소년이 라퓨타 성의 고요한 길들을 탐험하는 동안 관객들은 라퓨타를 지은 사라진 사람들이 따뜻하고 섬세하며 온화한 민족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라퓨타에서 의식을 지닌 마지막 존재인 로봇은 그 자체로 유토피아 동경의 구현이자 토머스 라마르(Thomas Lamarr)가 말한 새로운 테크노컬처 패러다임의 상징이다. 기이한 형태의 얼굴과 살짝 찌그러진 눈은 초기 큐비즘 또는 미야자키가 사랑하는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익살스러운 회화를 연상시킨다. 로봇의 더 두드러진 유토피아적 요소는 동물과의 친화력이다. 영화감독 앤서니 리오이(Anthony Lioi)는 동물들과 이야기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of Assisi)가 로봇이 돼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대재앙 후 세계를 그린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2008년 걸작 <월-E>의 작은 로봇이 자라면 라퓨타 성의 로봇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픽사 제작자들이 미야자키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인류 문명이 남긴 초록에 대한 월-E의 사랑과 헌신이 라퓨타의 마음 따뜻한 로봇에 뿌리를 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도시와 자연에 모두 헌신하는 로봇은 기술과 자연의 이상적인 조합이다. 리오이는 이에 대해 “[라퓨타는] 인공지능이 환경의 친구이자 수호자가 되는 이제껏 없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이 개념에서 인간의 부재는 우리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라퓨타는 죽은 곳이다. 처음에는 시타와 파즈가 인간의 요소를 주입하는 듯하고, 그들과 로봇의 우정(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보고 자란 일본 관객들은 거대한 로봇과 인간의 우정에 익숙하다)은 기술, 인간, 자연이 마침내 유연하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
리오이는 <라퓨타>에 관한 글에서 “비평적 에코토피아”인 하늘 위 섬이 “유토피아 담화에 대한 암묵적인 비평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디스토피아 요소”를 내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 신화와 산업화의 폐해에 상처 입은 미야자키 세대가 기대는 유토피아 희망이 어떤 위험을 내재하는지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라퓨타는 매우 역설적인 유토피아로도 정의 내릴 수 있다. 처음에는 평온한 세계처럼 보였던 하늘 위 섬은 파괴적인 과거 문명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시타를 과거와 연결해주고 하늘에서 떨어지더라도 파즈의 품에 무사히 안기게 한 힘은 대량살상을 일으킬 핵무기의 힘이기도 하다. 에너지 그 자체인 라퓨타는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비극이 될 수 있다.
(…)
전쟁으로 인한 상실은 미야자키 세대의 기억에 깊이 박혀 있지만, <라퓨타>에서 상실에 관한 감각은 좀 더 복합적이고 보편적이다. 말 그대로 뿌리가 뽑힌 채 하늘을 배회하는 아름다운 라퓨타는 유토피아 희망의 상실과 함께 집의 상실을 상징한다. 아이들이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인간 방문자를 반겼던 라퓨타는 현대 기술이 더 나은 새 삶을 제공하리라는 희망을 보여줬다. 하지만 라퓨타가 사라지면서 그 희망도 함께 사라진다.
(180~187쪽)
시간은 키키가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다. 코리코에 처음 도착한 키키는 하늘을 날다가 높은 시계탑과 마주한다. 시계탑은 키키가 나고 자란 시골의 속도와 다른 ‘도시의 시간’을 상징한다. 동시에 배달 일을 시작한 키키가 약속 시각을 맞추느라 겪을 온갖 어려움도 예고한다.
하늘과 도시는 중요한 공간적 요소다. 미야자키는 키키가 바다, 시골 마을, 도시 위를 나는 장면들을 통해 그가 거친 하늘과 북적이는 코리코의 혼란 속에서도 빗자루를 점차 능숙하게 다루게 되면서 강인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현대의 시간과 도시의 공간을 향한 키키의 여행은 ‘마녀의 시간’과 시골과 자연의 공간으로 대표되는 전통과의 결별로 볼 수 있다.
(…)
라디오를 빗자루에 매달며 여행을 시작하는 키키에게 기술은 반가운 손님이다. 빗자루와 라디오의 조합은 여러 면에서 상징적이다. 아빠가 선물한 라디오처럼, 미야자키 세계에서 기술은 주로 남자 캐릭터와 관련된다. 후에 나오는 키키의 친구 톰보도 비행기를 설계한다. 한편 빗자루는 엄마 것이다. 키키는 집을 떠나면서 엄마가 준 오래된 빗자루를 거절하고 스스로 정성스럽게 깎아 만든 새 빗자루를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허락하지 않는다. 키키와 달리 엄마는 딸이 아직 완전히 독립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여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빗자루를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
키키의 라디오는 여성주의를 상징하는 빗자루와 대비를 이룬다. 빗자루에 매달려 음악, 뉴스, 일기예보를 들려주는 라디오는 기술과 자연의 긍정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아빠가 선물한 기술은 키키를 그가 앞으로 살게 될 더 넓은 세상과 연결해준다.
(236~239쪽)
키키가 시계탑과 체펠린이 각각 상징하는 시간과 기술을 받아들이면서도 다시 날 수 있었던 건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겉으로 보기에 서로 모순된 힘들이 조화를 이룬다. 미야자키는 키키와 톰보가 프로펠러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장면에서 기술과 초자연의 공존을 보여준다. 아름답지만 부산한 코리코 위로 빗자루를 타고 나는 키키의 모습은 동아시아 문화 연구가 마이클 딜런 포스터(Michael Dylan Foster)의 말처럼 “엉뚱하고 시대착오적”이다. 과거에서 온 그는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초월한다. 미야자키는 기차, 전차, 자동차 그리고 우르술라와 키키가 숲속 통나무집으로 갈 때 히치하이크한 낡은 트럭처럼 현실의 운송수단을 화면에 채워 키키의 초자연적 능력과 코리코의 대비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키키의 마법이 현대의 시간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클라이맥스는 전통이 현대화에 속수무책으로 침범당하지 않는 희망적인 미래를 그린다. 이는 엔딩 크레디트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시 생활에 적응한 키키는 또래 아이들과 친구가 된다. 키키가 톰보의 프로펠러 자전거 위로 대걸레 자루를 타고 나는 장면은 기술과 마법을 모두 포용하는 세계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248~249쪽)
인간의 알을 파괴하는 나우시카의 최종 심판은 인류에 대한 적대감이 아닌 지구를 위한 더 원대한 비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지구는 인공적 기술이 아닌 자연 그 자체에 의해 삶과 죽음이 결정될 것이다.
나우시카의 결정은 서구의 인식과 동떨어질 뿐 아니라 지구를 이용하고 파괴하려는 인류의 치열한 경쟁, 다시 말해 라마르가 정의한 “기술적 조건”과도 괴리된다. 이는 그가 서구 문명의 위대한 유물의 보고였던 정원에서 지낸 에피소드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야자키는 시부야 요이치와 나눈 대담에서 정원 에피소드가 서사의 전환점이라고 말하며 “원래 계획에 없던 정원을 끼워 넣느라 만화 분량이 늘어났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시부야는 되물었다. “그렇다면 정원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까? 저는 정원이 유럽 사상들의 유혹을 일반적으로 상징한다고 확신했는데요.” 미야자키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이 “진정한 동아시아 세계관으로 귀결”된다는 시부야의 주장에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동아시아 세계관’은 모든 종이 공생하고 어떤 종도 다른 종들보다 우수하지 않은 애니미즘 관점을 의미한다. 이 같은 애니미즘 접근법은 기술에 대한 다른 전략들을 제시한다. 지구가 정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술은 자연과 대적하지 않고 함께해야 한다. 만화와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풍차는 바람계곡의 평화를 지탱하는 기술이다. 풍차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에너지를 생산할 뿐 아니라, 애니미즘 세계에서는 바람의 신(들)과도 협력한다. 나우시카의 글라이더도 자연의 힘을 이용하지만,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 기술이다.
(304~305쪽)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음식은 병이 되기도 한다. 치히로의 부모와 가오나시에게 그랬듯이 음식은 위험하고 중독성이 강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구토(가오나시)와 배설물(오물신)과 연관되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음식은 현대사회의 과잉을 비판하는 동시에 좀 더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
치히로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서 경멸받고 소외당한다. 문화 평론가 수전 보도(Susan Bordo)는 거식증을 “미래에 대해 통제력을 잃을지 모르는 현대인의 공포”와 연결하며 신체는 “20세기에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음식을 거부하던 치히로는 하쿠가 주는 음식까지 거부하면서 두려운 바깥 세계를 밀어낸다.
가오나시는 치히로와 반대다. 형체가 없던 귀신은 커다란 입으로 닥치는 대로 먹으면서 거대한 괴물의 몸을 갖는다. 먹은 걸 다 토해내는 건 폭식증의 전형이다. 미야자키는 가오나시의 난동 장면을 이제까지 시도해본 적 없는 극단적으로 역겨운 방식으로 그렸다. 관객은 그저 충격적으로만 느낄 수도 있지만 흥미로운 사회 비판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거식증은 통제에 대한 갈망으로 생기고 구토를 동반한 폭식증은 과잉과 과잉에 대한 자기 징벌로 일어난다. 보도는 거식증이 “개인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맥락에서 소비자본주의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오나시는 일본 고유의 맥락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포스터의 캐치프레이즈인 “우리 모두에게는 가오나시가 조금씩 있다”는 다소 충격적이다.
(356~358쪽)
미디어 기술 전문가 첸 도미니크(Chen Dominick)는 <하울>을 유려하게 분석한 글에서 하울과 불의 악마 캘시퍼의 “감정적 피드백”에 따라 거듭 회생하는 성이 역동적인 “자기 창조적 시스템”을 지닌 살아 있는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첸은 성의 수많은 문이 인터넷이고, 하울은 “마법(기술)으로 네트워크를 만들고 정보를 모아 자신의 재능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외로운 해커”라고 분석했다. 하울이 정말 해커든 아니든, 여러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의 능력은 성이 외부 환경에 개방적임(그로 인해 위험에 쉽게 노출될 가능성)을 강조한다.
(376~377쪽)
그는 미야자키가 평화주의자라는 정체성과 군사기술에 대한 애정 사이의 모순을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다. 스즈키는 이런 모순을 지닌 건 미야자키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일본인이 같은 감정을 느꼈다.”라고 지적하며 <바람이 분다>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힌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인류는 역사와 지역을 초월해 고통, 죽음과 연관된 기술 진보에 열광했다. 미야자키는 이 불편한 진실을 카프로니가 지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장면에서 정면으로 마주했다. “어떤 세계에 살겠는가? 피라미드가 있는 세계? 아니면 없는 세계?” 카프로니의 질문은 피라미드의 기술적, 미적 성취는 야만적인 인간이 일으킨 고통과 희생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피라미드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영화의 메시지에 모든 관객이 공감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바람이 분다>에서 미야자키는 전작들에서도 다뤘던 질문을 새롭고 더 도전적인 방식으로 던진다. 기술이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공상과학과 판타지 장르인 <나우시카>,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는 이 문제와 안전거리를 뒀다. 한편 <바람이 분다>는 기술 발전이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 직전에 역사가 멈추는 새로운 장르의 판타지다. 이런 판타지는 역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안전거리를 둘 수 없다. 제로센이 위대한 기술적 성취인 동시에 수많은 죽음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그저 불편한 진실이 아니다. 미야자키는 “역사에 압도”됐다고 말했다.
(436~437쪽)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은 어둠에서 빛나는 빛이다.”
그의 기억에서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비현실적인 아이를 발견한다. 미야자키 세계의 아이들은 어른이 부담해야 할 책임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사츠키는 엄마 없는 가족을 돌보고,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어린 시타와 파즈는 힘을 합쳐 세상을 구한다.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다섯 살짜리 소스케가 외로운 엄마를 돌볼 뿐 아니라 거대한 쓰나미가 남긴 시련을 헤쳐나간다.
미야자키 세계에서 아이들은 적극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다.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멘 이 아이들은 작품 속 다른 인물들뿐 아니라 전 세계 관객에게도 지침이 된다. 미야자키가 동경하는 유토피아에서는 순수하고 자유로우며 이타적인 유년기가 큰 주춧돌이다. 미야자키는 “구름 끼지 않은 눈으로 보라.”라고 충고한다. 이 말의 출처인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작품 중 몇 안 되는 성인 대상 영화지만, 경험으로 쌓인 편견과 선입관의 찌꺼기 없이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은 아이의 시각이 어른보다 선명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미야자키가 재구성한 공습의 기억에는 책임감이 남다른 아이와 함께 아이를 구하는 엄마가 등장한다. 그는 대량 살상의 세계에 놓인 어린 자신, 어른들에게 “멈춰!”라고 말하는 또 다른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구하려는 엄마를 상상한다. 그는 우쓰노미야에서 한밤중에 벌어진 끔찍한 혼란과 상실을 축소하지 않는다. 대신 책임감, 공동체 의식, 용기가 제 역할을 하는 인류애적 상호작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미야자키의 불분명하고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큰 기억을 지탱하는 이 세 가지 요소는 그가 낙관적인 세계관을 추구하게 한 구심점이 됐다.
1945년 일본은 ‘파멸’했지만, 사람들은 견뎌냈다. 미야자키는 자연과 비인간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에서도 인간 사이의 교감을 강조했다. 특히 트라우마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며 재앙에서 승리하는 아이들은 변화와 희망의 원동력이었다.
미야자키의 가장 비극적인 작품들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인내한다. 상실의 세계나 초현실 세계에서 미야자키는 그저 탈출구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희망과 행동의 기폭제를 심어놓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수동적인 자세와 체념으로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는 대신 “남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인물들을 통해 저술가 데이비드 L. 엥(David L. Eng)과 데이비드 카잔지안(David Kazanjian)이 말한 “애도의 정치”를 구현한다. 상실은 애도를 넘어서 예술의 동기가 된다. 미야자키가 다카하타 이사오, 스즈키 도시오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헌신적인 스태프들과 함께 만들 작품들 역시 상실 앞에서 행동하고 부족함 앞에서도 주변을 돌보고 파멸 앞에서 다시 일어나라고 말할 것이다.
(47~49쪽)
미야자키는 그의 과도한 업무가 노조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불평하는 법 없이 언제나 즐겁고 다정하고 생기가 넘치는 그에게 모두가 기댔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병이 났지만, 아픈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설명하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소녀’는 클라리스나 당찬 라나가 아닌 현실의 그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일에 매진하는 그는 미야자키의 또 다른 자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다정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희생적인 모성 인물이기도 하다.
(138~139쪽)
지금은 대중문화에서 강한 여자 캐릭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나우시카>가 1984년 작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연민이나 보호 본능과 함께 강철 같은 투지를 지닌 여자 캐릭터를 관객들은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코난 역시 멸망 후 인류를 구출하는 구원자 캐릭터였다. 하지만 코난은 훨씬 단순한 세계에서 오로지 남성적인 힘만으로 인류를 이끈다. 한편 뛰어난 두뇌, 호기심, 생명에 대한 남다른 공감 능력을 지닌 나우시카는 갖가지 이념적, 도덕적 도전을 헤쳐나간다.
(156쪽)
파즈, 시타, 해적 친구들이 하늘에서 신나게 웃는 장면은 유토피아의 마지막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서서는 가난한 광부들이 파즈를 위해 외부인들과 맞서 싸웠다. 해적과 광부들이 구현한 협력적인 공동체는 미야자키 세계의 단골 소재이자 그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하려고 한 이상향이다. <미래 소년 코난>의 하이하버, <나우시카>의 목가적인 마을, <모노노케 히메>의 서로 아끼는 타타라 일꾼들에 이르기까지 미야자키 작품에는 다양한 유토피아 공동체가 나온다. 선한 인공지능이 사는 아름다운 정원 라퓨타 역시 미야자키의 유토피아 세계로 들어왔지만,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진정한 유토피아의 가능성은 인간에게만 있다. 단, 그 가능성은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 세상과 비인간 세상 사이의 선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188쪽)
하지만 <키키>의 성공 요인은 이상적인 유럽 광경이나 절망을 이겨낸 희망만이 아니다. 수년 동안 어린 소녀뿐 아니라 많은 젊은 세대는 키키의 모험을 자신들 미래의 모범적인 판타지로 삼았다. 코리코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낭만적인 여행을 꿈꾸게 하지만, 영화의 핵심은 키키가 다양한 사람(거의 모두 여자)과 만나면서 맺는 따뜻한 인간관계에 있다. 미야자키는 <토토로>와 <라퓨타>에서 만든 이상적인 공동체를 <키키>에서 도시에 만들었다.
(235~236쪽)
미야자키의 전작 대부분과 달리 <토토로>는 오로지 아이들의 시선만으로 서사를 이끌어나간다. 미야자키는 소녀들이 프레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숏의 앵글을 낮게 유지했다. 아이다운 동작과 몸짓을 표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비평가 호소에 히카루는 아이의 시선이 작품의 유토피아 열망, 특히 ‘순수함’을 회복하라는 암시적인 요청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주장한다. 호소에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가장 좋은 면들을 회복하라고 요청하는 <토토로>의 목표는 호기심, 수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야자키가 세상을 완전하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경이감”에 대한 열린 마음을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호소에는 미야자키가 자신의 두 가지 본성을 사츠키와 메이에게 투영했다고 추측한다.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고 환상의 세계에 거리낌 없이 발을 들이는 당돌한 꼬마 메이는 소년 미야자키가 가족에 대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와중에도 잃지 않았던 순수한 동심을 상징한다. 한편 사츠키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의 아침밥을 챙기며 동생 메이의 엄마 노릇을 한다. 동생보다 나이가 많고 어른의 책임을 떠안은 사츠키가 메이와 달리 환상의 세계 앞에서 주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는 사츠키에 대해 미야자키와 설전을 벌이며 세상에 그런 ‘착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미야자키는 화를 내며 외쳤다. “있어. 그게 나란 말이야!”
(…)
검댕 도깨비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사실에 소녀들은 안심하는 듯하다. 이는 아이의 시선이 갖는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두 자매가 이후에도 초자연적인 현상을 용감하고 씩씩하게 마주하리라는 사실을 예견한다. 이웃 할머니의 손자 칸타가 사츠키와 메이에게 “너희 집은 밤에 귀신 나온다.”라고 소리칠 때도 자매는 기죽지 않는다. 신비한 현상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아빠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관한 본보기를 보여준다.
(199~203쪽)
그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성숙과 함께 찾아오는 의무와 자유를 지키고 누리며 사회생활, 경제생활 그리고 사랑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세속과 마법을 결합한 일을 시작한다. 배달 일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빗자루를 타고 공갈 젖꼭지에서 무거운 상자에 이르는 갖가지 소포를 폭풍우와 궂은 날씨 그리고 자기 의심과 절망을 헤치며 배달한다.
미야자키는 환상과 일상을 조합해 젊은 관객에게 자립이 인내, 끈기, 의지와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행히 키키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원작 소설은 키키가 배달하는 흥미롭고 놀라운 물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미야자키의 영화는 코리코 사람들과의 만남에 초점을 맞춘다.
(…)
미야자키는 경제적인 문제를 통해 또 한 번 원작에서 멀어진다. 카도노의 소설에서는 키키의 배달 서비스가 ‘무료’인 반면, 영화에서는 돈과 관련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키키가 배달료를 받는 장면 외에도 오소노가 자기 대신 빵집을 지키는 키키에게 손님에게 얼마를 받아야 할지 가르쳐주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미야자키는 키키가 경제적, 심리적 독립의 대가로 포기해야 하는 유년기의 작은 기쁨들도 강조한다.
(239~245쪽)
젊은 직장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나가 버린 유년기에 향수를 느낀다. 자립 과정에서 겪는 혼란과 희생을 깨달을 때 느꼈던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는 영화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든다. 흥미롭게도 키키는 다시 날게 되지만, 지지와는 더 이상 대화하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에서 도시의 새로운 집 위를 나는 키키는 코리코에 처음 왔을 때보다 강해졌지만, 더 이상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는 성장에 따르는 엄중한 결과다.
(250쪽)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미야자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에보시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그의 말에 무척 놀랐지만, 몇 년 뒤 강인하고 현명하며 추진력이 강하면서도 너그럽고 타협할 줄 아는 에보시야말로 모범적인 지도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보시가 여자라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야자키의 가장 놀라운 능력 중 하나는 오랫동안 이어진 관습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
미야자키는 에보시에게서 자신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공동체 지도자로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인류애를 포기하지 못한 에보시의 복잡한 심경을 미야자키도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매일 느꼈다. 철과 무기를 만드는 노동자들이 성매매를 당하던 여성과 한센병 환자라는 사실은 미야자키의 다면적인 심리를 훌륭하게 투영한다. 미야자키는 험준한 산이나 숲에서 마을을 이뤄 철을 만들던 중세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일꾼들을 여자로 설정해 여자들이 철을 만지면 부정을 탄다는 역사적 선입견을 뒤엎었다. 더욱 파격적인 건 에보시가 숲의 신들을 무너트리기 위한 화승총을 한센병 환자들에게 만들게 하는 장면이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에보시의 연민과 그들에게 맡긴 일의 무시무시한 속성은 지도자로서, 더 광범위하게는 인간으로서 수용해야만 하는 일종의 도덕적 타협을 탁월하게 상징한다.
미야자키가 전통적인 시대극과 얼핏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들을 만든 건 일본 역사에 관한 다양하고 풍성한 시각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는 한센병 환자다. 가노에 따르면 미야자키가 영감을 얻은 곳은 집 근처에 있는 한센병 환자 요양소인 타마젠쇼엔(多磨全生園)이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까지도 전염성이 약한 한센병을 ‘위험 질병’으로 분류해 환자들을 철저하게 격리했다. 그런데도 긍정적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요양원 환자들을 보고 미야자키는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는 당시 느낀 놀라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어떤 역경이 닥쳐도 즐거움과 웃음은 있다. 인간의 삶이란 거의 모든 게 불확실하기 마련인데 난 요양소에서 그 사실을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말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경솔함에 관한 그의 여러 날선 비판보다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그가 사회에 대한 환멸과 내면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상주의가 마음속에 여전히 불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한 언급은 그 이상주의가 비현실적인 극단의 형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타타라 사람이 모두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멍청한 사람도 있고 정신이 나간 사람도 있죠. 인간이란 그런 거니까요.”
(321~323쪽)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가족은 많은 관심을 받는 중요한 문제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특히 어려운 주제다. 스기타는 20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일본 가족 구조가 여러 차례 큰 변화를 겪었다고 지적한다. 이혼율은 다른 산업국가들보다 훨씬 낮지만, 세대 간 반목이 심해지고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거의 남자)이 부모 집에 살면서 가족뿐만 아니라 바깥 세계와도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히키코모리(引き籠り) 현상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 젊은 세대의 범죄가 증가했고, 언론에서는 폭력과 학대를 일삼는 자녀들과 그들의 기행을 짐작도 못했거나 알면서도 방치한 가족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연일 보도했다.
미야자키는 분명 <하울>을 통해 이 같은 가족의 해악을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울이 전형적인 히키코모리는 아니지만, 지나친 자기애, 무책임함, 고립으로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미성숙한 남자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캐릭터들 역시 대부분 가족에게 무심하다. 한편 영화 초반에서 소피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동생 래피가 잘 지내는지 살피러 간다.
하울의 어린 제자 마르클이 소피에게 “우리가 가족”인지 묻는 장면에서 미야자키는 가족의 힘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소피의 치마폭에 안기는 마르클에게서 우리는 절실함과 안도를 느낀다. 노인으로 변한 황무지의 마녀를 소피가 받아들이는 에피소드 역시 미야자키가 만들었다. 적이었던 그를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은 소피의 성숙함과 연민을 상징할 뿐 아니라 힘없는 노인 세대에 대한 관용과 애정의 본보기다. 소피가 실제로 마법의 힘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울, 캐시퍼, 황무지의 마녀에 이르기까지 주변 존재에게서 최고의 면을 찾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건 확실하다.
(387~388쪽)
영화가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저주받은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이다. <모노노케 히메>가 제시하는 두 가지 해결책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첫 번째는 영화 포스터의 캐치프레이즈이자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로 괴로워하는 산에게 아시타카가 한 말 "살아!"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이 메시지는 사람들이 허무에 빠져 있던 1990년대 미야자키가 절실하게 매달린 신념이다. 두 번째는 구름 끼지 않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영화는 피에 굶주린 괴물의 공격과 인간의 무자비한 산업화를 동시에 보여주며 관객에게 세상의 모든 면을 선명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도록 요구한다.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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