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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학교 교육의 폭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인용 2024. 8. 10. 19:19
아치는 교실에서 전형적인 학습 능력이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아이였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도 읽고 쓰는 능력이 또래 아이들보다 뒤떨어져서 지능 테스트 성적은 초등학교 1학년 정도였다. 담임교사와 학교 심리학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치는 주의가 산만하고 집중력이 결여되어 있는 아이였다. 예를 들어 말놀이 게임에서 친구가 “beer와 wine은 왜 비슷하지?”라고 물어보았을 때 모두가 “마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면 아치는 “deer는 음료가 아니야!”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방과 후 요리 클럽에서 아치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즉, 요리 클럽에서는 ‘학습장애아’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가장 유능한 클럽 구성원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룹으로 나눠서 케이크를 만들 때, 아치는 레시피를 제대로 읽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활동을 늘 주도하였다. 즉, 오히려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 자신과 다른 아이들의 행동을 잘 조직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치는 요리를 만들 때 레시피를 읽지 못할 경우 다음과 같이 친구를 적절히 활용했다. “리치, 컵 하나와 하나 반이라고 쓰여 있는지 확인해 봐!”라고 하면서 리치에게 레시피를 읽히거나 “테이블 스푼 네 개”라고 말하면 파트너인 리치가 “티스푼 네 개”라고 고쳐서 말해 주었다. 이처럼 요리 클럽에서는 학교와는 달리 ‘읽지 못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 아치는 장면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걸까? 요리 클럽에서 가시화된 아치의 ‘유능함’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테스트 장면과 교실에서의 수업 장면의 ‘특수성’을 비춰 볼 수 있는 훌륭한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테스트 장면과 수업 장면 그리고 요리 클럽의 가장 큰 차이는 활동의 목적에 있을 것이다. 테스트와 수업에서는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교사와 동료 학생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교실이라는 사회 집단은 주로 ‘누가 머리가 좋은지?’라든지 ‘누가 잘 알고 있는가?’, ‘누가 빨리 맞추는가?’와 같은 물음에 초점을 맞추도록 조직되어 있다. 말을 바꾸면 교실인일 때 학생은 교실이라는 상황에서 언제나 그 능력과 지식을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평가받는 것이다. 혹은 ‘성공’과 ‘실패’가 모두에게 주목을 받도록 상황이 조직되어 있다.
따라서 서로 도와서 협력하는 것은 규칙의 위반이고, 교사의 질문과 테스트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외우는 것이 힘드니까 외우는 수고를 좀 덜기 위해서 책상 위에 내용을 써놓는 것을 교실에서는 ‘부정행위’로 간주한다. 노트는 굳이 외우지 않아도 그것을 보면 내용을 알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쓰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요리 클럽은 함께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주된 목적을 이루는 장이다. 일이 잘 되어 가는 한 서로서로 도와 줄 것이고, 그러한 협력을 비난하는 사람도 없다. 누가 머리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는 작업을 쉽게 하려고 학교에서의 테스트와는 다르게 언제나 환경과 과제를 바꿀 수 있다. 아치의 ‘유능함’과 ‘무능함’은 ‘실체’ 혹은 ‘명사’가 아니라 위와 같은 사회적 상황을 반드시 배경으로 해서 우리 눈앞에 가시화되는 것이다.
교실에서 보여지는 아치의 ‘무능함’은 일종의 실체로서 아치의 내면에 붙박이처럼 애당초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실이라는 사회의 조직화 양상으로부터 발생하는 일종의 ‘불협화음’인 것이다. 그의 연주하는 소리(글 읽기)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불협화음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교실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활동 안에서는 ‘어긋난 음’으로 취급을 받게 된다. 이처럼 아치의 ‘무능함’은 개인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그리고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로 우열을 가리는 교실이라는 콘서트장에서만 가시화되는 이른바 특수한 ‘불협화음’이다.
수업 중에 아치는 주위 사람과 도구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자기 혼자 ‘능력’으로 과제를 수행할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러한 교실에서의 과제 디자인이 개인에 내재하는(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능력’의 부족으로서 과제의 실패를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학습장애’가 가시화된 것이다.
박동섭, 「장애는 실체가 아니다 - 속성의 디자인」, 『심리학의 저편으로: 상황, 인지, 학습을 다시 묻다』, 두번째테제, 2024, 234~236쪽. (강조는 인용자. 전술사항은 Coal & Traupmann, 1981.)
학생들과의 만남에서 제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어른들을 믿지 말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국의 어른들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미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고통에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또한 저는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부여한 평가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꼭 덧붙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도,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도, 학교의 평가에 따라 자기규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학교의 성적이 한 인간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꼭 강조합니다.
성적은 그저 그 학생이 ‘한국 교육에 얼마나 잘 적응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감수성과 정의감을 가진 학생은 한국 교육에 잘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성적이 너무 좋은 학생은 자신이 한국의 비정상적인 경쟁 교육에 너무 잘 적응하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돌아봐야 하고,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도 자신은 이런 교육과 맞지 않는 감수성을 가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말이지 저는 모범생의 오만한 우월감과 열등생의 깊은 굴욕감이 모두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저는 분당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한 학생이 자살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학생이 살아서 한 마지막 행동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 짧은 인생에서 그가 한 최후의 행동이 바로 서점에서 문제집을 산 것이었습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시험이 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교육의 끔찍함을 웅변해 줍니다.
김누리,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교육계의 갖가지 꼬인 난제에 대해 시원하면서도 단호한 해결책을 내놓아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는 교육부 장관은 모처럼 마음 편한 휴일을 맞아 가벼운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이념 충돌이 가장 치열한 영역이 교육인 데다 시도교육감들에게 워낙 강한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보니 교육부를 이끌어가는 일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하지만 오랜 연륜에 원만한 성품과 리더십으로 무장한 그는 적당히 물러서면서도 결단의 순간에서는 거듭 올바른 길을 택해 교육부 폐지를 잠재우고 오히려 교육부를 가장 혁신적 부처로 탈바꿈시키는 중이었다.
오래 못 본 코넬대학교 동창들과 저녁을 같이 하기로 한 교육부 장관은(…)
학교 교육의 폭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수학은 세상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요. 예술도, 언어도 그렇듯이.
그러나 예술이나 언어와 달리 수학은 긴 시간 공부를 해야만 그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어요. 너무나 생소하고 많은 개념을 먼저 깨우쳐야 합니다.
달리 말해 그 과정이 즐겁지 않은 학생은 평생 단 한 번 쓰지도 않을 것들을 억지로 공부하며 낮은 평가를 받고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야 해요.
ー 수학을 안 가르칠 수는 없어요. 수학을 해야 반도체도 만들고 배터리도 만들고 하니까. 실질적으로 외국과의 경쟁에 가장 중요한 과목이 바로 수학이에요.
중고생들은 당장 힘든 건 안 하려 들어요. 만약 선택적으로 수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금세 대부분의 학생이 수학을 포기하게 되겠지요? 결국 국가는 경쟁력을 잃어요. 적성에 맞고 적성에 맞지 않고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식물을 키워 본 적이 있습니까?
제때 가지를 잘 쳐내면 남은 가지는 싱싱하게 잘 자라요. 뿌리가 가져올 양분은 정해져 있는데 먹어야 할 이파리는 많기 때문이지.
또 다른 방법은 큰 화분에 흙을 더 담아 분갈이를 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 가지를 쳐내지 않아도 더 풍성하게 자랄 수 있으니까.
쳐낸 가지를 새 화분에 꽂는 방법도 있어요.
그중 당신은 첫 번째 방법만을 압니다. 그 사실을 깨달았나요?
첫 번째라도 잘해 온 사람이니 풀어 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조차 드무니까.
지금의 생각을 잊지 않기를 바라요.
김진명, 『풍수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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