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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법인은 천사를 많이 닮았다.인용 2024. 6. 10. 14:43
주식회사의 세계사: 신학적 관점
(…) ‘마르지 않는 금고’가 결코 바닥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은 대출을 끊임없이 해주면서 이자를 받고 원금에는 손을 대지 않았던 까닭에 대출 자체가 사실상 위험이 전혀 없는 투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이슬람과 달리 오늘날 우리가 “법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매우 비슷한 조직을 낳았다. 아주 매력적인 법적 픽션을 통해 우리가 개인과 똑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된 그 법인 말이다. 법인들은 법적으로 인간과 똑같지만, 불멸이며 결혼이나 출산, 노쇠, 죽음 같은 인간의 힘든 단계를 거칠 필요도 없다. 그것을 중세의 언어로 고쳐 옮기면, 법인은 천사를 많이 닮았다.
법적으로, 법인의 개념은 중세 성기 유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법인을 “가공의 사람”(persona ficta)으로 보자는 사상이 처음 확립된 것은 1250년 인노첸시오(Innocent) 4세 교황의 교회법을 통해서였다. 그 개념이 처음 적용된 곳 중 하나가 수도원이었으며, 대학과 교회, 공국, 길드에도 적용되었다. 여기서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법사학자 프레데릭 윌리엄 메이틀랜드(Frederic William Maitland)가 법인을 어떤 식으로 설명했는지를 보자. “소송을 하기도 하고 소송을 당하기도 하며, 토지를 소유하고, 인장도 갖고 있으며, 소속된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한 규정을 만들면서도 불멸인 개인이 법인이다.”
법인을 천사 같은 존재로 보는 것은 나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위대한 중세 전문가인 독일의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천사들을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구현으로 보던 때를 전후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하나의 종(種)을 대표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법률상으로 불멸의 종(種)이 된 것들이 천사의 특징을 보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 법학자들도 자신들의 추상적 개념들과 천사 같은 존재들 사이에 비슷한 점이 몇 가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중세 후기 사상의 정치적, 법적 세계에 불멸의 천사 같은, 크고 작은 실체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천사 같은 실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나이도 먹지 않으며, 영원하고, 불멸이며, 가끔은 어디에나 존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실체들은 천상의 존재들의 “영적인 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지적인 몸 또는 신비적인 몸도 물려받았다.
이런 것들은 강조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법인들의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단정하는 데 익숙한 반면에,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그것들이 이상하고 엉뚱한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위대한 전통들에서는 그것과 비슷한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중세의 특징 하나로 형이상학적인 실체들이 끝없이 증식된 현상이 꼽히는데, 거기에 유럽인들이 더한 형이상학적 실체 하나가 바로 법인이었다.
(542~543쪽)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부채, 첫 5, 000년의 역사 : 인류학자가 고쳐 쓴 경제의 역사』,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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