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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팸플릿) 카를마르크스 슈퍼스타인용 2024. 6. 7. 20:03
낡은 것이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 안토니오 그람시
그런데 소련만 과연 그랬을까요? 1970년대에 이미 산업화를 이룬, 비교적 안정된 제1,2세계 사회들을 보면 사실 "우경화"를 겪지 않은 사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한 때에 1968년의 혁명 열정에 극좌파적 입장을 취한 일각의 신진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이 보수화되어 "신흥 철학자"의 이름으로 신보수주의적 철학을 이끌게 됐습니다. 1980년대 이후 서구 학계를 석권하게 된 미셀 푸코 철학의 정치적 근저 중의 하나는 바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과 반발이었습니다.
(…)
신자유주의 파산, 기후 참극의 도래, 그리고 오늘날 가자 학살과 같은 미국의 지역적 하위 파트너들의 노골적인 전쟁 범죄 등이 과연 다시 한 번 선진권에서 대중적인 급진성의 회복을 가져다줄까요? 그 정도를 미리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젊은층의 급진화는 일부 구미권 사회에서는 보입니다. 위기 심화에 따라 그 정도가 더 커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 적어도 일부의 사회에서는 - 새로운 좌경화의 시대를 머지 않아 볼 것 같습니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1970년대, 세계적 보수화의 분수령』)
“The only thing I'm afraid of is that we will someday just go home, and then we will meet once a year, drinking beer and nostalgically remembering what a nice time we had here. Promise ourselves that this will not be the case.” (유튜브)
Carnivals come cheap – the true test of their worth is what remains the day after, how our normal daily life will be changed. The protesters should fall in love with hard and patient work – they are the beginning, not the end. Their basic message is: the taboo is broken, we do not live in the best possible world; we are allowed, obliged even, to think about alternatives.
Occupy Wall Street: what is to be done next? | Slavoj Žižek | The Guardian
좌파의 많은 내부적 문제 중의 하나는 저는 바로 '동류'로 상상되는 그 연대 대상에 대한 분석적, 비판적 의식의 결여나 연대에 대한 '장기 지속성' 같은 겁니다. 좌파는 "켐페인"을 좋아합니다. 그 "켐페인"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가두 시위가 벌어지고 "분위기"가 만들어지지만, 또 그 속에서는 "켐페인" 대상에 대한 분석적 능력이 부족한 경우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거기에다 더해, "켐페인"이 끝나고 주목이 새로운 이슈로 옮겨지면 과거 연대 대상에 대한 관심 자체가 증발되곤 하죠. 그 만큼 좌파에 '지속성'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개선시키지 않으면 좌파의 미래가 좀 어둡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판성과 책임 의식, 그리고 지속성 없이는 대중들의 신뢰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박노자, 『좌파에 필요한 건, 책임 의식』)
“당신들은 형제단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거요. 물론 형제단이 어떤 건지는 나름대로 상상을 했겠지요. 어쩌면 음모자들의 거대한 지하조직이 지하실에서 모임을 가지며 벽에다 메시지를 휘갈겨 쓰고, 암호나 특수한 몸짓으로 서로를 알아보리라고 상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소. 형제단 단원들은 서로 알아보는 방법도 없고, 몇 명의 단원을 제외하고는 서로의 신분을 알아내는 것도 불가능하오. 설령 골드스타인 자신이 사상경찰에 체포된다 해도 전체 단원의 명단을 넘겨줄 수도 없고, 그런 명단을 입수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도 없소. 그런 건 애초에 있지도 않으니까 말이오. 그리고 형제단이란 일반적인 의미의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소탕할 수가 없소. 단지 그 조직은 해체되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유지돼 가지요. 그런 일념만이 당신들에게 힘이 될 거요. 동지 의식을 갖는다거나 격려 따위를 받는 일은 없소. 당신들이 체포된다 해도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거요. 우리는 같은 단원을 돕지 못하오. 돕는 거라면 기껏해야 입을 틀어막아야 할 필요가 있는 단원에게 감방 안으로 면도날을 몰래 넣어주는 것 정도요. 결국 당신들은 아무런 보람도 희망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오. 얼마 동안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자백하고는 죽게 될 거요. 그것이 당신들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보람이자 희망이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어떤 형태의 변화가 일어날 가망성은 거의 없소. 우리는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요. 우리의 진정한 삶은 미래에 있소. 우리는 미래에 가서야 한줌의 먼지와 몇 조각의 뼈다귀로 변해 새로운 삶을 열 수 있는 거요. 그런데 그 미래의 삶이 언제쯤 열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소. 어쩌면 수천 년 후일지도 모르지요. 현재로서는 건전한 정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뿐이오. 우리는 집단행동을 할 수 없소.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개인에서 개인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줄 수 있을 뿐이오. 사상경찰이 감시하고 있는 한 다른 방법이 없소.”
(정희성 역 민음사판)
마르크스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이 아닌, ‘다른 이의 비참’을 목도했던 경험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하라’고 주장한 게 아닙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 높은 윤리성 덕에 맑스주의는 역사의 풍설을 견디고 오랫동안 살아 숨 쉴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부디 맑스 독해에서 주안점을 두었으면 하는 점은, ‘소외된 노동’을 거론하는 마르크스의 뜨거움입니다. 제가 봤을 때 맑스의 화폐론이나 지대론 따위는, 극단적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이시카와 선생한테 혼날 테지만요). 마르크스의 인간적인 면모라 함은, 그가 ‘소외된 노동자’들을 생각할 때면 금세 흥분해 버리는 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무참한 사회의 실상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한 청년이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죽자 살자 파고들며, 당대의 사상과 학문을 섭렵하고, 취할 것은 취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최고 속도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 나가는, 그 절박감.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부디 온몸으로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内田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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