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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음악과 독서와 배움인용 2024. 5. 16. 10:16
“어떤 작품이 인간과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관한 유익한 정보나 미적 가치를 담고 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치유”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179~180쪽)
피아노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물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처럼 치는 것이 목표라면 그건 불가능하다고 단호히 말하겠지만, 피아노는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동료 선생님들과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 성인 학생보다 어린 학생을 선호한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성인 학생을 가르치면서 더 보람을 느낀다. 우선 어린 학생은 본인 의지보다는 부모님 의지로 오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성인 학생은 본인의 귀중한 돈과 시간을 써서 오기 때문에 열정이 넘친다. 무언가에 돈과 시간을 쓴다는 것이 바쁜 성인에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뼈저리게 느낀다.
2년 전쯤,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하다 은퇴한 70대 할머니가 나를 찾아오셨다. 평생 단 한 번도 악기를 배운 적이 없고 악보도 볼 줄 모르지만 피아노 연주 듣는 게 너무 좋아서 한번 배워 보고 싶다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분은 나에게 레슨을 받고 계시다. 얼마 전에는 암보(악보를 외워서 치는 것)로 ‘모차르트 미뉴에트 F장조 K.2’를 성공적으로 연주했고, 모든 음계(스케일)와 아르페지오를 막힘없이 칠 수 있다. 도레미가 건반 어디에 있는지, 4분음표와 2분음표의 차이는 뭔지, 피아노 앞에 어떻게 앉아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던 2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크나큰 성장이다.
(임정연 지음, 『피아노 시작하는 법: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기쁨』 23~25쪽. 유유 땅콩문고 / 세종도서 교양)
옛날 사대부가 배워야 할 과목 중에 ‘육예(六藝)’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을 말합니다. (…) 악은 음악입니다. 왜 음악이 두 번째에 오는지 오랫동안 그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압니다. 공자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정적에 쫓겨서 방랑 생활을 할 때도 거문고 켜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악은 시간 의식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풍부한 시간 의식을 갖추지 않으면 음악을 감상할 수 없습니다. 악기 연주도 감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이미 사라져 버린 소리’가 아직 들리고 ‘아직 들리지 않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과거와 미래의 확장 속에 몸을 두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음(單音)의 음악은 없습니다. 리듬도 멜로디도 선행하는 악음과 후속하는 악음을 엮어 내는 관계 속에서만 이뤄집니다. ‘선행하는 악음’도 ‘후속하는 악음’도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는 들리지 않습니다. 즉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연주를 들을 수도 없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 그때까지 들었던 선행 악장의 모든 음악이 ‘지금도 들리는’ 사람, 앞으로 계속될 악장의 모든 악음이 ‘벌써 들리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들리는 단독의 음(그것은 사실상 원리적으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만 가설로서)을 깊게 맛볼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듣는 곡이라도 그때까지의 악음을 쭉 기억하여 들리는 사람은 앞으로 이어질 악상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기대에 딱 들어맞는 음이 들리면 쾌감이 찾아오고 기대를 조금 벗어나면 거기서 그루브가 발생합니다.
음악을 즐기려면 가능한 한 긴 시간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죠. 만약 태어나서 들었던 모든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듣는 모든 음악 속에서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음악의 변주와 화음과 배음*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음악(아직 아무도 연주한 적이 없는 음악)을 예측해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이것도 가설입니다만) 그 사람이 음악을 들을 때의 쾌락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음악에 관해서는 과거와 미래에 시간 의식의 날개를 크게 펼칠수록 더 큰 쾌락을 약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시간 의식을 기르기 위해 매우 중요한 과목으로 여겨졌다고 봅니다.
(우치다 다쓰루 저, 박동섭 역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73~76쪽.
*배음: overtone; 물리학・음악 - 어떤 기본음의 정수배(整數倍)의 진동수를 가진 음. 하모닉스. - 인용주)
참고: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음악이라는 것은 ‘더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여전히 들리고, ‘아직 들리지 않은 소리’가 벌써 들린다는 시간 의식의 확대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선율이나 리듬을 말하는데, 이것은 ‘더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기억함으로써 ‘아직 들리지 않은 소리’를 선구적 직감으로 현재에 끌어당겨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음악적 경험은 ‘더는 들리지 않는 소리’와 ‘아직 들리지 않은 소리’의 범위가 넓을수록 깊고 두터운 것이 됩니다. 현재에서 전후 수 초밖에 소리를 재생할 수 없는 ‘단기 기억’의 청취자와 수십 분짜리 교향악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재생할 수 있고 그것을 근거로 앞으로 곡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기(豫期 - 인용주)할 수 있는 청취자는 같은 음악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즐거움의 질이 다릅니다.
저는 이 능력을 ‘맵핑’이라고 부르는데, 이 능력은 단지 독서나 음악 감상만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자신을 포함한 풍경을 조감하는 힘. 헤겔이라면 그것을 ‘자기의식’이라고 부를 것이고, 후설이라면 ‘초월론적 주관성’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능력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독서는 그 힘을 함양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때 항상 ‘이야기를 다 읽은 미래의 나’라는 가상적인 소실점을 상정합니다. 독서란 ‘읽어 가는 나’와, 이야기를 끝까지 다 읽고 모든 인물의 모든 언동 속 모든 수수께끼 같은 복선의 ‘진짜 의미’를 이해한 ‘다 읽은 나’와의 공동 작업입니다. 종이책에서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읽어 가는 나’와 ‘다 읽은 나’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다 읽은 나’가 느끼는 기쁨을 조금씩 앞당겨 맞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페이지의 마지막 한 줄을 다 읽어 낸 순간, 마침내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기 시작한 인부들이 암흑의 한 점에서 만나고 거기로 단번에 신선한 공기가 흘러 들어가듯이 ‘읽어 가는 나’는 ‘다 읽은 나’와 만납니다. 독서는 그러한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같은 책, 197~199쪽)
‘이런 책을 골라 읽는 사람’이라고 타인이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책을 고르는 데서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자크 라캉의 말을 빌려 보자면 우리 집의 책장은 “전미래형으로 쓰여 있다”고 해도 좋겠죠.
‘전미래형’이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완료한 행위와 상태에 관해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오늘 오후 세 시에 나는 이 일을 끝마칠 것이다’처럼요. 책장에 비치된 책이 ‘전미래형으로 쓰여 있다’는 것은 그 서가를 본 사람이 ‘아, 이 사람은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구나, 이런 책을 읽는 취향과 식견을 갖춘 사람이구나’ 혹은 ‘이 사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는 욕망이 책장에 공공연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저의 서가에는 하이데거 전집 옆에 도라에몽 인형(누구한테 받았습니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 전집 옆에는 공포 영화의 대가인 영화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 DVD가 꽂혀 있고요. 솔직히 귀찮아서 그냥 툭하고 거기에 꽂아 뒀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어떤 ‘작위’가 작동했습니다. 하이데거부터 도라에몽까지, 마루야마 마사오부터 다리오 아르젠토까지 넓게 커버할 수 있는 관용적 지성의 소유자임을 알아 달라는 제 욕망이 거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책, 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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