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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표변豹變, 봄・봄인용 2024. 5. 1. 08:29
(이하 은희경 『새의 선물』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내가 어른들의 비밀에 쉽게 접근한 것은 바로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어린애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다루기 쉽도록 어린애를 그저 어린애로만 보려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린애로 보이기 위해서는 예쁘다거나 영리하다거나 하는 단순한 특기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처럼 일찍 세상을 깨친 아이들은 어른들이 바라는 어린이 행세를 진짜 어린이 수준밖에 못 되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게 해낸다. 그래서 어른들 비밀의 겉모습은 조금 엿봤을망정 그 비밀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한다.
나는 봉희처럼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하는 어린애들을 경원한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스스로 어린애임을 드러내 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린애답게 보이는 것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 바로 이럴 때에 어린애라는 것이 무기가 되어준다. 하룻강아지인 나는 범 무서운 줄을 모르기 때문에 대담하게도 홍기웅에게 반말로 소리친다.
입술을 비죽거리며 방바닥으로 내려앉는 이모는 스무 살을 어디로 다 먹었는지 아무리 봐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느낄 수가 없다. 저렇게 어린애 상태에서 머물러버린 것은 어쩌면 어린시절을 고뇌 없이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내게 있어서는 태생의 고뇌야말로 성숙의 자양이었다. ‘고뇌’라는 그 자양이, 삼촌방의 다락에서 이루어진 ‘독서’라는 자양과 합해지면서 비로소 삶에 대한 나의 통찰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그리고 너그러웠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침밥을 먹으라고 할 때는 도리질을 하더니 할머니가 저녁 밥상을 들여오자 이모는 한쪽 팔을 방바닥에 짚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는 깊은 슬픔이 풍겨져나왔다. 어쩌다 이형렬의 편지가 늦어질 때 세상 전체에게서 버림받은 것처럼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듯 슬픔을 연기할 때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절망 이후 이모의 선택은 체념뿐이었으며 내키는 대로 삶에 대해 응석을 부리며 살아온 이모에게는 체념을 알아가는 과정이 일종의 탈태였다. 이모는 번데기의 태를 벗어버리기 위해, 생전 처음 자기의 존재와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경자이모가 다녀간 후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 돌이켜질 수 없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깨달았는지 혹은 그로 인해 자기 존재와의 싸움에 더욱 분연히 달겨들었던 것인지 화요일이 되자 이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세수를 하더니 긴 머리를 빗어 질끈 묶고는 제 손으로 밥상을 들여오는 등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좀 상해서 그렇게 보였을까. 마음속에 시련을 겪은 이모에게서는 앳된 기운이 스러지고 어딘지 성숙한 분위기가 났다.
… 어쩐지 이모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젖살이 빠져나가 제 윤곽을 찾은 아기의 얼굴처럼 이모의 얼굴은 군더더기 없는 청순함을 내뿜고 있었다. 부자연스럽던 쌍꺼풀도 차분한 표정에 알맞게 균형을 이루었다. 말없이 콩깍지를 비트는 심상한 손놀림 역시도 늘 뜬구름 같던 그 호들갑스러운 몸짓이 아닌 듯했다.
물론 순간적인 느낌일 뿐일 것이다. 아무리 실연의 상심이 컸다 한들 이모는 이모이고 며칠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는 없다. 내가 유의한 것은 이모가 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모의 내면에 다른 모습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모의 내면에는 수많은 다른 모습들이 함께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들 중에 하나씩을 골라서 쓰는 제어장치, 즉 이모의 인생을 편집하는 장치가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면 이모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우리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라는 존재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이모 쪽을 쳐다보니 이모는 몹시 놀라기는 했지만 그 남자를 배척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런 때야말로 이모가 변한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제 이모는 샐쭉하거나 일부러 지어 보이는 교태 따위는 부리지 않는다. 지금처럼 제 모습 그대로 이모는 아름답다. 이제야 말이지만 나는 변한 후의 이모 못지않게 변하기 전의 이모 역시 좋아했던 것 같다. 또 내 생각을 더욱 솔직히 말하라면 나는 이모가 완전히 변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성숙해가긴 하지만 크게 변하진 않는다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다. 이모는 변한 게 아니라 성숙한 것뿐이며 얼마 안 가 잠시 유보되었던 천성이 이모를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철없고 그리고 순수한 본래 모습으로.
… 그 가을 이후 이모는 많이 성숙했다. 그리고 내가 이모를 그렇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이모 역시 나를 보고 많이 성숙했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더이상 성숙할 게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지나간 일기장에서 ‘내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긴 목록을 발견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다 말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면체로서 언제나 흘러가고 또 변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삶 속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고 믿을 것이며 또 그 믿음을 당연하고도 어이없게 배반당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를 입을 것인가. 무엇인가를 믿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그 일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삶을 꽤 심각한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목록을 다 지워버렸다.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렸으므로 할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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